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박스 세트 - 전2권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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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던 소설이었습니다.
이제 ‘신윤복은 사실 여성이 아닐까?’라는 의문은 마치 ‘정조는 독살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처럼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의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공중파 TV를 통해 방송된 드라마의 힘도 한 몫 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원래 미스터리가 있는 책은 결과와 반전을 알게 되면 읽는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지만,
이 소설은 충격적인 반전(이제는 반전이라 말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상식’처럼 알고 있으니..)을 읽기 전에 미리 알고 있음에도 흥미롭습니다.
이 흥미로움의 힘은 역시 우리 옛 그림이 직접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자신을 창조해 낸 화가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으로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름을 접한 것이 언제였을까 생각해 보면, 교과서가 떠오릅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라는 이름과 흐릿한 컬러 도판의 그림이었죠.
[바람의 화원]은 이렇게 막연하게 ‘조선 후기 풍속화가’라고 뭉뚱그려 암기해야 했던 두 화가를 허구의 소설 형식이지만 생생하게 되살려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워낙 작은 도판으로 실려서 배경과 인물을 구별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대체 뭘 그린 것인지도 모르던 교과서 그림의 틀을 뛰어 넘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읽는 방법, 그리고 그 그림에 얽혀 있을 화가의 뒷이야기를 자유롭게 상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허구를 본질로 하는 소설에 깐깐하게 ‘역사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바람의 화원]이 불러 일으킨 열풍은 그야말로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작년에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혜원 신윤복의 작품 전시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습니다. 매년 간송미술관을 가보는데, 그렇게 길게 줄을 늘어선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의 화원]이 결과를 알고 봐도 재미있는 소설이 된 것에는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이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작가가 초점을 맞춘 혜원 신윤복의 매력, 즉, 형식적 틀을 벗어나는 ‘파격’의 매력이 아닌가 합니다.
영조와 정조 시대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로서 새로운 문화의 분위기가 넘쳐 흐르던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쟁을 겪으면서 성리학적 세계관은 과도한 관념성과 배타성으로 인해 그 허구성을 역력하게 드러낸 반면,
중인 이하 계층의 의식 성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기 시작하던 생산력과 맞물려 전혀 새로운 시대로의 발전의 맹아를 보였습니다.

[바람의 화원]의 김조년으로 대표되는 중인 출신 거상들,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에 등장하는 새로운 기술과 생산량 증대는 모두 이 시기의 사회적 사실들입니다.
또한 실학파實學派로 대표되는 사상적 흐름은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혁신과 새로운 풍조는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예술, 미술에 부여된 소명이었을 겁니다.
이 시대 문화적 생산과 소비는 향유 주체에서부터 형태와 기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전에 없이 다양했고, 이는 종래의 상투적 화법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내용은 그것을 담아낼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거리에서, 일터에서, 우물가에서 건강함을 표출하던 민중을 과감히 소재로 끌어온 단원과,
전통적 화풍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소재를 파격적인 빛깔로 형상화한 혜원은
모두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조금도 모자람 없이 감당한 것입니다.

[바람의 화원]의 독자들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천재의 혁신적이면서도 파격적인 그림 대결을 보면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파격과 혁신이 주는 신선함,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끊임없이 그와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파격의 주인공 혜원 신윤복이 누구였는지 역사상 전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윤복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3원 3재’ 중에 넣어서 말하지만,
사실 국가기관인 도화서 화원이었던 단원을 제외한 혜원의 삶에 대한 기록은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혜원에 대해서는 사료상의 기록은 물론이고, 동시대 인물의 증언조차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그림과 이름만 남은 천재화가.
[바람의 화원]은 그 천재화가의 일생을 ‘신윤복은 남장여자였다’라는 충격적인 추정을 곁들여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물론 [바람의 화원]은 어디까지나 허구인 픽션으로서,
‘신윤복은 여성’이라는 것은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지만,
한 시대 예술의 새로운 나아갈 길을 제시한 위대한 선조의 모습과 그 작품 속에 행복한 독서가 되었던 책이었습니다.

