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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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 이 말만 들어도 뒷머리에 따뜻하고 화사한 조명이 느껴지고 나를 맞이하는 점원의 기계적이면서도 친절한 미소가 연상되며, 새로운 물건에 닿는 손끝의 아찔한 감각이 상상되는 사람이 있을런지. 이렇게 묻는 나야말로 사실은, 고급한 만물상의 성격을 가진 백화점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애착의 수준까지 다다랐다. 백화점에 가서 영화 <쇼퍼홀릭>의 주인공처럼 과분한 물건을 카드할부로 거침없이 구매하거나, 필요없는 물건을 궁색한 변명으로 포장하며 기를 쓰고 손에 넣는다던가 하는 병적인 애착은 물론 아니다. 나의 백화점에 대한 애착은, 내게 필요한 물건에 대해 점원의 조언을 듣고 굉장히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상품을 구입한다거나, 규칙적으로 진열된 그럴듯한 상품들을 구경하며 시각적 호사를 즐기는 쪽에 가깝다. 그렇기에 <백화점>이라는 이 책, 지나칠 수 없는 에세이인 것이다.

 첫 장부터 느낀 바, 저자는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훨씬 더 백화점에 대한 애착을 가진 것 같다. 기껏해야 의류와 화장품, 식품매장에 집중하다가 짬이 나면 그제야 리빙코너에나 발을 들이는 나와 다르게, 저자의 발걸음은 백화점의 지하 1층부터 꼭대기층까지 구석구석 닿아 있다. 비단 호감을 가진 것 뿐 아니라, 각층에서 판매하는 상품에 대해 다양한 개인적 에피소드도 가지고 있다. 이같은 백화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스스로 관찰하면서, 저자는 이를 토대로 여느 학자의 소비 이론이나 문학작품 등에서 관련있는 대목을 끌어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방법으로, 백화점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과 쇼핑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내려 한다. 여기에 백화점을 무대로 저자가 따로 취재한 이야깃거리가 추가되어 적절한 양념이 되어줌은 물론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쩐지 적은 머리숱이 신경쓰였던 저자는 백화점을 거닐다가 가발 매장을 발견한다. 점원이 권해주는 부분 가발을 써보고는, 감쪽같고 어딘지 모르게 근사하기도 한 모양을 바라보며 '장신구를 걸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는 생각의 발전 끝에, 장식의 쾌락과 목적에 관해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한 말을 떠올리고는 「몸에 걸칠 때, "모든 인격이 자신 이상이 되는" 것. 그것이 장신구의 힘이다.」(117쪽)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렇듯 저자는 자신이 작가로서 보여지는 모습 이면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백화점하면 떠오르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저자 자신의 생각에서 그것과 관련한 경험을 떠올리고 역사적이거나 숨겨져 있던 혹은 보편적인 사실들을 설명하는 과정은 마치 20세기 초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백화점을 둘러싼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흘러가는 대로, 하고픈 이야기를 다 하려는 듯 주섬주섬 문장을 꺼내 놓다보니 채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의 나열이 되거나, 간혹 흐름이 뚝 끊기고 생뚱맞게 새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어서다. 일부에서 이렇게 약간 산만한 느낌이 있었고, 때문에 한창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야 할 부분에서 튕겨져 나오는 장면전환이 더러 있었다. 몇 안되는 아쉬운 부분이다.

 백화점을 둘러싼 각종 문명의 발전(철도와 에스컬레이터가 백화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과 그 안에 진열된 다양한 상품,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까지, <백화점>은 매력적인 공간을 둘러싼 각종 잡학에 몰두한 책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말처럼 저자는 참새요 백화점은 방앗간으로서, 백화점을 가까이에서 또한 깊게 들여다 보며 쇼핑과 욕망의 아슬아슬한 동거, 소비와 절제 사이의 간극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물론 좀더 객관적이고 전문적으로 백화점에 대한 이야기와 소비에 대한 심리를 파고들고 싶다면 다른 경제/경영 분야의 책을 만나는 편이 나을 것이고, 백화점과 쇼핑,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슬며시 웃고 싶다면 이 <백화점>의 문을 활짝 열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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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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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책을 읽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을 '책벌레'라 놀림조로 부르곤 하는데, 이보다 두루 쓰이진 않지만 비슷한 표현이 하나 있으니 바로 '간서치(看書癡)'다. 볼 간에 글 서, 어리석을 치 자를 써서 책만 보는 바보라 하는 뜻인데, 지나치게 책을 읽는 데만 열중하거나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별명을 일찍이 얻어 지금까지 다독에 박학으로써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책에 미친 바보>의 주인공 이덕무다.

