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 북 동화 보물창고 46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존 록우드 키플링 그림, 원지인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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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환성을 지른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정말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책 속의 야생소년 모글리와 무섭고 야비한 호랑이가

20여년 만에 나의 기억 속을 헤치고 나와 반갑다고 손을 흔들어댔다.

어릴 때 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근사한 삽화도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이 묵직한 두께......

'모글리 이야기'가 이렇게 길었었나 하고 기억을 더듬는데, 목차를 보니...

어! 일곱 편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 중 셋은 모글리 이야기지만, 처음 보는 네 편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환경의 다른 동물들 이야기.

추억 속의 책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책이다.

호랑이 시어칸의 먹잇감이었다가 늑대의 아이로 자라게 된 모글리.

혼자 늑대 굴로 걸어와 늑대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포동포동한 아이에게

"털도 없는 게 겁도 없네!"하며 매료된 어미 늑대.

늙은 곰 발루의 애정 어린 가르침과 슬기로운 흑표범 바기라의 보호 아래 정글의 법칙을 지키며

누구 못지 않게 정글의 한 형제로서 한 몫을 해내었건만,

시어칸의 부추김 아래 늑대들은 12년 이상 자신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모글리를 '인간'이라며 배척한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바기라의 도움을 얻어 불로 그들을 응징하고 떠남을 결심하는 모글리.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내가 죽는 거야?"라고 놀라는 이 인간의 아이.

'종족'이라는 이유로 찾아간 인간들의 마을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다시 정글로 돌아오지만

"이제 나는 혼자"라고 선언하는 모글리의 삶은 '어른이 된다는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배웠던 도덕과 법칙들이, 옳다고 생각해온 모든 것들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쉽게 배신당하던가?

눈을 마주칠 수 없기에 모글리를 미워하는 늑대들,

이해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는 이유로 악마라고 쫓아내는 인간들.

시어 칸에게 거둔 통쾌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은 씁쓸함을 남긴다.

 

 

<하얀 물개> 코틱은

"사람들이 전혀 오지 않는 섬을 찾으면 모를까, 너희는 늘 끌려갈 거야."라는 바다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아 5년을 넘게 바다를 떠돈다,

오랜 고생 끝에 숨겨진 섬을 발견했음에도 그 사실을 믿지 않고 비웃는 무리들.

'지금 가진 것'에 집착하는, 모험을 두려워 하는 보통의 사람들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인간이야말로 자연의 숙적'이라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제발,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곳들의 비밀이 영원히 지켜지기를 바란다.

인간의 탐욕은 이익을 알게 되는 한, 스스로를 제어할 힘을 잃고 마니까.

 

 

<리키티키타비>는 몽구스의 이름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하지만 낯선 이 동물을 놀라게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한다. 코끝부터 꼬리끝까지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생물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코브라 나그와 나가이나에 맞서 벌이는 전쟁 이야기를 통해

용기와 지혜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몽구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코끼리들의 투마이>에서 작은 투마이는 여지껏 누구도 본 적이 없다는 코끼리들의 춤을 보게 된다.

달빛을 받아 철회색이 된 숲속 공터에서 수백 마리의 코끼리들이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다 함께 쿵쿵 발을 구르는 광경은

하나의 그림처럼,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자연의 신묘함으로 그려진다.

 

 

<여왕 폐하의 신하들>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포대의 코끼리들, 대포 끄는 소들과 당나귀들, 기병대의 말들, 식량 보급대의 낙타들이

저마다 자신이 경험하는 인간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뽐내고 다투기도 하며

하나 같이 모두 제 몫의 일을 해내고 있음을 자랑스러워 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단편의 마지막이며 이 정글북 전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캠프 동물들의 행진곡'의

"먼지투성이에 졸음을 견디며

말없이 옆에서 걷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고 그들이 왜 매일매일 행진하며

고통을 받는지 말해 줄 수가 없네."

라는 구절은 키플링이 작품 전체를 아울러 강조하는 '질서'와 '규칙'이

그것을 세우는 자가 아니라, 지켜야 하는 자들, 곧 약자들에게는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것일 수 있는지를 역으로 생각하게 한다.