뱀꼬리 1
책 속에 하나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정조가 단원과 혜원으로 하여금 어진을 그리게 할 때, 자신을 ‘짐’이라고 호칭합니다.
제가 알기로 ‘짐’은 황제의 호칭이며, 황제 아래 군왕을 칭했던 조선의 임금은 ‘짐’이란 호칭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극이나 실록에는 모두 ‘과인’으로 표기되는 데 작가가 ‘짐’이라고 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뱀꼬리 2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옛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단원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의 그림 [기노세련계도]을 꼭 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몇 년 전 한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받았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었는데, 이미지를 찾아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정말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그림의 소재는 개경(개성) 송악산 아래에서 잔치하는 장면인데,
1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그려놨는지, 넋을 놓고 그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꼭 한 번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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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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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므 파탈(Homme Fatale)도 반복하면서 진화하는 것일까요?
모파상의 [벨아미]의 주인공 조르주 뒤루아에게는 쇼데를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발몽 자작과 스탕달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의 그림자가 겹쳐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태양의 고도가 낮아질수록 그림자는 길어지는 법.
조르주 뒤루아에게서 나온 그림자 길이는 앞의 두 사람에 더하여 한층 늘어나 보입니다.

발몽 자작은 메르테유 후작부인과 결탁하여 순수한 사랑을 농락하는 인물입니다. 이 시기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직전이었죠.
줄리앙 소렐은 출세를 위해 여러 여성을 이용하고 버립니다. 이 시기는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이 몰락한 직후 왕정복고의 반동시대입니다.
조르주 뒤루아 역시 출세를 위하여 사랑까지도 수단화하는, 그러면서도 심판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합니다. 이 시기는 19세기 후반, 세계대전의 씨앗을 배태한 제국주의가 극성기를 향해 치닫던 시대입니다.

발몽 자작에서 조르주 뒤루아까지, 약 100년의 시대는 프랑스 역사에서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시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진보와 변화의 물결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앙시앙 레짐의 구습은 청산되지 못한 채로 심심찮게 반동의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한 시대의 도덕과 철학이 부침을 거듭하는 시기일 뿐 아니라,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그의 3부작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로 넘어가는 순수자본주의의 난숙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쇼데를로 라클로, 스탕달, 모파상 등 프랑스의 대문호들은 나란히 옴므 파탈을 등장시켜 ‘사랑’, ‘우정’, ‘정절’, ‘순수’와 같은 소위 인류가 추구해 온 최고의 가치들을 비웃고 완벽하게 허상화시켜 버립니다.
이것은 과거의 가치와는 전혀 새로운 가치를 반영한 인간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3명의 옴므 파탈들이 점점 더 ‘자본주의적’인 탐욕을 반영하는 인간으로 진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발몽 자작은 육체적 쾌락을 즐기면서 사랑과 정절이 가지는 허점을 비웃었지만, 기본적으로 순수한 사랑에 약한, 어떻게 보면 낭만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줄리앙 소렐에게서는 (마지막에 순수한 사랑을 깨닫는 듯한 장면이 나오지만) 상류층 여성들을 통한 출세와 신분상승이라는, 다분히 목적의식적인 인생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모파상이 시대정신의 담지자로 그려낸 벨아미, 즉, 조르주 뒤루아는 두 사람과 다릅니다.
그에게는 발몽 자작과 줄리앙 소렐이 추구한 쾌락과 출세라는 가치는 물론이고, 거기에 물질적 부와 세속적 정치권력이라는 새로운 욕구가 추가됩니다.
모파상은 냉정하게 제국주의 시대 속에 나타난 제국주의적 가치를 반영한 인간성의 변화를 그려낸 것입니다.
[벨아미]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알제리 전선에서 전역한 조르주 뒤루아는 빈한한 생활을 보내다가 친구 포레스티에의 호의로 신문사에 입사합니다.
그는 기자로 활동하면서 신분상승과 명예, 재산과 권력, 육체적 쾌락을 얻기 위하여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매너로 주위의 여성들(주로 유부녀들)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하는 바가 이루어졌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사귀던 여자를 버리고 새로운 욕구 충족에 가능한 여자를 찾아나섭니다.

