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6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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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세계대전에 학도지원병으로 참전한 파울 보이머의 시선으로 담은 전쟁, 전우, 세계 그리고 삶. 고작 열아홉 살, 아직은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소년들. 어른에게 떠밀려 온 전장에서, 어리다고도 젊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의 아이들은 그들에게 없는, 아직 가져보지 못한 것들을 잃어간다. 그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동시에 '행방불명' 상태에 있다. 비정한 전선에서 잃어가는 감정과 흔들리는 자아는 그들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든다.




2. 그들은 자신들이 왜 앞에 나서서 싸워야 하는지 가치정립도 제대로 되지 않은 나이다. 이 모든 것이 평화를 위한 길이라는데 왜 사람이 죽어야 하지? 자문할 뿐이다. 돌아오는 답은 없다. 다만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죽어갈 땐 '엄마'가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 파울은, 젊은 그들이 세상에서 맡은 최초의 직무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사실에 절망과 허무를 느낀다. 어린 그들을 키우는 것은 따뜻한 고향집이 아닌 전장의 비정함이었다.




3. 파울은 전장에서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보름 남짓의 휴가를 받는다. 집에 가서 군복을 벗고 참전하기 전에 입던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데, 옷은 너무 짧고 꽉 조인다. 파울은 전장에서 포화를 뒤집어 쓰면서 커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시절이 그의 뼈 마디마디에 새겨진 것이다. 씁쓸함에 젖은 채, 파울은 친구의 어머니에게 친구의 전사를 전하러 간다. 슬픔에 잠긴 친구의 어머니는 파울 앞에서 흐느끼며 묻는다. '어째서 내 아들이 죽고 너는 살았을까'. 파울은 할말이 없다. 다만 친구는 즉사로 편히 갔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설 뿐이다.




4.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개선문> 등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세대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말대로 그의 작품들은 '고발이나 고백이 아니라, 포탄은 피했어도 정서적으로는 파멸한 세대에 대한 보고'의 역할을 수행한다. 매우 담담하게. 그런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세대 살해'를 직설하는 2008년의 미드 <Generation Kill>과도 맞닿아 있다. 전쟁이 이성과 감성을 파헤쳐 헤집어놓은 세대들. 수십 년의 시간에 걸쳐 우리 인간은 여전히 같은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완전한 치유는 없고 새로운 상처들만 생겨나고 있다.





알베르트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힌다. 「전쟁이 우리 모두의 희망을 앗아 가버렸어.」
사실 그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이제 더는 청년이 아니다. 우리에겐 세상을 상대로 싸울 의지가 없어졌다. 우리는 도피자들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세상과 현 존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에 대고 총을 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터진 유탄은 바로 우리의 심장에 명중했다. 우리는 활동, 노력 및 진보라는 것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살았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것의 실체를 믿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오직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 P75

오늘날 우리는 여행객처럼 청춘의 풍경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들에 의해 불타 버린 상태에 있다. 우리는 장사꾼처럼 차이점들을 알고 있고, 도살자처럼 필연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낼 수 없는데도, 끔찍할 정도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다. 우리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과연 살고 있는 걸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림받은 상태에 있고, 나이 든 사람들처럼 노련하다. 우리는 거칠고 슬픔에 잠겨 있으며 피상적이다. 나는 우리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생각한다.
- P102

포탄, 독가스 연기, 탱크의 소함대가 짓밟고 갉아먹으며 목숨을 앗아 간다.
이질, 유행성 감기, 장티푸스가 목을 조르고 불태우며 목숨을 앗아 간다. 참호, 야전 병원, 공동묘지, 결국 우리가 갈 데라곤 이곳들밖에 없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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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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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과 단편소설과 젊은 작가라는 카테고리를 썩 내켜하지 않는 취향으로 이 모든 조건을 가진 책을 선택하고 읽는다는 건 큰 모험이다. 바로 얼마 전 같은 조건을 가진 책을 혹시나 해서 읽었다가 '역시…….' 하며 데이고 내려놓은 기억이 생생한 때여서 더 그랬다. 간직하고픈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마음 한 켠 건져내지 못한 채 떠나보낼 책을 읽은 시간이 아까워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를 쓴 작가이고, 그 책에 실린 단편들도 나쁘지 않았던 인상이 있었지만은, 무엇보다 작품들의 발치에 실린 '작가의 말' 몇 마디로 나를 울린, 많이 울게 한 작가이므로 충분히 모험을 감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출판사와 작가와 책들 가운데서 보석을 한 번 발견하면 그것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음을, 그 다음을, 또 그 다음을 믿고 기다리는 나만의 규칙 또한 최은영 작가에게 유효했으므로.