 이덕무는 영정조시대의 문인이자 실학자였던 인물로, 책과 글에 관한 대단한 열정과 욕심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박제가, 박지원, 유득공 등과 교류하면서 책 한권이라도 더 읽고 글 한 줄이라도 더 쓰는데 몰두했다. 이 같은 다독(多讀) 다작(多作)을 통해 이덕무는 늘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며 게으름을 배척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일에 머뭇거리지 않았고, 책을 읽고 생각하면서 세상일의 이치를 깨닫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다. 이러한 노력이 바탕이 된 그의 박식한 면모와 곧은 기품을 알아 본 왕의 눈에 띄어 규장각에서 검서관으로 일하며 다양한 책의 정리와 편찬에 공을 바치기도 했다.

 <책에 미친 바보>는 이같이 평생 책과 글을 벗하며 세상을 노닌 이덕무의 소품문(수필)과 짧은 편지글, 평론 등을 추려 국역한 책이다. 서얼 출신으로 마땅한 생계 수단도 없어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고, 없는 형편에 부모님과 아우들을 거둘 걱정에 근심하면서도 그는 한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갖가지 책을 구비해놓고 한가롭게 읽을 형편은 못 되는지라 열심히 책을 빌려 읽는 가운데, 친구에게 따로 편지를 써, 혹 남에게 책을 빌려 읽거든 혼자 읽지 말고 자신에게도 순서를 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였다. 또한 글을 읽고 문장의 뜻을 깨닫기 전에는 쉽게 책장을 넘기지 않았고, 심지어 몇 번이고 필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에 관해선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던 그는 또한 고증주의를 표방하여, 책을 통해 어떤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앞뒤를 꼼꼼히 따져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책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가 마냥 딱딱하고 어려운 글만 썼을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주로 척독(짧은 편지글)에서 그 점이 드러나는데, 친구에게 자신의 매우 개인적인 근황에 대해 재치 있게 풀어내거나,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단 음식에 대해 투정하는 듯한 이야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듯 담백한 뜻을 담은 책임에도 아쉬움이 있었다. 더욱 깊이 읽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한 주석이나 이덕무 연보,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책을 잘 정리하고 국역하기 전의 원문을 부록으로 백여페이지에 달해 구성한 점은 좋았다. 하지만 본문 중 문장부호가 제대로 정렬되지 않아 어지러운 느낌을 주는 편집이 아쉬웠다. 가장 아쉬운 것은 약간 거친 듯한 문장이었다. 글을 옮기는 과정에서 좀 더 물 흐르는 듯한 느낌으로 윤문했다면, 당대의 문장가였던 이덕무의 유려한 필치가 더욱 잘 드러났을 것 같다.

 혹자는 말한다. 책 이외에도 세상엔 다양한 문화와 지식 등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이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골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을 시간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를 향유하는 그 시간도 책 읽는 시간만큼이나 값질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생각도 비단 책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은 이덕무의 이야기를 읽으면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싶다. 세월의 흐름에도 바스러지지 않고 나름의 진리를 스스로의 몸에 퇴적하며 손에서 손으로, 머리에서 머리로 전해지는 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정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51쪽)」라는 이덕무의 말처럼, 이러한 책을 읽고 글을 가까이 함으로써 평생의 배움을 바탕으로 현명하게 생각하고 깨달을 줄 아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책만큼 사람의 정신을 맑고 건강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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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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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에게 시간은 공평하다. 태어나고 유아기, 청소년기를 지나 장년기, 노년기에 이를 때까지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흐른다. 본인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데에 상대성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같다. 그러나 여기, 공평한 시간의 안배에서 비껴난 소년이 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한아름이다.