그런데 모파상은 결코 조르주 뒤루아의 악행과 탐욕, 여성편력을 꾸짖거나 경멸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타락한 주인공에게 하늘이 내리는 천벌과 같은 ‘권선징악’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안이한 결론으로 이끌어 나가지도 않습니다.
사랑이니, 정절이니, 순결이니 하는 전통적인 미덕의 상실에 안타까워 하지도 않습니다.
모파상은 <미덕과 악덕>, <정절과 불륜>, <선행과 악행>, <좋은 일과 나쁜 일>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로 양자를 동일한 거리에 두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이유는 첫째 그가 그려낸 조르주 뒤루아는 당시 시대에는 보편성을 획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 시대의 미덕과 선행이란 것이 그다지 순수한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악덕과 악행이란 것에도 개인과 사회의 진실된 본질이 들어있다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시대가 만들어 놓은 ‘벨아미’, 아니, 그 시대 자체인 ‘벨아미’에게 도덕적 판단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러한 인물, 그러한 시대가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전혀 새로운 것으로 다시 진화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지요.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앙시앙 레짐이, 그리고 대혁명 자체가,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조르주 뒤루아의 마지막을 상상해 보는 것도 책을 보는 재미가 될 것 같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의 끝은 어디일까요?
책에서는 어쨌거나 조르주 뒤루아는 일차적인 꿈을 이룬 것으로 책이 종결됩니다.
재산과 권력을 가진 왈테르 사장의 사위가 된 것이죠.
여전히 연인인 마렐 부인과의 밀회에서 얻을 육체적 쾌락도 함께 그리면서 말이죠.

그런데 모파상 이후 프랑스 문학에서 이런 옴므 파탈을 그려낸 작가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조르주 뒤루아까지 진화해 온 옴므 파탈이 더 이상 진화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죠.
물론 이러한 인물을 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자연주의’라고 하는 문예사조의 퇴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조르주 뒤루아란 인물로 대치될 수 있던 프랑스 제국주의의 몰락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탐욕의 결정체라 할 20세기 초반 제국주의의 극성은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계대전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그 전쟁에서 독일군에 의해서 참혹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물론 전쟁은 프랑스가 속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짓밟힌 그들의 자존심과 명예는 아마 영원히 복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후는 곧 조르주 뒤루아가 맞을 종말의 모습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레마르크가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치열하게 묘사했던 전선의 모습,
지옥도에서 뒹굴며 살아야겠다는 기본적인 욕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모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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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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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알라딘’이란 인터넷서점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혹시나 내가 찾는 중고책이 나와 있지 않을까 해서이고,
또 하나는 ‘로쟈의 저공비행(http://blog.aladin.co.kr/mramor)’이란 블로그를 둘러보기 위함이다.

인터넷 서평 중에 우연히 이 블로그를 처음 방문했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한 마디로 그 때의 느낌을 말하자면 ‘경탄과 좌절’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의 분야를 가리지 않는 박학함에 놀랐고, 그 지식을 풀어낸 글에 반했다.
그야말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블로그의 페이퍼들을 넘겨가고 있었는데,
결국 좌절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신은 불공평하구나!”

하여튼 내게 존경심과 좌절감을 동시에 안겨준 양반의 책이 나온다니 적잖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지만,
출간 초부터 너무도 빵빵한 언론의 지원을 보며 느낀 정체모를 당혹스러움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책에 손이 가는 것을 멈칫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블로그는 뻔질나게 드나들며 눈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벼르던 책을 이번에야 붙잡고 읽어보게 되었는데,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개인적으로 일단 손에 잡은 책은 반드시 끝까지 읽는 독서스타일인데,
그 때문인지 책을 평가하는 개인적인 기준 역시 딱 한가지이다.
즉, 다 읽은 후에 또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느냐, 두 번 다시 던져놓고 다시 볼 마음이 안 드느냐의 기준 뿐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당연히 전자에 포함된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재독 욕구를 자극한다.

목차에 따르면 책은 다섯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나는 마음대로 양단해 버린다.
하나는 예술에 대한 논의(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에 대한 논의나 김훈‧김규항‧고종석 등의 문체에 대한 논의, 번역에 대한 논의 등등)이며,
다른 하나는 현대 세계에 대한 해석과 실천에 대한 논의이다.

