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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신혼여행
고스기 겐지 외 지음, 정태원 옮김 / 문학의문학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중 한 명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비롯한 11개의 단편집이다.
최근 유행하는 일본 소설의 특징답게 술술 잘 읽혀져 가며, 일본의 여러 추리소설상에서 입상한 작가들의 이력에서 보이듯 미스테리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결과로 나타나는 반전도 아주 상큼한 책이다.
뭐랄까.... 생각지도 않은 작은 미술관에서 작고 아기자기한 소품 명작들을 접한 느낌이라고 할까...
휴가지에 가져가서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읽기에는 제격인 책이었다.


책의 제목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제목을 따서 [기묘한 신혼여행]으로 지었다.
이것은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11편의 소설 모두에 다양한 남녀관계 또는 부부관계가 등장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숨겨진 이면을 짚어낸다는 의미도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아홉 번째 작품인 <예절의 문제>는 이런 설정의 예외이다)

사실 이런 책에서는 어떤 거창한 의미를 짚어 내어 말하기는 무척 어렵다.
구태여 찾아낸다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연인 또는 부부들이 겪게 되는 오해.
그리고 그 오해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오해는 때론 가볍게 웃음지을 정도로 유쾌하게 표출되기도 하지만,
또 때론 주위 사람들조차 파멸로 이끌 정도로 무섭게 나타난다.
문학의 영원한 테마라 할 수 있는 남자와 여자의 상관관계.
그리고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
그 상관관계와 대화, 소통의 모습을 최근 유행하는 일본소설의 전형성 속에서 맛보는 것도 색다른 독서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11편의 간단한 줄거리와 함께 더운 밤을 다소나마 시원하게 보내는 것은 어떨까?

<마지막 꽃다발>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하며 나온다.
꽃미남인 ‘나’와 나의 첫사랑인 ‘에리카’의 짧은 행복과 비극적 결말의 이야기.
아름다운 아가씨인 ‘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배달되는 정체불명의 선물에 관한 이야가.
이 두 이야기은 과연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붉은 강>
‘인간적인’ 변호사를 표방하는 가자미 변호사.
그는 자기 부인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변호를 맡을 정도로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가자미 변호사가 변호한 강간살인범 ‘무가이’가 출소하게 되고, 변호사의 집에 얹혀 사는데..
무가이는 가자미 변호사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눈치채게 되고,
이는 멀고 먼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결되어 연쇄살인을 부른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반전!


<겹쳐서 두 개>
어느 호텔 방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놀라운 것은 여자의 시체는 머리에서 허리까지만 있을 뿐, 시체에 붙은 하반신은 남자의 것이었다.
즉, 두 사람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겹쳐진 시체인데...
그렇다면 여자의 하반신과 남자의 상반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혼식 손님>
아키히코는 5년 전 히로코라는 여성을 유혹하여 즐긴 후 바로 헤어져 버린다.
그러나 아키히코에 반한 히로코는 슬픔으로 자살해 버리는데...
5년 후 아키히코의 결혼식.
아키히코는 피로연장에서 히로코의 어머니로 보이는 노파를 발견하고 불안에 휩싸인다.

<기묘한 신혼여행>
하와이에서의 신혼여행 첫날 밤.
‘나’는 아내인 나오미를 죽이려 목을 조른다.
나오미가 전처의 딸이었던 히로코를 죽였다는 의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에 대한 벌>
금전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던 이토코는 친한 친구인 유카리를 찾아간다.
남편의 불륜에 대한 이혼위자료로 시아버지의 거액의 상속재산을 기대하던 유카리.
유카리는 지나가는 말로 이토코에게 “누가 그 노인 좀 안락사 안 시켜주나....”라고 말한다.


<기묘한 인연>
가벼운 접촉사고 후 ‘스미다’라는 예의바른 사람을 알게 된 변호사 ‘나’
어느 날 스미다의 고향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형 가구회사와 지역 주민들간의 분쟁 소식을 알게 되고,
‘나’는 마을 주민들 편에 서서 유리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그 뒤에 숨은 의도는?

 

<좋은 사람이지만>
영업사원인 ‘나’는 상사의 소개로 ‘마리에’라는 의사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나는 마리에와 수영장에서 만날 약속을 하지만,
마침 일이 생긴 마리에는 수영장에 오지 않았고, 그 동안 나는 귀걸이를 잃어버린 한 여성을 돕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귀걸이를 찾아준 여성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예절의 문제>
“문단속을 잘 합시다”라는 제목으로 한 신문에 실린 독자 투고.
그런데 그 독자투고에는 끔찍한 사건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더욱이 투고한 독자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아메리카 아이스>
마약과 강간, 폭력이 횡행하는 미국의 한 고등학교.
일본인 유학생 노보루는 일본 여학생을 강간한 세 명의 미국인을 혼내준다.
앙심을 품은 미국 학생들은 ‘나’와 함께 노보루를 없앨 계획을 세우는데...
노보루를 없애기로 정한 날. 노보루는 멀쩡히 돌아왔으나 미국 학생들은 행방불명이 된다.