 아름은 열일곱 소년이다. 소년의 열일곱이란, 한창 청소년기의 푸르른 아우라를 뿜어내며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공을 차는데 열심일 나이다. 하지만 그 무리에서 아름은 저 멀리 벗어나 있다. 원인도 치료방법도 모르는 병 때문이다. 아름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은 여느 사람들과 같지만, 그의 몸은 그렇지 못하다. 마치 몸에 제트 엔진을 달아놓은 듯 아름의 몸은 물리적인 시간을 뛰어넘어, 빨리 더 빨리 늙어간다. 운동신경은 날로 퇴화하고 잠시 거동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오르고 피곤이 몰려온다. 게다가 책이나 컴퓨터 모니터에 조금만 집중해도 쉽게 뻑뻑해지는 침침한 눈 때문에, 곧 닥칠지 모를 완전한 어둠이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아름이 쉽게 낙담했다면,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희망적인 제목을 가진 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터다. 최악의 상황에 몰린 아름이지만 누구보다도 담담하고 어른스럽게, 그리고 지혜롭게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 한다.

 아름에겐 삼십대 중반의 젊은 부모가 있다. 아름의 나이에 철없이 굴다 아름을 가졌지만, 아픈 자식을 꿋꿋하게 키워낸 용감한 부모라 이르고 싶은 엄마와 아빠다. 용감한 부모는 자식이 아프다고 해서 낙담하지만은 않는다.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탓에 친구가 없는 아름의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고, 친구처럼 농을 주고 받기도 하며 자식을 보살핀다. 젊은 부모다운 거침없는 말솜씨와 발랄한(?) 성격은, 나이에 비해 생각이 많고 진중한 아름의 모습과 대비되며 이야기는 더 선명한 빛깔을 띈다. 특히, 못해도 한 세대의 나이차를 뛰어넘은 장씨 할아버지와 아름의 우정 아닌 우정은 소설에서 감초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장씨 할아버지는 부모의 내리사랑으로 미처 감싸지 못하는 부분을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하면서, 친구란 성별과 연령을 초월하여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믿음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열일곱이지만 동시에 열일곱이 아닌 소년이, 17년간 지나왔을 길고 긴 터널을 따뜻한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그 터널은 부모가 있지만 혼자 걸을 수 밖에 없었던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래도 부모가 있고 감초같은 친구가 있었기에 아름은 '두근두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았던 것 아닐까.

 오직 제 나이답게 자라기를, 평범한 인생을 살기를 바라면서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 소년은, 생각의 키만큼은 훌쩍 큰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제 나이대로 평범하게 삶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분 일초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내 삶을 소중하게 그리고 한껏 아름답게 대할 때 비로소 두근두근대는 내 인생이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으로 전해지는 소리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다시 첫장으로 돌아가 프롤로그를 읽어보길 권한다. 처음에 읽어내지 못했던 행간이 눈에 보이고, 다 읽은 후의 감상에 프롤로그가 녹아 스며드는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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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이야기 - 너무 늦기 전에 알아야 할
애니 레너드 지음, 김승진 옮김 / 김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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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과 소비는 인간의 숙명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소비에 의해 생명을 연장한다지만, 다른 생물의 소비 수준에 인간의 소비를 비할 바는 못 된다. 단순히 잡거나 주운 식량을 소비하는 여타 생물과 달리 인간에겐 가공과 폐기 등의 과정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지하자원을 캐서 정제한 뒤 연료나 땔감으로 이용하거나 생필품으로 만들어 쓰고, 동식물을 키워서 잡거나 재배하여 식량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각종 광물을 캐다 가공하여 값비싼 보석을 만들어 몸을 치장한다. 이 모든 것은 인간만의 행위다. 지구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바다와 산, 땅속, 숲을 헤치고 다니며 자원을 추출하고 생산하며 유통시키고 소비한 뒤 폐기한다. 이 모든 행위에는 감독도 없으며, 훈수 두는 잔소리꾼도 따로 없다.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개척해 나간 길이다. 이제, 그 유구한 생산과 소비의 역사 앞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과연 이 모든 행위는 옳은가?