예술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김기덕 감독이나 김훈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꾸준히 영화를 즐기고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흥미롭게 읽어내려갈 것이다.
반대로 그의 세상에 대한 논의는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어야 하고,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내 수준에서는 불가능했다.
니체, 라캉, 벤야민, 데리다 등의 굵직한 사상가들에서부터 슬라보예 지젝에 이르는 근현대 사상가들과 현실 사회를 연결하여 진행되는 논의를 보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으나,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차례 고민하고 다시 읽도록 하였다.

멋대로 생각해 본다.
현대 사회의 구성과 동인(動因), 변화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목해 보아야 할 사건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9.11, 이라크 전쟁을 꼽고 싶다.
소련의 해체와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어쨌거나 인류가 지향해 왔던 이데아 가운데 하나가 무너진 것이었고,
9.11 사건은 절대강자 미국에 도전한 가소로운(?) 집단의 테러를 통해 세계의 구성과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야말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라크 전쟁은 현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야말로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으면서 위의 세 가지 사건과 사상적 편력을 바탕으로 로쟈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가 활용한 단어와 문구를 그대로 차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2) (특히 젊은 층에게) 자유란?
3) ‘내가 나인 것이 기적’이다? 그럼 이 시대의 기적은?
4)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며, 정의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그럼 정의가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5) ‘레닌으로 돌아가자’ 지젝은 말한다. 레닌이 실패한 것, 레닌이 잃어버린 기회란 과연 무엇일까? 자본주의가 기생하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 아니면 정치경제의 혁명적 폭력?

어느 것 하나 손쉽게 답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로쟈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숨겨둔 것은 아니겠으나, 아둔한 머리로 간취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힌트를 얻었다면,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신선하게 보았던 부분이 다음과 같은 4개의 글이었다.

1) 네 번째 글인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
나는 여기에 소개된 콘찰로프스키의 자유에 대한 인터뷰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2) 여섯 번째 글인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김규항의 글에 대한 비판 중에 동의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로쟈의 비판이 힘을 잃을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3) 열여섯번째 글인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
데리다의 해체가 어떤 것인가를 흥미롭게 보았다. 아울러 그의 법과 정의에 대한 생각도 흥미로웠다. ‘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명쾌한 말이었다.
4) 스물다섯번째 글인 <레닌주의와 대중 유토피아>
지젝이 언급한 ‘레닌’의 효용, 즉, ‘사고 금지’의 상황을 중지시킬 강력한 자유라는 측면에서의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분명 매력적인 말이다.
하지만 3)에서도 언급한 정의와 힘, 또는 폭력의 관계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은 글, 너무 말랑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글’이 선정기준이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쉽지 않았다.
물론 한 번에 나름대로 이해한 글도 있었고, 흥미롭게 읽어내려간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최소한 두 세 번씩 반복하여 읽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읽고서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태반이라는 것!!!)

이 책의 모태가 되는 블로그의 이름(로쟈의 저공비행)에,
그리고 책의 부제에(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에 공히 ‘저공비행’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저공비행은 말 그대로 비행기가 아주 낮은 고도를 비행하는 것.
그렇다면 로쟈는 대중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또 한 번 멋대로 생각을 해 본다.
비록 지공비행이 격추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블로그를 소중히 생각하여 응원을 보내며, 오늘도 즐겨찾기에 등록해 놓은 그의 블로그로 발길을 옮긴다. 내공이 딸려 댓글하나 못다는 눈팅족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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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1 로마제국쇠망사 1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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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하면서 책을 읽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은 긴 호흡이 필요한 책을 읽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출퇴근 시간과 잠들기 전 시간을 활용해 보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다.
그래서 자꾸만 독서가 소설 쪽에 치우쳐 가는 것은 아닌지 은근 걱정될 때가 많다.

여름휴가나 명절은 그나마 시간 여유가 좀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맥을 끊어 먹지 않고, 오랜 시간 정독하며 독파해야 할 책에 적합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추석 명절에 읽을 책으로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첫 번째 권을 택했다.

[로마제국쇠망사] 첫 번째 권은 기번이 ‘인류가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평가되던 로마 오현제 말기부터 시작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기 직전까지 약 250년의 역사를 다룬다.
역시 기번의 문장은 시원시원하면서도 유려했고, 흥미로웠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정립에 대한 마지막 2개 장은 보통 흥미로운 것이 아니어서 15장과 16장은 재독하며 읽게 되었다.