 

<식인 상어>
일본 내해에서 식인 상어를 보았다는 제보가 한 언론사에 접수된다.
그리고 2주 후, 정말 상어에 의해 한 잠수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과연 식인상어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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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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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일상’이란 것 속에서 살아간다.
일상이란 규칙적, 익숙함, 안정감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반면 지루함, 권태감, 반복성 등과 같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속에 살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잠시나마 그 일상을 벗어나기를 꿈꾸며, 또한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일상을 벗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일탈’이란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일상 속에 살다가 이 일상이 잠시나마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계획한 여행과 같이 의도된 것이기도 하고, 우리의 의도 밖에 있는 우연에 의해서 경험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연에 근거한 일탈은 워낙 순간적이어서 그것이 닥쳐올 때의 느낌을 포착하기가 어렵고,
어느 정도 일탈이 진행되고 난 이후에야 우리는 ‘아! 내가 뭔가 다르게 살고 있구나’, ‘뭔가 다른 것을 경험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상이 예측 가능한 것이라면 일탈은 예측하기 어려운 우연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우연성 때문에 일상이 깨어질 때에는 익숙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뭔가 박진감 넘치는 스릴을 느끼면서 자극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유디트 헤르만은 이와 같은 일상의 틈새를 파고드는 ‘일탈’을 잘 간취하는 작가인 것 같다.
[단지 유령일뿐]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은 일상과 일탈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인물들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7편의 단편은 모두 ‘여행’이라는, 우리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방법으로서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유디트 헤르만은 ‘의도된’ 일탈 과정 중에 순간순간 나타나는 ‘의도되지 않은’ 일탈을 배치하여
이런 우연성에 기반한 일탈이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 친구의 애인을 만나러 떠나고(루스),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며(차갑고도 푸른, 단지 유령일 뿐,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긴 여행을 떠난다(뚜쟁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
그리고 유디트 헤르만은 이런 일탈의 이야기를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그야말로 툭툭 던지며,
메마르고 차갑게, 마치 담배 연기 속에 금방 사라져 가는 듯이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내가 보기에 유디트 헤르만은 7편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일탈이 주인공들에게 단지 그 시점에서는 ‘순간’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일탈이 이후의 주인공의 살아가는 인생가운데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순간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관심이 간 본 작품은 <차갑고도 푸른>, <단지 유령일뿐>, <어디로 가는 길인가>였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인생이란 시간은 선(line)을 따라 단순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가 분리될 수 없고, 서로 뒤바뀔 수 있는 입체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치 이리저리 돌려서 동일한 색상을 만드는 큐브 퍼즐처럼,
일상과 일탈, 또는 예측가능성과 우연성은 서로 맞물려서 현재의 ‘나’란 존재를 형성한다.
일상이 계속되어 쌓일 때, 어느 순간 일탈은 ‘우연’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 내 삶을 흔든다.
그 일탈이 진정되고, 일탈의 변혁성이 사그러질 때,
일탈의 에너지는 다시 일상 속으로 녹아들고, 그 때의 일상은 일탈 이전의 일상에 비해 한 단계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도저히 풀 수 없는 큐브도 결국에는 정확한 순서와 인과관계에 의하여 같은 색상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듯이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차갑고도 푸른>에서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는 ‘현재형’ 시제를 들 수 있다.
현재의 동거인인 마그누스와 딸 수나와 살고 있는 일상을 당연히 현재형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1년전 독일에서 온 요나스 및 이레네와 보낸 5일간의 과거 회상 내용 역시 모두 ‘현재형’으로 처리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일도 ‘요나스는 말했다’가 아니라 ‘요나스는 말한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편은 과거가 현재는 뒤섞여 있으면서 과거의 ‘일탈’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같은 맥락으로 <단지 유령일 뿐>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으리라 생각된다.
사막과 같은 사이였던 펠릭스와 엘렌은 우연히 묵은 모텔에서 만난 ‘버디’를 비롯한 사람들로부터 둘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버디’가 자기 아이에게 줄 작은 운동화를 통해 느끼는 행복감과 신비로움은,
마지막 문단에서 펠릭스와 엘렌이 실제 둘 사이의 아이에게 사주는 운동화로 현실화된다.
과거의 일탈, 과거의 충격은 현재의 실제와 현재의 행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준비한 작은 운동화와 함께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해 줄께’라는 작은 위트는 과거가 현재속으로, 현재가 과거 속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1년 전의 내 모습... 또는 2년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본다.
중간중간 ‘우연히’ 만난 사람, ‘우연히’ 경험한 사건, ‘우연히’ 가게 된 장소...
어쩌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우연한’ 사람, 사건, 장소,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수록된 7편의 간단한 줄거리 정리