 우리는 우리의 생산과 소비하는 행위가 지구에 이롭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고는 있었으나, 그 행위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일이 개인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답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물건 이야기>를 읽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오'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저자 애니 레너드는 대학에서 환경학을 공부하던 어느 날, 길가에 마구잡이로 놓인 쓰레기 봉지들을 바라보면서 의문을 갖는다.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 손에 들어올 땐 멀쩡했던 물건들이 어째서 얼마 뒤엔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으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일까? 그것도 아주 많이. 의문을 참지 못한 그녀는 직접 행동했다. 과연 이 쓰레기들이 어디로 흘러가는 지를 따라갔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산만큼 큰 쓰레기 매립지였고,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큰 쓰레기장이었다. 이 거대한 쓰레기산으로 흘러 온 물건들도 다양했다. 소파나 가전제품 같이 묵직한 것들부터 책이나 비닐봉지까지……. 인간의 문명이 흉측한 모습으로 거대한 산이 되어 우뚝 서 있었다.

 이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이 쓰레기들의 근원을 찾았고 이 과정에서 '추출-생산-유통-소비-폐기'라는, 인간이 만들어 낸 거대한 고리를 발견했다. 산을 폭파시키고 땅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것은 물론이며 필요한 자원을 정제하기 위해 유독한 물질을 물에 쏟아 붓는 추출 행위는 서막에 불과했다. 곧이어 물건의 생산을 위해 인권이 무시되고, 추출과정에 이어 자연은 또다시 위협받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건을 세계 곳곳,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퍼나르기 위해 온갖 오염물질을 배출하며 운송수단은 바다와 땅을 서슴없이 질주한다. 이어 전혀 아름답지 못한 과정 속에서 탄생한 이 물건들은 매력적인 포장에 둘러싸인 채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좋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곧 마지막 수순을 밟게 된다. 폐기다. 이 과정에서 물건들은 -대부분이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 채- 애초에 그들이 있었던 곳, 자연으로 돌아간다. 마구잡이로 땅에 묻히고 바다에 묻히고 어떤 것은 해로운 연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스며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책임이 남았다. 위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위험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로 인한 부담과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안타깝게도 이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 인권이 낙후된 지역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몫을 진다. 얼마간의 임금도 최소한의 작업환경도 갖추지 못한 곳에서 많은 사람이 고되고 유독한 노동을 이어가며, 우리들의 소비를 뒷받침할 자원을 생산한다. 또한 일부 선진국에 비해 법체계가 철저하지 못하고 느슨한 국가나, 마땅한 경제 기반이 없어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으로 얼마간의 대가를 취하는 국가로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한 뒤 배설한 쓰레기들이 흘러간다. 저자는 이러한 불공평의 현장을 발로 뛰며 설명하고, 이 모든 일을 어떻게 하면 줄이고 막아서 자연환경의 파괴를 저지하고 인권탄압의 현실도 물리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연히,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알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다.

