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통신 1931-1935 - 젊은 지성을 깨우는 짧은 지혜의 편지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트런드 러셀의 에세이가 실린 이 책을 읽으면서,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의 벽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천 년전, 수를 세기도 까마득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그 시대에도, 어른들의 걱정거리는 여일했던지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상형문자로 벽화에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다.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어리거나 젊은 세대에 대한 어른들의 시선이 고대 이집트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을 보면, 역시 사람이 사는 모양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시대적 보편성을 가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전에 쓰여 신문에 실렸던 러셀의 에세이들도 그렇다. 메말라가는 인간성에 대한 걱정이나 일회성 향락에 치중하는 사회의 분위기, 기술 발전에 대한 우려, 기득권층의 독선적인 움직임 등에 대한 러셀의 견해가 각각의 짧은 에세이 안에서 똑부러지게 펼쳐지는데, 요즈음 대두되고 있는 사회적 쟁점과 견주어 보아도 이질적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러셀이 이 에세이들을 쓰던 1930년대는 산업화를 통해 현대로 진입하는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두고 전세계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와 연결된다. 파괴력있는 자연재해 빈번해지는데서 비롯된 방사능 위기나 국가 · 민족 · 계층간 갈등이 폭력적으로 치달으면서 테러가 자행되고 위협적인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무엇보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으로 기술이나 기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인간성의 상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특히 1931년 11월에 쓴 「명상이 사라진 시대 The Decay of Meditation」가 인상적이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차나 전화 등을 이용해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은 단축되고 일과 일 사이의 간격은 더욱 좁혀졌다. 이러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1930년대의 현대인은 더 바빠지게 되었고 따로 생각할 틈이 부족해졌다. 이로 인해 두루두루 교양을 쌓기보다 자신만의 전문적인 지식을 쌓는 일에만 골몰하게 되고, 내가 당면한 일 이외의 사회적 · 시대적인 문제에 등을 돌리게 되면서 세상은 점점 팍팍해졌다. 러셀의 말처럼,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씩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72쪽)와 같이 된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우리 시대를 보았다. 최신 기술을 탑재한 전자기기가 하루가 멀다하고 앞다퉈 출시되며,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꿈이 실현되고 백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인류는 우주정복의 꿈을 꾸고 있고, 더불어 다양한 산업의 발전으로 우리는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나날이 더 많이, 더 자주, 더 효율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외적인 것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주인공인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자. 과학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우리의 모습도 과거에 비해 발전했는가? 나는 부정한다. 거의 모든 게 빨라지고 편리해지는 세상이 되자 사람들은 책을 읽기보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며 생각하기보다 웹서핑을 더 즐겨하는 등, 통계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일과 오락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명상이 사라진 것은 1930년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인간성에 대해 우려하는 러셀의 에세이를 단지 그 시대의 이야기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시대를 공유하는 에세이를 쓴 러셀은 일반적인 범주에서 봤을 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고아가 되어 조부모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분석철학 · 사회비평 · 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그답게 반핵운동이나 반전운동, 여성 참정권 주장 등 사회문제에 발을 들여놓다 구금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혼외정사 문제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토록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면서도 신문에 에세이를 싣는 것 외에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며,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도 펴냈다. 다양한 경험이 그를 뛰어난 필력가로 만들었고, 이는 곧 다양한 주제, 논조, 분야를 넘나드는 글의 초석이 된 것이 아닐까.

 앞서 <런던통신 1931 1935>가 시대를 꿰뚫는 시선으로 쓴 에세이라고 언급했는데, 물론 읽는 이에 따라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부분적으로 남자와 여자, 성인과 아이, 부유층과 하층 등의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는 1930년대의 보수적인 정서가 드러나면서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전 시대의 사회가치를 훑는다는 생각으로 읽는다면, 사회를 보고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눈높이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명상이 사라지고 여유가 사라진 시대, 번창하는 기술과 인간성의 선후가 전도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생각이 필요하다. 깊이 있고 다각적인 생각으로 인간의, 우리의 존재 이유를 다시 확인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