1. <루스>
‘나’는 연극 공연을 위해 떨어져 지내던 오랜 친구인 루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루스의 애인인 라울을 만난다.
루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라울은 ‘나’에게 “너 같은 사람은 내 인생에서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고,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라울로부터 자신이 있는 뷔르츠부르크 행 왕복 기차표와 한 줄의 편지를 받는다. “네가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뷔르츠부르크 행 기차에 오른다.

2. <차갑고도 푸른>
‘세상의 끝’이라는 아이슬란드에서 동거하고 있는 마그누스와 요니나.
마그누스의 베를린 유학시절 알고 지내던 이레네와 요나스가 그들을 방문한다.
단조로우면서도 무미건조하던 아이슬란드에서의 일상을 보내던 요니나는 활기차면서도 솔직한 요나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눈밭에 빠진 차 아래 들어가 바퀴의 눈을 파내면서 요나스와 서로 ‘머리를 맞대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평소에 느끼지 못한 희열을 느낀다.

3. <아쿠아 알타>
부모님은 물의 도시 베니스로 여행을 떠나셨다.
코르시카를 여행하던 ‘나’는 베니스로 부모님을 찾아가 1박 2일을 함께 지내면서(그런데도 잠은 부모님과 다른 호텔에서 잔다.)
부모를 만나러 온 큰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여전히 걱정하는 부모님.
‘아쿠아 알타’ 즉, 가을과 겨울에 물이 범람하여 베니스에 넘치는 것과 같이
서로에 대한 감정은 차오른다... 그리고 그 감정을 나타내기 전에 딸과 부모는 작별을 고한다.

 

4. <뚜쟁이>
연인이었다가 친구가 된 ‘나’와 요하네스는 ‘카를로비 바리’라는 온천휴양도시에서 만난다.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무미건조한 둘 사이의 관계 속에 함께 하기로 한 시간은 지나간다.
돌아가기로 예정된 전날 밤. ‘나’와 요하네스는 ‘벨레 에타지’라는 나이트클럽에 간다.
술과 피곤에 취하여 숙소로 돌아온 ‘나’는 요하네스의 품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다음 날 짙은 안개를 뚫고 집으로 향한다.

5. <단지 유령일 뿐>
미국 횡단여행 중이던 펠릭스와 엘렌은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루를 쉬기 위하여 모텔에 투숙한다.
거기서 그들은 모텔을 운영하는 애니와 유령을 쫓는 여자, ‘버디’라는 한 남자를 만난다.
서로간의 대화가 줄어들고 멀어져만 가던 느낌을 받던 펠릭스와 엘렌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된다.

6. <어디로 가는 길인가>
야콥과 사귀는 중인 ‘나’는 1년 전 연말을 보내기 위해 페터, 미하, 사라와 함께 프라하의 미로슬라브를 방문한다.
해가 바뀌는 3일동안 ‘나’는 프라하에서 이들 네 명과 함께 생활한다.
아무 특별한 일도 없던 단조로운 생활 가운데 ‘나’는 소통의 단절을 느낀다.

 