 물론 이렇게 잘못된 일을 고치기 위해 추출과 생산, 유통, 소비, 폐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을 하루아침에 그만둘 수는 없다. 이미 우리는 '물건'들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지점에 와 있고, 당장 이 행위들을 그만두는 것이 계속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이는 것은 가능하다. 그 답은 우리의 양심에 있다. 지구를 우리가 자원을 맡겨둔 금고쯤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인간적인 행위를 버리고, 환경친화적인 생산과 소비를 위해 제도적 · 양심적으로 노력하면서 생산과 소비의 현장에서 상실된 참다운 인간성을 살리는 것이 답이다. 이러한 거시적인 해결책 외에 아주 간단히 행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아끼는 것이다. 비닐봉투나 종이 휴대전화 옷가지 등 아직 충분히 쓸 수 있음에도 새것이 더 좋아서 헌것을 쉽게 버리는 행동, 누구나 한번쯤은 해본 일이다. 모든 개인이 이러한 행동을 한번 씩이라도 줄이고 아끼는 데 앞장선다면, 이는 전지구적으로 매우 큰 힘이 될 것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다. 저자가 <물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상통하는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공익광고를 통해 익히 들어왔던 말처럼, '나 하나쯤이야'하고 생각하기보다 '나 하나부터'라는 생각으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아끼고 재활용하며, 생산과 소비에 있어 오염을 줄이고 인간과 동식물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등 개인적 · 제도적인 방면에서 양심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지구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며 이 모든 일은 너무 늦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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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통신 1931-1935 - 젊은 지성을 깨우는 짧은 지혜의 편지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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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런드 러셀의 에세이가 실린 이 책을 읽으면서,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의 벽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천 년전, 수를 세기도 까마득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그 시대에도, 어른들의 걱정거리는 여일했던지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상형문자로 벽화에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다.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어리거나 젊은 세대에 대한 어른들의 시선이 고대 이집트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을 보면, 역시 사람이 사는 모양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시대적 보편성을 가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전에 쓰여 신문에 실렸던 러셀의 에세이들도 그렇다. 메말라가는 인간성에 대한 걱정이나 일회성 향락에 치중하는 사회의 분위기, 기술 발전에 대한 우려, 기득권층의 독선적인 움직임 등에 대한 러셀의 견해가 각각의 짧은 에세이 안에서 똑부러지게 펼쳐지는데, 요즈음 대두되고 있는 사회적 쟁점과 견주어 보아도 이질적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러셀이 이 에세이들을 쓰던 1930년대는 산업화를 통해 현대로 진입하는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두고 전세계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와 연결된다. 파괴력있는 자연재해 빈번해지는데서 비롯된 방사능 위기나 국가 · 민족 · 계층간 갈등이 폭력적으로 치달으면서 테러가 자행되고 위협적인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무엇보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으로 기술이나 기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인간성의 상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특히 1931년 11월에 쓴 「명상이 사라진 시대 The Decay of Meditation」가 인상적이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차나 전화 등을 이용해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은 단축되고 일과 일 사이의 간격은 더욱 좁혀졌다. 이러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1930년대의 현대인은 더 바빠지게 되었고 따로 생각할 틈이 부족해졌다. 이로 인해 두루두루 교양을 쌓기보다 자신만의 전문적인 지식을 쌓는 일에만 골몰하게 되고, 내가 당면한 일 이외의 사회적 · 시대적인 문제에 등을 돌리게 되면서 세상은 점점 팍팍해졌다. 러셀의 말처럼,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씩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72쪽)와 같이 된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우리 시대를 보았다. 최신 기술을 탑재한 전자기기가 하루가 멀다하고 앞다퉈 출시되며,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꿈이 실현되고 백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인류는 우주정복의 꿈을 꾸고 있고, 더불어 다양한 산업의 발전으로 우리는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나날이 더 많이, 더 자주, 더 효율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외적인 것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주인공인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자. 과학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우리의 모습도 과거에 비해 발전했는가? 나는 부정한다. 거의 모든 게 빨라지고 편리해지는 세상이 되자 사람들은 책을 읽기보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며 생각하기보다 웹서핑을 더 즐겨하는 등, 통계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일과 오락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명상이 사라진 것은 1930년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인간성에 대해 우려하는 러셀의 에세이를 단지 그 시대의 이야기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시대를 공유하는 에세이를 쓴 러셀은 일반적인 범주에서 봤을 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고아가 되어 조부모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분석철학 · 사회비평 · 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그답게 반핵운동이나 반전운동, 여성 참정권 주장 등 사회문제에 발을 들여놓다 구금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혼외정사 문제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토록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면서도 신문에 에세이를 싣는 것 외에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며,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도 펴냈다. 다양한 경험이 그를 뛰어난 필력가로 만들었고, 이는 곧 다양한 주제, 논조, 분야를 넘나드는 글의 초석이 된 것이 아닐까.

 앞서 <런던통신 1931 1935>가 시대를 꿰뚫는 시선으로 쓴 에세이라고 언급했는데, 물론 읽는 이에 따라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부분적으로 남자와 여자, 성인과 아이, 부유층과 하층 등의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는 1930년대의 보수적인 정서가 드러나면서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전 시대의 사회가치를 훑는다는 생각으로 읽는다면, 사회를 보고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눈높이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명상이 사라지고 여유가 사라진 시대, 번창하는 기술과 인간성의 선후가 전도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생각이 필요하다. 깊이 있고 다각적인 생각으로 인간의, 우리의 존재 이유를 다시 확인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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