서양사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일까?
오늘날의 서양문화의 기초로 흔히 말해지는 것이 2H,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지만,
사실 이것은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억울할 수도 있겠다.
흔히 서양문화의 원류적, 사상적 측면의 공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돌리고
로마의 업적과 영향은 정치체제나 법률, 건축 등 실재적인 영역에서 찾곤 하지만,
서양 문화 전체에 있어서 로마의 가장 큰 기여점은 단지 실용적인 기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구’라는 하나의 거대한 영역을 확정지은 것에 있다는 생각이다.
이 때의 ‘영역’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강역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로마라는 하나의 문화로 포용되는 융합을 통한 영역을 의미한다.

로마의 지리적 강역은 현재의 영국에서부터 라인강, 도나우강 서부 지역,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아프리카 북부 지역, 터키를 중심으로 하는 소아시아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지금도 ‘서구’의 핵심적인 지역이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구성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
즉, 서로 다른 하위의 소(小)문화 간의 관용과 관대함, 융합과 인정에서 ‘Pax Romana’를 형성한 로마의 저력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는 피정복민에게 관대한 정책을 활용하여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평등한 권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피정복민이 오랜 시간동안 누려온 문화와 종교, 인적 자원을 인정하고 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 기본적인 로마의 정책이었다.
어떤 민족의 문화이든지 세계의 중심 로마의 그릇 속에서 포용해 내어 녹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로마 속에 녹아들어 제국 전체의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그 자신감에는 오만스러움보다 높은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자신감 넘치던 문화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사후부터 서서히 변질된다.
기번은 그 쇠망의 원인과 과정을 [로마제국쇠망사] 전체에 담아 두고 있다.
물론 아둔하고 잔인한 황제들, 고트족과 게르만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침입 등 여러 가지로 그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첫 번째 권에서 가장 주목해 봐야 할 쇠망의 원인은 역시 앞서 언급한 자신감 넘치던 문화의 창조자를 잃어버린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기본적으로 로마는 공화정 때나 제정 때나 진취적인 지배계급과 헌신적인 시민계급의 건강함을 미덕으로 하는 사회였다.
당시 서구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황제를 보면 이 사실이 자명하다.
최소한 5현제 시기까지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안팎으로 두 가지였다.
국내적으로는 로마를 잘 다스릴만한 사람을 찾아 그를 부황제로 삼고, 황제 교육을 시키다가 적당한 때에 ‘선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식에게 당연히 황제 자리를 세습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마치 고대 중국의 요, 순, 우 임금이 천하를 가장 잘 다스릴 사람에게 자리를 양위하는 모습을 현실에서 보는 듯 했다.
국외적으로는 여러 속주들을 돌보고, 때론 최일선에 나가서 직접 전쟁을 지휘하며 군사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일이었다.
영화 <글레디에디터>에도 나오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전선에서 죽었다.

황제가 앞장서서 전투에 임하고,
귀족들과 시민계급이 직접 자비를 들여 무장하여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싸우는 로마군을 누가 당하겠는가?
덕망과 인품을 쌓아 원로원 등에서 인정받아 국가를 다스릴 만한 실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황제 후보자들이 즐비하니, 어느 누가 황제 자리를 독점하거나 편협한 정책을 일삼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5현제 이후 황제의 자리가 ‘선양’의 대상이 아니라 ‘찬탈’의 대상이 되면서 지배층의 도덕성과 자신감은 무너진다.
급여와 상여금을 올려준다면 서슴없이 황제의 목숨까지도 빼앗는 상비군으로서 근위대의 존재와 용병, 이민족들의 보조군으로의 편입은 ‘스스로의 수호’라는 로마의 뿌리를 갉아먹는다.
진취적이고 자신감 넘치던 문화를 만들어 냈던 로마의 지배층, 솔선수범하여 국가를 지켜냈던 로마의 시민들은 이렇게 썪어가기 시작한다.
기번의 평가를 들어보자.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귀족들은 자신들을 군무에서 배제시킨 이러한 치욕적인 면제 조치를 오히려 일종의 특혜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그들은 목욕탕, 극장 및 별장에서의 향락에 탐닉할 수만 있다면, 제국에 관련된 보다 위험한 책무들은 농민과 병사들의 거친 손에 기꺼이 넘겨 주었다(p.309).

