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분노의 포도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평점 :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조차 가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캘리포니아는 책이나 사진,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 등 간접 경험만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땅이다. 하지만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여러 가지 ‘간접 경험’들을 종합해 봤을 때 캘리포니아는 축복받은 땅인 듯 싶다. 기후는 온난하고 땅은 기름지며 자원도 많다. 여러 곳의 대학과 문화시설들로 인해 문화적 수준도 높고 사람들의 소득도 다른 주들에 비해 높다고 한다. 주렁주렁 달려 탐스럽게 익어가는 포도, 오렌지, 복숭아는 그 자체가 캘리포니아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안정의 상징이다. 캘리포니아는 430년 동안이나 노예 생활에 신음하다가 엑소더스(Exodus)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매불망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비교할 수 있으리라.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는 척박한 사막인 가나안 땅과 달리 캘리포니아의 ‘젖과 꿀’은 실재라는 점이다. 서부개척시대의 미국인들이 왜 캘리포니아를 목표로 했는지, 그리고 왜 지금 캘리포니아가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가 되었는지, 거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풍요로운 땅 캘리포니아는 존 스타인벡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외다. 그는 기름진 땅에서 함포고복(含哺鼓腹)하는 인물과 작품이 아닌, 광막한 광야와도 같은 [분노의 포도]를 썼다. [분노의 포도]의 전체적인 느낌은 황량하고 답답하다. 중간중간에 오아시스와 같이 지친 몸을 쉬게 해 주는 장면도 등장하지만, 이 작품은 아무리 침을 삼켜도 없앨 수 없는 갈증과 ‘텁텁함’을 실감하게 한다. 모래먼지가 흩날리면서 목과 코를 메마르게 하고, 운명처럼 땡볕이 내리쬐는 땅을 지나가야 하는 힘겨움과 고단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아니라 전갈과 독사로 가득찬 광야와 같은 작품이다. 잘 실감나지 않는다면 한여름밤 열대야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끈적거림과 후텁지근함, 답답함.... [분노의 포도]는 읽을수록 그런 느낌을 들게 한다.
술에 취해 엉겁결에 사람을 죽였던 톰 조드는 가석방되어 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운 고향 땅에서 그를 맞아 준 것은 황폐화된 농지와 폐가로 변한 고향집, 그리고 서부(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고 재산을 처분하는 가족들이었다.
그동안 내가 ‘대공황’이라는 사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두 가지 측면에서 짧았음을 깨달았다. 첫째는 공간적 측면인데, 대공황의 이미지를 금융, 주식, 실업, 물가와 같은 것에 국한시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대공황을 철저히 ‘도시적인 사건’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이 고통의 시기를 헤쳐 나가야 했던 농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문도 가져보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시간적 측면이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미국의 농촌 모습이 전적으로 ‘현재’의 이미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농지와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비료와 농약을 살포하는 모습,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와 과일들. 이렇게 풍요롭고 부요한 미국 농촌의 현실은 사실 ‘현재’ 미국 농촌의 모습이다. 풍요로움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닐 것인데, 혹시나 그 풍요로움의 이면에는 희생을 강요당하고 분노를 삼켜야만 했던 미국 농민들의 피와 땀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드 일가가 정들었던 고향 오클라호마를 떠나는 과정은 자본의 확장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소설 자본론’이라고 볼 수 있겠다. 거듭된 가뭄과 모래폭풍은 은행에서 농사 자금을 빌려 농사짓던 농민들을 빚더미에 올라앉게 했다. 담보로 맡긴 그들의 농지는 트랙터로 정리되었고,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로 전락한다. 경작지를 대규모로 확대하고 농기계를 통해 인건비를 줄이면서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은행과 채권자(대농장 회사)들의 자본 확장의 논리는 소규모 자작농과 소작농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집을 부수고 그들을 땅에서 쫓아낸 것이다.