7.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음악 페스티벌에 초대받고 노르웨이 트롬쇠로 간 오언과 ‘나’.
그러나 페스티벌은 취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구나르란 사람이 운영하는 여관에 묵게 되는데, 여기서 같은 독일인인 마틴과 카롤리네를 만난다.
이들은 함께 지역의 파티에 참여했다가 아리 오스카르손이란 사람과 그의 아내 시카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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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탄생 (반양장) - 대학 2.0 시대, 내 젊음 업그레이드 프로젝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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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어령 선생님이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회식을 기획하셨다는 것을 기획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전세계의 온갖 탈과 가면이 등장한 ‘혼돈’ 이후에...
넓고 넓은 잠실주경기장 한쪽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
소년이 굴리는 굴렁쇠 하나에 전세계가 집중하였고,
‘혼돈’을 정화하는 ‘고요’와 ‘적막’에 대해 그 분위기 하나로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파격과 아이디어를 즐기신 분이 저자인 책이라면,
우선 읽어보아야 할 책 리스트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어령 선생님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 사람이면 꼭 읽어봐야 할 필독서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음의 탄생]... 부엉이가 그려진 표지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부엉이는 잘 알려진대로 지혜의 여신 아테나(미네르바)의 상징인 동물.
헤겔은 그의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어령 선생님이 시대에 뒤처지는 이성이 아닌, 시대를 선도하고 새로운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발견해 내는 이성을 기대하고 쓰신 것이라는 인상을 먼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젊은이’들에게 두고 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젊음의 탄생]에는 카니자 삼각형, 물음느낌표, 개미의 동선, 오리-토끼, 매시 업, 연필의 단면도, 빈칸 메우기, 지(知)의 피라미드, 둥글 별 뿔난 별 등 아홉 가지 매직 카드가 제시되어 있고,
각 카드에 지적 호기심, 지행일치, 목표에 대한 일관된 열정, 진리의 상대성, Cross Over, 절제와 균형, 독창성, 순수하지만 위대한 아마추어적 열정, 세계와 지역의 융화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젊은이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20여년의 나이만 먹으면, 청년기에 진입합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신체적인 나이일 뿐,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청년의 마음을 가지고 살지만,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젊은 나이가 맞나 의심이 갈 정도로 의미없는 일상의 반복과 세파에 찌들어 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젊음이란 그냥 가만히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주위의 이야기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그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의 원융 속에서 발전의 의미를 찾을 때에 비로소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탄생은 산고가 뒤따릅니다. 젊음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젊음의 탄생] 가운데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의 부활과 현상의 상대성을 이야기한 부분을 특히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해내지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지성과 이성의 순수성은 그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에 더욱 빛나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진정한 아마추어의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자본화되어 어떤 것에도 금전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뼈를 깎는 노력으로 만들어낸 노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보호하고 보상이 있어야 하겠으나,
지금처럼 짜깁기를 합법화시키는 레포트를 돈주고 웹상에서 구매하는 행태의 만연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진정한 창조는 독창성에서 나오며, 그 독창성은 관심있는 분야를 즐길 줄 아는 것에서 나온다는 이어령 선생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최소한 대학에서만은 그 ‘즐기는 일’이 상품화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이 책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이어령 선생님은 너무나 좋은 얘기만 써놓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젊음의 탄생]을 읽다보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정말 장밋빛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웹 2.0 시대를 이야기할 때, 분명 이러한 정보인프라에 접근하고 싶어도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즐기는’ 아마추어리즘.... 좋은 이야기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이 현실입니다.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발 한발 나가는 젊은이가 있는 반면, 세상의 고단함과 피곤함을 어쩔 수없이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젊은이도 많습니다.
취직 걱정에, 취직해서도 비정규직이라는 불안감에, 언제 구조조정될지 모르는 불안정성에 대고 ‘꿈을 가져라! 노력해라!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하는 얘기는 뜬구름 잡는식의 이야기입니다.
경제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양극화와 차별이 분명 존재하는 현실에 눈감는다면, 창조하는 ‘지식인’은 될 수 있으되, ‘지성인’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보면서 가장 감동을 주었던 것은 쉴새없이 더듬이를 다듬고 있는 개미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먹이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고,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개미는 그 날, 그 순간을 위하여 자신의 더듬이를 닦으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이란, 그리고 그 개인이 모인 사회의 모습이란 언제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좋은 점, 나쁜 점, 발전할 점, 조심해야 할 점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자신만의 더듬이를 다듬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젊음의 탄생’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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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의 동굴
호세 카를로스 소모사 지음, 김상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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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한 듯한 책이었습니다.
아니, 이 책의 내용 자체가 마치 보물찾기와 같은 내용입니다.

이름은 나와 있지 않은 ‘나’는 몬탈로라는 사람이 남긴 <이데아의 동굴>이라는 텍스트를 번역하게 됩니다. 그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죠.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를 운영하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배경으로서,
어느날 트라마코스라는 잘생긴 청년이 숲속에서 몸통이 파헤쳐진 시체로 발견됩니다.
사람들과 검시한 의사는 늑대들이 이 청년을 죽이고 갈기갈기 찢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지만, 시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해독자’ 헤라클레스와
청년의 스승으로서 전날 청년의 눈에서 본 공포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디아고라스는
함께 이 청년의 사망원인에 의심을 품고 수사에 착수합니다.

