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의 동굴
호세 카를로스 소모사 지음, 김상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한 듯한 책이었습니다.
아니, 이 책의 내용 자체가 마치 보물찾기와 같은 내용입니다.

이름은 나와 있지 않은 ‘나’는 몬탈로라는 사람이 남긴 <이데아의 동굴>이라는 텍스트를 번역하게 됩니다. 그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죠.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를 운영하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배경으로서,
어느날 트라마코스라는 잘생긴 청년이 숲속에서 몸통이 파헤쳐진 시체로 발견됩니다.
사람들과 검시한 의사는 늑대들이 이 청년을 죽이고 갈기갈기 찢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지만, 시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해독자’ 헤라클레스와
청년의 스승으로서 전날 청년의 눈에서 본 공포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디아고라스는
함께 이 청년의 사망원인에 의심을 품고 수사에 착수합니다.

[이데아의 동굴] 중요한 형식과 내용은 이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형식적으로 이 책은 액자소설입니다. 즉,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가 아는 액자소설과 달리, 이 책의 또 하나의 이야기는 ‘각주’의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즉, 텍스트 <이데아의 동굴>을 번역하는 번역자에 얽힌 이야기가 각주에서 진행되고,
트라마코스의 사인을 조사하는 헤라클레스와 디아고라스의 이야기는 책 내용에서 진행됩니다.

 

아... 그런데, 놀라운지고!!!!!
처음엔 소설의 내용은 내용대로, 번역자의 각주는 각주대로 멀리 떨어져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점점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로 섞이게 됩니다.
그 과정이 아주 흥미진진하고 또한 아주 치밀합니다.

한 가지 예로 들자면....
위에서 트라마코스가 숲속에서 늑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 죽었다고 했죠?
<이데아의 동굴>을 처음 소개한 ‘몬탈로’ 역시 숲속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늑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위의 이야기가 형식적 이중구조라면,
헤라클레스-디아고라스 콤비가 가지는 사상의 차이와 ‘낮의 차가운 이성/절제’ 대 ‘밤의 뜨거운 본능/욕망’의 대조가 가져오는 것은 내용적, 주제적 이중성입니다.

디아고라스는 플라톤이 운영하던 아카데메이아의 교사입니다.
따라서 디아고라스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결국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여러 사물들의 본질, 즉, ‘이데아’적인 것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디아고라스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절제와 이성의 미덕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헤라클레스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추론하며, 눈에 보이는 것에서만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의 팀워크는 삐걱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을 다른 한 사람이 보충해 주면서 진실에 점점 다가갑니다.

‘낮의 차가운 이성/절제’와 ‘밤의 뜨거운 본능/욕망’의 대조는....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법한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절제와 이성이라는 ‘플라톤’적 미덕과 더불어
욕망에 충실하고 야성적인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는 ‘디오니소스’적 광폭함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데아의 동굴]은 이와 같은 형식적 이중성과 내용의 이중성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어
한 폭의 잘 짜여진 옷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철학이나 국민윤리 시간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동굴’을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동굴에 갇힌 죄수들은 벽에 미친 그림자로만 동굴밖의 사물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별도로 있으되, 그 허상만을 따를 뿐이죠.
어쩌면 이런 이원론적 사고는 ‘소설’의 특성과도 묘하게도 어울립니다.
현실을 반영하는 허구, 그러나 그 허구 속에 들어있는 진실의 모습들....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잘 짜여진 허구라는 점을 깨달을 때 우리는 동굴에서 나와 참된 이데아를 발견합니다.
자..... 과연 헤라클레스와 디아고라스는 여러 가지 허구 또는 진실로 둘러싸인 진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또한 텍스트 <이데아의 동굴>을 번역하다가 납치까지 당하는 번역자는 <이데아의 동굴>에 숨겨진 결정적인 열쇠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는데, 바로 ‘에이데시스(eidesis)’라는 겁니다.
에이데시스란 일련의 단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텍스트 상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기법을 말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이데아의 동굴] 제1장에는 이런 용어들이 자꾸 반복됩니다.
‘(긴) 머리카락’, ‘소리치고’, ‘울부짖는’, ‘목구멍’..... 바로 사자를 말하는 것이죠.
자.. 그럼 흥미를 위해 제2장의 에이데시스도 보기로 하죠.
‘차가운 축축함’, ‘끈적끈적함’, ‘구부러진’, ‘기어가는’, ‘머리가 갈라진(여러개의 머리)’.....
무엇을 의미할까요? 뱀입니다.
제1장의 에이데시스와 제2장의 에이데시스를 연결하면,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겪은 12가지 임무가 떠오르는 분이 있을 겁니다.
네. 제1장의 사자란, 바로 헤라클레스의 첫 번째 임무인 ‘네메아의 사자잡기’이며,
제2장의 뱀이란 당연히 두 번째 임무인 ‘히드라 퇴치’ 되겠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에이데시스가 가득합니다.
각 장이 헤라클레스의 12가지 임무 중 하나씩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에이데시스가 바로 이데아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되, 속으로는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 말이죠.

[이데아의 동굴]을 통해서 숨은 보물찾기와 같은 즐거움도 느끼시고,
고대 그리스 사상의 모습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p.s.
한 가지 이랬다면 더 재미있었을텐데... 하는 점이 있습니다.
어차피 플라톤도 나오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주장을 극복하고 일원론을 폈습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데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느끼고 보고 숨쉬는 이 현실이 진실이라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탐정 역할을 하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습니다만...
하여튼 한 작품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동시에 등장하여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보았으면 하는 기대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두 사람이 동시에 나오는 책이 있네요. 바로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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