이렇게 땅에서 쫓겨나 농민들은 뿌리채 뽑힌 식물과 같은 신세가 된다. 이제 그들은 가족들을 먹고 살기 위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멀고 먼 서부까지 이동할 차량을 구입하고 여행비용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과 꿈과 희망까지도 거대자본에 도매금으로 넘겨진다. 개인적으로 다음의 대목을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온갖 정을 주며 한 가족처럼 키우던 말 두 마리를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넘겨야만 하는 이 비인간성! 이 무자비함과 잔인함! 식인주체의 본질을 여과없이 드러낸 자본의 위력!
저쪽 말은 여덟 살이고 이쪽 말은 열 살인데, 같이 호흡을 맞추는 걸 보면 쌍둥이 같아. 이빨을 봐. 전부 다 건강하다고. 허파도 튼튼하고, 다리도 예쁘고 깨끗해. 얼마 줄 거야? 10달러? 두 마리에? 거기다 마차까지.... 아이고 세상에! 차라리 죽여서 개밥으로 쓰는 게 낫겠다. 아유, 그냥 가져가! 빨리. 말갈기를 땋아주고, 제 머리에 있던 리본을 풀어서 말에게 묶어 주고,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갸웃하고 그 부드러운 코에 제 뺨을 비벼 대던 내 딸의 마음까지 사가는 거야. 햇빛 속에서 땀 흘리며 일했던 세월까지 가져가는 거라고. 말로 할 수 없는 슬픔까지도. (제1권, p.182)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여정도 순탄하지 않다.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고향에서 뿌리 뽑혀야 했던 노인들은 여행을 견디지 못한다. 조드 일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는 길 위에서 죽음을 맞게 되고, 톰 조드의 형과 매제는 가족을 떠나 사라진다. 가족의 죽음과 해체라는 천신만고 끝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지만,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젖과 꿀이 흐르고는 있었지만, 그 젖과 꿀은 이미 자본의 것으로 독점되어 가난한 이주민들은 범접조차 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이 되어 있었다.
구름처럼 서부에 흘러 들어온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에도 서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그래서 임금은 더 떨어진다. 도저히 그 돈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과 영양실조, 질병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주민들은 서부로 몰려온 사람들을 ‘오키’라고 부르며 멸시하고 경계하였으며,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보안관들을 고용하고 총과 법으로 이주자들을 통제한다. ‘약속의 땅’은 순식간에 지배계급의 악랄한 노동력 착취와 빈곤의 악순환이 만연한 또 다른 ‘지옥의 땅’으로 변모한다.
포도원, 과수원, 크고 평평하며 초록색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계곡,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농가들. (중략) 멀리 보이는 도시들, 과수원 지대의 작은 마을들, 계곡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아침 햇살. (제1권, p.477)
멀리서 바라보는 캘리포니아의 풍광은 ‘약속의 땅’으로 불릴만 하다. 계곡과 집은 아름답고, 농토는 넓고 기름지다. 과수원에 주렁주렁 달린 노란 오렌지와 가지가 휘도록 달린 포도는 먹음직스럽다. 하지만 대농장 주인들과 자본가들이 누리는 그 아름다움, 그 풍요로움의 이면에는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가 익어가고 있었다.
분노의 포도가 열리는 첫 번째 원인은 작게나마 땅의 주인, 노동의 주체, 생산의 주체였던 농민들이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하여 철저한 소외를 맛보게 된 데에 있다. 그들은 쥐꼬리만한 급료를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도 언제든 경쟁사회에서 퇴출될 수 있는 사회의 최하층, 극빈층으로 전락한다. 분노의 포도의 두 번째 원인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소박한 꿈마저 앗아가는 자본의 무자비함과 냉담함에서 기인한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농민들의 소망은 단 한 가지이다. 바로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먹이는 것. 가끔 고기도 먹게 해주고 싶고 과일도 먹게 해주고 싶은 당연한 소망은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의 비쩍 마른 몸으로, 제때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아이를 사산해야만 하는 누이동생의 비극으로 배신당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소망은 옷 한 벌 제대로 해 입힐 수 없는 경제적 극빈과 캘리포니아 원주민 아이들의 차별대우 앞에 배신당한다. 기술을 배워 자신의 가게를 차리고 주말에는 여자친구와 같이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쉬기를 원했던 젊은이의 소원에 자본은 격심한 노동과 보잘 것 없는 보상, 총으로 무장한 보안관의 무력과 법이라는 무형의 제제를 가해 온다.