이것이 결국에는 제국의 분할과 쇠망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방에서 쳐들어오기 시작하는 이민족들과 복잡한 국내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형식적으로 4분하여 2명의 황제, 2명의 부황제가 각각 다스리는 정치체제를 구축한다.
물론 당시에는 헌신적이고 서로 신뢰하던 4명의 황제들이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이민족을 물리치고 짧게나마 로마의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을 지켜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고안된 제국의 분할은 결과적으로는 국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제국 재통일도 내전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사후 동서 로마제국의 분할과 대립도 국력을 쇠잔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번에 [로마제국쇠망사]를 읽으면서 가장 몰입해서 보았던 부분은 로마에서의 그리스도교 발전과 박해에 대한 부분인 제15장과 제16장이었다.
혹시라도 [로마제국쇠망사]에 도전하는 분이라면 꼭 정독하여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로마 제국과 그리스도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제국의 박해와 신자의 순교라는 모습이 아닐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거나 거대한 콜로세움에 맹수밥으로 던져진 그리스도교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의 모습은
셴케비치의 [쿠오바디스]를 비롯한 수많은 로마 시대 영화를 통해 확대재생산된 이미지이다.
그 때문에 최소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인 이전의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고 박해한 제국이라는 것이 확고부동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기번은 이런 고정화된 믿음에 상당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래서였을까? [로마제국쇠망사]가 처음 나왔을 때, 영국의 교계는 엄청나게 반발하고 기번을 2류 역사가라 칭하며 맹렬히 비난한다.
기번은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급성장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든다.
첫째, 편협한 일신교의 열정, 둘째, 내세와 영혼불멸의 교리, 셋째, 기적의 힘, 넷째, 그리스도교인들이 보여준 미덕,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단결에 적합한 교회 행정체계.
기번도 분명히 지적했지만 그리스도교는 분명 로마 제국에서 ‘성장했다’.
네로 황제 시기를 비롯하여 몇 차례 박해와 탄압도 있었으나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속성, 즉, 관용과 포용의 수혜를 최대한으로 입은 종교이기도 했다.
그들의 편협한 일신교 교리조차도 로마에서는 용인되었고, 그들의 예배는 특정한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묵인되었으며, 포교 역시 자유로웠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보면, 그가 로마 제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포교했고, 아무 제한 없이 무수한 교회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제국내 속주들의 행정관과 총독들은 잔혹한 죄를 짓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처형하거나 가두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빌라도의 태도나, 바울에 대한 로마 총독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라.)

그래서 기번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교인의 종교 교의 자체는 처벌이나 심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p.640)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회 내부의 불화 과정에서 서로에게 가한 고통이 광신적인 이교도에게 당한 박해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p.690).

한 마디로 말하면 몇몇 황제에 의한 격렬한 박해도 잠시 있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교회사에서 그렇게 떠들썩하게 높이 평가하는 무시무시하면서도 장기간에 걸친 박해와 순교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로마 제국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유일신을 믿는 편협함은 주위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들과 사사건건 대립을 일으켰고,
이교도들이라 하여 다른 민족을 참혹하게 학살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으켰다.
내세에 대한 갈망은 스스로를 순교자로 만들기 위해 ‘오버’하는 경우가 잦았고,
교회 내의 재산 문제, 주교와 신자들과의 갈등, 중요 직책의 독점 등은 어떤 경우 속세를 뺨칠 정도였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라는 관대한 둥지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이 둥지 속에서 너무나 크게 자라나 마침내는 그 둥지 자체를 먹어치울 지경에 이른다.
포용과 다원성을 정책 목표로 하던 로마 제국과 편협함 및 다른 민족에 대한 배척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그리스도교는 서로의 궁합이 맞지 않은 조합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 또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앞당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냥 작은 도시 국가 상태였다면 모를까, 세계 제국이었던 로마가 택한 것이 포용과 다원성이 아니라 편협함과 지식/신앙의 독점이라니,
이는 국력을 분산시키고, 다른 민족, 다른 종교의 반발을 불러왔을 것이 틀림없다.