그 책, <쇼코의 미소>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 작가는 지난 날의 자신에게 이렇게 썼다. 「(전략)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 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뜻하고 밝은 곳에 데려가서 그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도 용기를 내줘서,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292쪽) 이를 읽고 나는 이렇게 썼다. 「지난 날 생존하기 위한 대가로 삶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보낸 많은 감정들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읽는다는 것의, 문장을 찾아 헤맨다는 것의 의미가 여기에 있으려니 한다.」 이같이 쓰고 다시 울었다.



두 번째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아릿함이 느껴지는 손길로 마음을 어루만진다. 어른이 된, 아니, 어른이 되어버린 현재 시점에서 어렸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젠 빛바랜 상자에 꽁꽁 넣어 지난 일로 묻어둔 관계와 그 순간엔 진심이었던 마음들과 미처 드러내지 못했던 작은 마음들에 대해 쓴다. 어떤 형태로든 상실을 겪어온 우리의 지난 날을 어루만진다. '그때로 돌아가면 더 잘할 것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할 것을' 같은 류의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전복적 상상보다는, 단지 '나는 그렇게 견뎠구나' '당신은 그랬었구나' 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하면서.



작가는 삶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잘하려고 했어도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나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 뼘의 성장에 대해 쓴다. 그 과정에서 최은영의 소설 속 화자들은 지난 날 뾰족한 마음으로 자신을 찌르며 스쳐갔던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에 다다른다. 그렇게 세월의 더께가 두텁게 내려앉은 마음의 겹겹을 헤집는다. 그 긴 시간의 방황 끝에 찾아낸 진심은, 그 마음은 결국 나를 용서하고 나를 받아들이며 나와 화해하는 '지금의 나'에 닿는다.



가을방학의 노래 <베스트 앨범은 사지 않아>가 떠오르는 책이었다. 특히 자신을 드러내는 재주가 유독 없었던,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면서도 내심 괴로웠던 이의 이야기가 담긴 『모래로 지은 집』에서 많이 그랬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겐 나의 '베스트'만 필요하지는 않다는 걸, 그저 나의 '모든 모습'이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은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비친 것 같았다.



많은 단어와 문장과 문단들에서 눈물이 고였다. 아프고 예민한 마음을 위로받고 있다는 것에 위안받는 자의 마음이 당연 그러하듯이. 아릿한 문장들이 유유히 흘러가는 가운데 어린 날의, 지난 날의 내가 그 행간에 서 있었다. 아무리 눈을 피하고 장을 넘겨도, 어느 곳에서나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어찌나 망연했는지.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 하릴없이 슬픈 눈동자를, 무해한 사람으로 자라나지 못했음을 스스로 책망하며 슬퍼하는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책이 끝났다.





그때의 나는 화가 났을까 슬펐을까. 아마 외로웠던 것 같다. 모래의 말은 맞았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 P152

그러네, 대답하고 나는 이어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 널브러진 비닐봉지 같은 존재였다고, 바람이 불면 허공으로 날아갔다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걸려버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고 있었다고 말이다. - P248

많은 이들이 최은영의 소설에서 감지한 다정함은 누구나 한 번쯤 베인 적 있는 상실의 감각에 대해 예민한 촉수로 그려내는 것을 넘어서, 거대한 세계와 사소한 개인 사이의 위계를 무너뜨려 버린다는 게 있을 것이다. 작가는 다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혼돈일지라도 그것이 세계 종말 이상의 사건이 될 수도 있음을 전제한 채, 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듯 얇게 흔들리는 마음의 무늬들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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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바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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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의 뜻과 나의 성경해석이 곧 하느님의 뜻'임을 자처했던 장 칼뱅. 그는 세르베투스의 성경해석의 도전도, 카스텔리오의 정의로운 반박도 용납할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진리요 길이었던 칼뱅은 반대 의견을 자기 신성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 종교적, 정치적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의견을 겁박하고 억압하는 독재자는 지도자가 아닌 힘 센 협잡꾼일 뿐이다. 카스텔리오의 말대로, 교리의 강요나 자유의 억압으론 인간을 야만 같은 세상의 풍파에서 구할 수 없다. 관용만이 인간을 야만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문이 든다. 칼뱅의 생각대로, 인간이 애초에 육체적/정신적으로 완전치 않은 적극 교화의 대상이어서, 그토록 강한 규율과 억압 속에서만이 그 구실을 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신은 왜 이렇게 부족한 피조물을 창조했을까?


