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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만화책 - 캐릭터로 읽는 20세기 한국만화사, 한국만화 100년 특별기획
황민호 지음 / 가람기획 / 2009년 10월
평점 :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이리도 간절히 원했을까?
나는 아직도 유리 여닫이문을 가진 우리 동네 만화방을 기억한다.
사방 벽에 빼곡히 만화책이 꽂혀 있고, 가게 한 켠에는 구식 난로가, 그 옆으로는 가게 안에서 떡볶이와 오뎅을 팔았던 곳이었다.
그 유리문 너머에 앉아서 만화책을 보던 형들과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내 꿈은 만화방에서 실컷 만화책을 보는 것이었고, 실제로 꿈 속에서 나는 만화에 파묻혀 행복한 종말(?)을 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만화방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만화는 소위 ‘불량’, ‘저질’과 동의어였으며, 속된 말로 ‘얼라들 베려 버리는’ 원흉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수시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일으켜 세우거나, 때때로 긴 자를 가지고 손바닥을 때리셨다.
‘네 죄를 알렸다!’하는 선생님의 추궁에 고개를 푹 숙인 나와 친구들이 범한 죄는 둘 중 하나, 그러니까 오락실을 갔거나 만화방을 출입하다 걸린 거다.
그렇지만 우리 악동들은 저마다 푼돈이라도 생기면 다시 만화방으로 기어들어 선생님과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 그토록 고상하신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압수한 만화책을 낄낄거리며 보시던 현장을 발각한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만화는 내게 ‘추억’이라는 보석을 하나 가득 선물해 주었다.
좁고 지저분했던 만화방, 거기서 친구들과 함께 먹던 떡볶이, 부모님과 선생님 손에 붙잡혀 끌려 나오던 기억...
하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추억은 만화책 속에서 만난 주인공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모험을 펼쳤으며, 나쁜 놈들(그 당시는 주로 간첩, 무장공비 이런 사람들이나 우주 악당들)과 싸웠고, 세계 여러 나라와 우주를 돌아다녔다.
나는 스스로를 만화 속 주인공들과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바로 나였던 시절이었다.
황민호의 [내 인생의 만화책]에서 추억의 보석들을 종합선물세트로 만났다.
동아일보 사회면 좌상단을 차지하던 <고바우 영감>은 정치나 사회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던 시절에도 그저 만화라는 이유 때문에 꼬박꼬박 눈길을 보냈다.
<꺼벙이>는 아직도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영원한 애독서이며, 내가 가장 자신있게 따라 그렸던 만화 속 주인공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고인돌>을 만나기 위한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게 희대의 주간지였던 <선데이 서울>에 연재되던 만화였는지라 미성년자인 내가 볼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난 아버지가 이발소에 가실 때 무조건 따라갔다. 거기에 <선데이 서울>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거울로 비치던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주간지를 뒤적이던 그 스릴!!!!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엄청난 인기를 모은 <달려라 꼴찌>의 주인공 독고탁이 던지던 드라이브볼, 더스트볼, 하이볼... 외국인 챠리 킴!
‘강토’는 아직도 그 이름이 기억나는 캐릭터이며,
<번데기 야구단>은 그야말로 페이지가 닳도록 심취하던 만화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만화방에서 연속으로 다섯 번 본 적도 있다. 한 권 값만 내고 말이다.
<강가딘>과 윤승운 선생님의 만화들(요철발명왕, 맹꽁이 서당).. 어떻게 잊혀지겠는가?
나는 강가딘과 맹꽁이서당 훈장님 및 친구들을 틈날 때마다 교과서 한 귀퉁이에 그려넣었다. 물론 공부 안한다고 어머님께 한 소리 들어야 했지만...
둘리, 까치(오혜성), 구영탄... 한국 만화가 낳은 대표적인 캐릭터들이야 두 말하면 입만 아플 뿐.
만화잡지였던 [어깨동무]나 [보물섬]이 발간되는 날이면 우리들은 모두 몇몇 친구들에게 아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교문 앞 뽑기라도 사들고 향응을 제공해야 했다.
그래야 대여 순위에서 앞의 번호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내 인생의 만화책]을 읽는 시간은 마치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릴 적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아 즐거움에 가득찬 시간이었다.
하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가슴 한 구석에서 자꾸만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화책을 여전히 좋아하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주로 찾는 만화는 일본 만화가 되었다.
물론 재미있고 좋은 만화를 찾는 것이야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이고, 그 권리 행사에서 국적을 유일무이한 기준으로 둘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일본 만화의 국내 유입을 금지시켜야 한다거나, 만화를 통해서 극일克日해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은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 온 우리 만화가 더 발전하고, 더 좋은 작품을 쏟아내고, 그래서 부모님들과 어린이들, 학생들이 한 권이라도 더 찾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많은 만화가들이 여전히 우리 만화를 지키고 작품을 내주시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과거와 인식이 달라져서인지 이제 대학에 만화를 창작하는 전공도 생기고, 새로운 시도로 활력을 불어넣는 많은 젊은 작가들의 등장은 희망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만화가 생산(만화가)-소비(독자) 단계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컴퓨터를 이용해서 만화를 생산하기도 하고 향유하기도 하는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은 만화 발전을 위해서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화 진흥을 위해서 노력하시는 전문가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동안 일본 만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으로 지적되어 왔던 기획력과 다양한 소재 발굴과 같은 과제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개인적인 바람을 말해 보고 싶다.
이희재 선생님의 [간판스타]. 이 만화책은 내가 가장 아끼는 만화책이다.
만화가 분들이 좀 어려우시더라도 이런 리얼리즘 계열의 만화를 그려주셨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새벽길 청소부로 나선 분의 이야기에 눈물 흘렸던 기억을 가지고 있고,
천지인이 부른 <청소부 김씨 그를 만날 때>라는 노래에 이 만화를 오버랩 시키는데,
그건 아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과 그것을 어쩔 도리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내 처지 역시 그 만화와 노래에 오버랩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재미 측면에서는 부족할 것이고, 찾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만화 역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인 이상,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더 많이 보았으면 한다.
또 한 가지. 이건 [내 인생의 만화책] 저자분과 출판사에 드리는 바람이다.
우리 만화사를 캐릭터 측면에서 정리한다고 하면 꼭 2권, 3권을 내주시길 바란다.
분량상 한 권에 모든 만화 캐릭터를 담아내지 못했을 것 같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봐왔던 많은 캐릭터들이 없는 것이 아쉬웠고, 특히 최근의 만화 주인공들은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하나도 없다는 점도 다음 권을 기다리게 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캐릭터만 읊어봐도....
박기정의 훈이, 김형배의 로버트 태권V와 20세기 기사단, 배금택의 영심이, 허영만의 손오공, 이정문의 심술이, 신문수의 로봇 찌빠, 이희재의 악동이, 이진주의 하니, 김혜린의 아라, 황미나의 <레드문>에 등장하는 캐릭터 등은 반드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몇 가지 바람은 있지만, 어쨌든 우리 만화가 여러분들과 [내 인생의 만화책] 작가인 황민호 선생님, 출판사에도 무척 감사드린다.
추억 속의 보석상자를 열고 보석 하나하나를 다시 한 번 만나게 해 주었으니까.
가끔 시내에 나가 시간이 있을 때 만화방에 들른다.
머리도 커졌고 예전과 같은 아슬아슬함이나 금전적 부족함이 없어서인지 만화책 속으로 몰입되는 정도는 덜한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 권의 만화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앞으로도 나의 만화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