로마 제국 쇠망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지 않은가?
땅에 떨어진 지배계층의 도덕성, 편협된 가치관... 이런 쪽으로 말이다.
이제 [로마제국쇠망사] 두 번째 권은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후 로마 제국의 상황으로 이어져서 궁극적으로는 동서 로마제국의 분할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내부의 다양한 신학적 논의들, 즉, 아리우스파나 그노시스파 등을 어떻게 배격하면서 자신들만의 순수한 ‘지상낙원’을 이룩하고자 하였는지 펼쳐질 것이다.
약 2000년전 로마인들이 택한 길이 어떻게 그들 자신 뿐만 아니라 이후의 서구 역사, 나아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뱀꼬리
[로마제국쇠망사] 읽기는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또 언제 이렇게 꼭꼭 씹어 읽는 독서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지 은근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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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돌
아티크 라히미 지음, 임희근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인내’란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려서부터 ‘인내의 미덕’에 세뇌되어 온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해 봅니다.
‘조금 힘들어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어려움도 참으면 결국 복이 된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이 고상한 도덕규범이 혹시 이중적인 잣대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여기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정에 무관심한 아버지로부터 맞으면서 자란 이 여성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남자에게 시집와서 또 3년간 남편을 만나지 못합니다.
혹시나 처녀 며느리가 도망갈까봐 감시하는 시어머니의 눈초리는 그렇다 치고,
3년만에 돌아온 남편은 여성의 복종과 일부종사( 一夫從事)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성으로서 아내의 인격과 권한은 모두 남자인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만 속한 것입니다.
더 기막힌 일은 이런 남편이 내전에 참여했다가 식물인간이 되어 돌아온 후 일어납니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은 여자에게 남편을 떠넘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때부터 이 여성은 아무 미동도 없는 남편의 병수발만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에 경도된 병사들은 이 여성의 육체를 소유할 기회를 엿보면서도
여성이 ‘창녀’처럼 보일 때는 가차없이 그 여성을 악마로 매도하며 침을 뱉습니다.

[인내의 돌]을 통해 이 여성의 일상을 읽으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 여성에게 현실이 고통스러워도 참고 인내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아프가니스탄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내를 강요당하고 있는 세계 모든 곳의 여성의 처절한 현실과 절망을 재현해 냈습니다.
우선 이 여성이 어떻게 낡은 인습에 메여 있는지 보십시오.
지배자인 남성은 먼저 여성의 몸을 자신들의 ‘영토화’합니다.
순결함에 대한 맹신, 월경을 불결함과 죄악으로 치환시키는 맹목,
여성은 재생산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편협함,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희생당한 여성에게 씌워지는 ‘더럽고 사악한 창녀’라는 낙인.
이런 사고방식 속에 여성들에게는 ‘인내’가 강요됩니다. 이게 바로 성정치학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인내의 기제는 ‘폭력’과 ‘힘’이란 남성적 가치를 통해서 뒷받침됩니다.
반대로 이 여성이 어떻게 스스로를 해방시켰는지 보십시오.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언어에 자신의 감정을 실음으로써,
그리고 분출하는 감정을 솔직하게 내뱉음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억압의 부르카를 한 겹 벗겨 냅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타자화된 성은 미약하게나마 제자리를 찾습니다.

말과 글이 있다는 것은 소수자, 억압받는 자에게 있어서 저항의 마지막 무기입니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언론을 통제하려 하고, 역사를 자신의 입장에서 기록합니다.
반대로 소수자는 혀를 잘리고, 억압받는 자는 침묵을 강요당합니다.
그리고 도덕을 통해서, 종교를 통해서, 규범과 법률을 통해서 참고 인내할 것을 가르칩니다.
숨막힐 듯 폐쇄적인 사회에서 소수자들은 목소리를 잃었고,
그 잃어버린 목소리는 절규가 되고 비명이 되어서 유령처럼 떠도는 것입니다.

[인내의 돌]은 일방적으로 강요된 인내의 종말이 무엇인지를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방법에 대해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무작정 참고 인내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

결국 생게 사부르(syngue sabour), 즉, 인내의 돌은 깨어져야 합니다.
강요당한 인내가 깨어질 때만이 참된 자유가 오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에게 구원이 다가온 것처럼 말입니다.

살람 알레이쿰, 아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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