0. 옳음과 틀림. 같음과 다름. 정통과 이단. 이것들 사이에 과연 교집합의 영역이, 회색의 지대가 존재할까? 요즘들어 하는 생각이다. 정치사회적으로 이견이 첨예하게 맞붙고 젠더갈등 또한 (한계 수위까지 닿을듯 말듯 하는) 꽤 높은 수위에서 논박이 오가는 걸 지켜 볼 때면(또는 그 장에 뛰어들 때면), 과연 이 갈등을 타개할 중간지대의 방책은 없는가 하는 자문을 하곤 한다. 하지만 고민의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의 진영과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흑백으로 나눌 수 없다면 회색의 답이라도 존재하기를 바라지만, 회색의 답이 나온다 한들, 그 짙고 옅은 농도에 따라 '이것은 흑에 가깝다' '아니다 백에 가깝다'라는 다음 단계의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 것이 자명하므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은, 세상에서 그 어떤 완전한 일치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계에 오롯한 합의나 일치는 없다. 다만 불일치의 세상이 있을 뿐.


0.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장은 정말 좋다. 드라마틱하면서도 단호하게 맥을 짚어낸다. 사람들이 이승우 작가의 문체에서 찾곤 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나는 츠바이크의 문장에서 찾곤 한다.




역사는 정당할 때가 없다. 역사는 냉정한 연대기 기록자로서 결과만을 헤아릴 뿐, 도덕적인 척도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는 오직 승리자만을 응시하며 패배자들은 어둠 속에 남겨둔다. 이 ‘이름 없는 용사들‘은 거대한 망각의 구덩이 속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내던져져 있다. 십자가도 없고 화환도 없다. 희생의 행위가 헛되이 끝나고 말았기에 십자가도 화환도 이 잊혀진 자들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순수한 마음에서 감행되었던 어떤 노력도 헛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떠한 도덕적인 노력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영원한 이상을 위해 너무 일찍 나타났던 사람들, 그래서 패배한 사람들도 패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미를 실현했다. 한 이념을 위해 살고 죽는 증인과 확신을 얻은 사람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념은 지상에 살아남기 때문이다. - P27

쉽게 정열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래 망설이는 사람, 내면에서 진심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천천히 결심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모든 정신적인 투쟁에서 가장 훌륭한 투사들이다. 모든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지고, 무기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그들은 무겁고 편치 않은 심정으로 방어를 위해서 일어선다. 그러나 이렇듯 가장 어렵게 싸움을 결심한 사람들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단호하고 확고한 사람들이 된다. - P189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 P227

고발당한 수치에 대한 보상으로,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의 장례식은 일종의 도덕적인 승리의 행진이 되었다. 카스텔리오가 이단의 의심을 받고 있는 동안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침묵하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자신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던가를 보여주었다. 살아서 미움받는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 언제나 더 편하기 때문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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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길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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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줌의 눈'에서 뻗어 나온 생명력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쳐, 다시 나치 정권과 소비에트 시대 그리고 통일된 독일까지 이어진다. 숙명적 죽음이 우연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고, 이는 다시 숙명적인 죽음으로, 또 다시 우연의 삶으로 돌고 돈다. 이는 끊어지지 않는 실로 엮여 반복되는, 운명이되 운명이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다.


2. 불시에, 불특정한 완력에 의해 삶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숙명과 우연이라는 질료로써 그 구멍들을 메워 보지만 삶이라는 세계가 가진 폭은 너무나 깊고 넓어서, 겨우 어느 한 부분을 메웠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이정표를 부여받지는 못한다. 단지 결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의 진행 끝에, 애초에 부여된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귀결을 맞을 뿐이다. 모든 삶은 그렇게 종결된다. 속절없는 비극이다.


3.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읽어도 하나의 생각은 날로 분명해진다. 개인은 시대에 잠식되고 함락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 나는 이제 시대를 향해 저항의 손을 들기보다 연민의 눈으로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바라보기로 했다. 열세에 몰려 분투하는 아군을 지켜보는 심정으로.


4. 장과 장 사이에서 '막간극'이라는 이름으로 서사의 전환을 꾀하는 징검다리가 흥미롭다. 숙명과 운명 사이 어디쯤에서, 정해진 길을 비껴가고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포석을 놓는다.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할 지라도 반복하여.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끝이 나버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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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긼하 2018-09-2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한길사입니다.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가제본 리뷰 당첨자로 선정되셨습니다.
늦게 연락드린 점 죄송합니다.

ddivine07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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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약점 체크라고 하니 꼭 풀어봐야 할 것 같은 문제집이네요! 선재쌤 이름이 있으니 더욱 믿음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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