[이데아의 동굴] 중요한 형식과 내용은 이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형식적으로 이 책은 액자소설입니다. 즉,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가 아는 액자소설과 달리, 이 책의 또 하나의 이야기는 ‘각주’의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즉, 텍스트 <이데아의 동굴>을 번역하는 번역자에 얽힌 이야기가 각주에서 진행되고,
트라마코스의 사인을 조사하는 헤라클레스와 디아고라스의 이야기는 책 내용에서 진행됩니다.

 

아... 그런데, 놀라운지고!!!!!
처음엔 소설의 내용은 내용대로, 번역자의 각주는 각주대로 멀리 떨어져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점점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로 섞이게 됩니다.
그 과정이 아주 흥미진진하고 또한 아주 치밀합니다.

한 가지 예로 들자면....
위에서 트라마코스가 숲속에서 늑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 죽었다고 했죠?
<이데아의 동굴>을 처음 소개한 ‘몬탈로’ 역시 숲속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늑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위의 이야기가 형식적 이중구조라면,
헤라클레스-디아고라스 콤비가 가지는 사상의 차이와 ‘낮의 차가운 이성/절제’ 대 ‘밤의 뜨거운 본능/욕망’의 대조가 가져오는 것은 내용적, 주제적 이중성입니다.

디아고라스는 플라톤이 운영하던 아카데메이아의 교사입니다.
따라서 디아고라스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결국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여러 사물들의 본질, 즉, ‘이데아’적인 것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디아고라스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절제와 이성의 미덕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헤라클레스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추론하며, 눈에 보이는 것에서만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의 팀워크는 삐걱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을 다른 한 사람이 보충해 주면서 진실에 점점 다가갑니다.

‘낮의 차가운 이성/절제’와 ‘밤의 뜨거운 본능/욕망’의 대조는....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법한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절제와 이성이라는 ‘플라톤’적 미덕과 더불어
욕망에 충실하고 야성적인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는 ‘디오니소스’적 광폭함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데아의 동굴]은 이와 같은 형식적 이중성과 내용의 이중성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어
한 폭의 잘 짜여진 옷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철학이나 국민윤리 시간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동굴’을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동굴에 갇힌 죄수들은 벽에 미친 그림자로만 동굴밖의 사물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별도로 있으되, 그 허상만을 따를 뿐이죠.
어쩌면 이런 이원론적 사고는 ‘소설’의 특성과도 묘하게도 어울립니다.
현실을 반영하는 허구, 그러나 그 허구 속에 들어있는 진실의 모습들....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잘 짜여진 허구라는 점을 깨달을 때 우리는 동굴에서 나와 참된 이데아를 발견합니다.
자..... 과연 헤라클레스와 디아고라스는 여러 가지 허구 또는 진실로 둘러싸인 진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또한 텍스트 <이데아의 동굴>을 번역하다가 납치까지 당하는 번역자는 <이데아의 동굴>에 숨겨진 결정적인 열쇠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는데, 바로 ‘에이데시스(eidesis)’라는 겁니다.
에이데시스란 일련의 단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텍스트 상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기법을 말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이데아의 동굴] 제1장에는 이런 용어들이 자꾸 반복됩니다.
‘(긴) 머리카락’, ‘소리치고’, ‘울부짖는’, ‘목구멍’..... 바로 사자를 말하는 것이죠.
자.. 그럼 흥미를 위해 제2장의 에이데시스도 보기로 하죠.
‘차가운 축축함’, ‘끈적끈적함’, ‘구부러진’, ‘기어가는’, ‘머리가 갈라진(여러개의 머리)’.....
무엇을 의미할까요? 뱀입니다.
제1장의 에이데시스와 제2장의 에이데시스를 연결하면,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겪은 12가지 임무가 떠오르는 분이 있을 겁니다.
네. 제1장의 사자란, 바로 헤라클레스의 첫 번째 임무인 ‘네메아의 사자잡기’이며,
제2장의 뱀이란 당연히 두 번째 임무인 ‘히드라 퇴치’ 되겠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에이데시스가 가득합니다.
각 장이 헤라클레스의 12가지 임무 중 하나씩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에이데시스가 바로 이데아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되, 속으로는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 말이죠.

[이데아의 동굴]을 통해서 숨은 보물찾기와 같은 즐거움도 느끼시고,
고대 그리스 사상의 모습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p.s.
한 가지 이랬다면 더 재미있었을텐데... 하는 점이 있습니다.
어차피 플라톤도 나오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주장을 극복하고 일원론을 폈습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데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느끼고 보고 숨쉬는 이 현실이 진실이라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탐정 역할을 하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습니다만...
하여튼 한 작품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동시에 등장하여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보았으면 하는 기대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두 사람이 동시에 나오는 책이 있네요. 바로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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