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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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인지라 책을 읽고 난 후의 경험과 평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듯 눈앞을 확트이게 해주었던 책이 [데미안]이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영원히 싫어할 수 없는 작가가 되어 버렸고, 누가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책이 뭐냐?’라고 물어보면 [데미안]이라고 말해주곤 하였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골드문트였다. 아마 지금까지 읽은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가운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데미안은 어쩐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과 같고, 싱클레어 역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나 자신과 오버랩되기도 하였지만 데미안(또는 에바 부인)의 말에 껌뻑 죽어버리는 지극히 모범적인 마무리(?)가 딴 세상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골드문트는 얼마나 멋진가!!! 또한 얼마나 반항적인가!!! 세상 속에 뛰어들어 자신이 바라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두려움없는 용기, 혈혈단신으로 독일 전역을 종횡무진 헤매는 그 자유로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변덕은 있으되 결코 변하지 않는 우정, 뭇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황금입술 골드문트,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였을 때 느끼는 생명의 에너지 등등. 남자가 보기에도 멋져 보이지 않는가? (아닌가?)

내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작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읽느냐에 따라서 느끼는 바가 달라진다는 점 때문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이번에 새롭게 읽으면서 10대나 20대에 읽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받았다. 치기에 가까운 자신감이 넘치면서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 내가 골드문트에게서 본 것은 ‘니가 나를 밟고 지나갈 테냐? 깔려 죽을지언정 길을 비킬 수 없다’라고 선언하듯 수레바퀴 앞에 앞발을 쳐든 사마귀의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좁은 수도원 골방에 쳐박혀서 세상과 담을 쌓은 삶을 사는 나르치스의 인생은 얼마나 쫌스러워 보였는지 모른다. 뭐하러 그렇게 산담.... 나는 자연히 골드문트의 삶에 이끌렸고, 이에 비교하여 나르치스의 삶에는 거북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보니 골드문트는 그렇게 화염과 같은 격렬함과 화려함으로 뭉친 사람만은 아니었고 나르치스 역시 골드문트를 빛나게 하는 조역으로서만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흔히 이 책을 [지(知)와 사랑]으로 번역하면서 골드문트에 감성, 사랑, 예술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나르치스에 지성, 학문, 종교 등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지만 둘 사이는 엄밀하게 나누어 보기 어렵다. 그들은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서로 다른 등산로를 택한 사람들과 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본질적으로 하나인 존재가 서로 다른 표출방식을 가지고 있는 느낌 말이다.

골드문트는 기본적으로 ‘구원’을 갈망하던 사람이었고 구원에의 여정의 출발은 본능적 부름에서 비롯하였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와의 이별과 아버지의 욕망대로 자라야 했던 어린시절부터 그의 앞에 주어진 인생의 선택지는 마리아 브론 수도원에서 평생을 수도사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르치스의 도움(?)을 얻어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고, 아마도 집시로 생각되는 리자라는 여인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사랑을 발견하면서 세상으로 나온다. 그리고 어떤 경우 사랑이 이끄는대로, 어떤 경우 예술혼이 이끄는대로, 어떤 경우 본능과 욕망이 이끄는대로 세계를 주유한다.
나르치스 역시 ‘구원’을 갈망한다. 그의 삶은 마치 그레고리안 찬트처럼 정형화되어 있고,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 그 자체이다. 명예, 금전, 권력은 물론이고 남녀간의 애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 같은 본능도 그의 인생에서의 신념을 흔들 수 없다. 헤르만 헤세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르치스라는 이름이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결국에는 한송이 수선화가 되어 버린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과 동일하다는 것은 보통 상징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눈을 내면으로 돌리고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하여 자신과의 투쟁을 통해 구원을 추구한 셈이다.

구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나르치스와 같이 속세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수양하고 치열한 내면의 투쟁을 통해 삶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것도 궁극의 구원에 이르는 한 방법이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란 영혼과 양심을 가진 존재라고 믿고 있는데, 영혼 깊숙한 곳에 갈무리되어 있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나르치스의 구원 추구 방식이 얼마나 고독하면서도 힘든 일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새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과 대학생 시절에 읽을 때에는 도저히 생각도 못한 감정이었다.
골드문트의 방식은 어떨까? 골드문트가 경험하는 치열한 내적 갈등은 스스로를 세상의 밑바닥에 던져넣는 행동을 통해 구원을 찾고자 한데서 비롯한다. 화려한 여성편력과 두 사람을 죽인 살인행각에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골드문트는 가장 비천한 밑바닥까지 뒹굴었고, 거기서 묻힐 수 있는 온갖 더러움과 흙먼지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용은 약간 다르지만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를 통해 탐구한 석가모니의 삶, 그리고 가장 낮은 곳부터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은 채로 결국 궁극의 구원을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골드문트의 인생역정 가운데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스도가 왕자의 삶으로, 또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으로 일관했다면 아마도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 평범한 인물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그네스와의 마지막 사랑을 꿈꾸던 골드문트는 사형수의 신분이 되었다가 나르치스를 극적으로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오랜 세월만에 조우한다. 그런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이 후반 부분은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떠올리게 한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마리아 브론 수도원에서의 우정의 시기를 지나면서 나르치스는 ‘깊이’로, 골드문트는 ‘넓이’로 각자의 방식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 나르치스는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궁극의 정화된 영혼을 얻고자 수양하였고, 골드문트는 가능한 넓게 퍼져 나감으로써 세상의 모든 삶의 모습을 체험하여 사랑의 기쁨은 물론이고 이별의 아픔과 절망을 경험하였다. 언뜻 상반된 것과 같은 인생을 걸어간 두 사람은 어느 순간 각자가 추구한 구원이, 그리고 상대방이 추구한 구원이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둘은 마주앉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였으며, 언제부터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순결한 영혼을 위한 내면의 투쟁과 발딛고 선 현실에서의 더나은 삶을 위한 투쟁,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대표하는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 이성과 사랑, 학문과 열정은 둘이 아니라 결국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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