[분노의 포도]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조드 일가와 아이를 사산하고 기진맥진한 로저샨(톰 조드의 여동생)은 장대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오두막 안에서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가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어머니와 무언의 시선을 교환한 로저샨은 사람들을 모두 나가게 한 후 그 남자에게 젖을 물린다. 원래 이 젖을 먹어야 할 아이들은 죽어서 세상에 태어났지만, 이 젖은 한 생명을 살리는(최소한 그 순간의 굶주림은 면하게 하는) 소중한 도구가 된다. 나는 여기서 자본의 힘을 이길 유일한 힘은 역시 인간에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약속의 땅이라던 캘리포니아의 ‘젖과 꿀’은 인간을 배반하였지만, 서로 도우면서 자신의 것을 내놓는 인간의 ‘젖’은 공동체의 힘을 이루게 한다.
그런 점에서 톰 조드가 가족들을 떠나기에 앞서 어머니와 작별하면서 하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톰이 처음 감옥에 들어간 것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방을 삽으로 때려 죽였기 때문이었는데, 캘리포니아에 와서 가족들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는 파업에 참여하던 짐 케이시 목사가 대농장의 자경단원들에게 맞아 죽자 이성을 잃고 그 자경단원을 때려 죽이게 되는데, 이렇게 다혈질적이거 자기제어력이 부족한 그가 숨어 지내면서 깨달은 것이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떠나는 그를 어머니가 걱정하자 위로하면서 하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인지도 몰라요. (중략)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러 댈 때도 제가 있을 테고, 배고픈 아이들이 저녁식사를 앞에 두고 웃음을 터뜨릴 때도 제가 있을 거예요. 우리 식구들이 스스로 가꾼 음식을 먹고 스스로 지은 집에서 살 때도 저는 거기 있을 거예요. (제2권, p.402)
아마도 앞으로 톰 조드는 캘리포니아에서 억압과 차별을 견뎌야만 하는 이주자들과 함께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기나긴 투쟁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형식의 투쟁인지 작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든 배고프고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겠다는 그의 선언은 사회문제에 대한 ‘개인’ 차원에서의 항의가 아니라 ‘공동체’ 또는 ‘집단’으로서의 힘을 자각하고 그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감상 한가지만 하고 정리할까 한다.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후반 미국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놀라운지고!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 현대사의 모습이, 그리고 더 비극적인 건 바로 현재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 있다. [태백산맥]을 비롯한 조정래의 대하소설들에 잘 나타나고 있는바, 우리의 현대사의 최소한 첫부분, 그러니까 해방을 전후로 한 시점에서부터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기까지의 과정은 한 마디로 농촌의 해체와 농촌의 희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이후 소작농에게 돌아갈 땅은 과연 누구에게 흘러갔으며, 1960년대 산업화라는 미명 하에서 뿌리뽑힌 농민은 과연 어디로 흘러들어 갔던가.
나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그리고 대체로 참여정부의 입장을 지지해 왔다. 여러 가지 실망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연인 노무현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렇지만 한미 FTA의 추진과 이라크전 파병은 내게 이해도 되지 않고 인정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인간 노무현마저도 미워하게 만들었던 두 가지 결정이었다. ‘힘’은 곧 ‘정의’라는 논리로 죄없는 이라크 민중에게 총을 겨눈 미국에게 ‘국익’ 운운하면서 가담한 일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농촌의 구조조정’ 운운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가 되어 농업의 글로벌화, 기업화를 외친 대통령의 모습은 또 뭐란 말인가.
[분노의 포도]에서 자본과 대농장들이 마침내 이룩해 낸 현재 미국 농촌의 모습. 대규모로 기업화된 모습은 과연 우리 농촌의 role model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해체된 삶의 터전을 떠나 도시의 빈민으로 편입되어 산업화의 희생이 되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비극을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은 다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희생을 강요하고, ‘분노의 포도’를 맺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