어릴 땐 이 '정글 북'이 이렇게 대단한 책인 줄 몰랐다.

이렇게 많은 책들을 접하고 나서... 세상을 겪고 어느 정도의 시각을 갖고 나서야

진가를 알아보게 되었다.

나중에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커가는 아이와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고도 싶다.

이 정글의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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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 푸른도서관 50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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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라는 제목이 나에게 묘한 긴장감을 준다.

인간이 가장 믿는 '내 눈'이 나를 속이는 신비.

한번도 본 적 없지만,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닐 그 것이 보고 싶다는 이상한 바램은

나만의 것은 아니지 않을까?

갈망하는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소녀는 다인이일까? 아니면 숙희의 마음 속 자신일까?

책을 덮으면서는 아마 둘 다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엄마 고교동창 단체여행에 우여곡절 끝에 따라가게 된 다인이.

기대할 것 없는 몽골, 시끄럽게 사투리로 떠드는 아줌마들, 다정한 데라곤 없는 엄마에 부루퉁했던 다인 앞에 나타난 꽃미남 가이드 바뜨르.

열혈팬인 남성그룹 야누스의 1인과 꼭 닮은 그의 존재 자체가 다인에겐 신기루와 같다.

순수하고 속깊은 바뜨르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떠들썩한 아줌마 군대 속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고

생각많은 다인인 혼자서 설레었다가, 실망했다가, 차후 5년간의 계획을 세웠다가 하며

나를 그 시절 그 때로 데려다 놓는다.

혼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쓸쓸함 그 자체인 듯' 앉은 자신이 '한층 고결해진 느낌'을 만끽하는 다인이의 독백엔

그 진지함에 미안할 정도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래, 다인아...... 나도 너 같았을 때가 있었는데......

마치 고교시절 일기장을 읽으면 혼자 부끄러워지는, 바로 그 낯익은 느낌이다.

그 노을 안에 바뜨르가 나타나고 웃음을 나누며 꿈 같이 행복해하는 다인이.

이 쯤 되니, 나도 너무나 이쁜 바뜨르와 다인 사이에 아름다운 추억이, 인연이 생기길 소망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말을 타다 얻은 부상이 심해진 바뜨르는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고

허망하기만 한 다인이는 모래사막에 서서 신기루를 만난다.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던 신기루가 사라진 순간, 엄마가 운다. 그리고, 모두 운다.

다인이도 이유를 모른 채 그저 운다.

여기서 1부, 다인이의 이야기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끝난다.

 

 

그리고 화자는 엄마로 바뀐다.

짠순이에, 아들바보에, 성깔도 꽤나 있는 무서운 엄마 숙희는 어떤 이야기들을 펼쳐낼지 궁금해진다.

야단치고 화를 내며 ?려놓고서도 잠든 다인이의 얼굴을 보며 30여 년 전 자신을 떠올리는 숙희.

바뜨르로 인해, 열여덟 살로 돌아간 듯 나이도 현실도 잊었었다 얘기하는 그녀에게서

모두들 '아줌마들의 주책'이라 흉보는 행동들이 감춘 서글픔을 다시 마주보게 된다.

여행을 앞두고 받은 자궁암 초기 진단, 같은 병으로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기억이 숙희를 괴롭히고 있다.

엄마와 싸우고 미워한 기억 밖에 없기에, 그 이별이 아직도 숙희를 괴롭히고 있건만......

그녀는 아이들을 대할 때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조급함 ?문에 아이들을 닦달하며 거리만을 쌓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수많은 엄마들의 대표인 듯한 숙희의 마음은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깝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조바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어 슬프다.

그러나, 힘없고 비굴한 인생의 견본인 듯한 가이드 니르구이의

"사람은 모두 죽잖아요."라는 한 마디 말은 숙희의 가슴에 얹힌다.

그럼에도 숙희는 자신을 굽힐 수 없다. 최선이라 믿으며 살아온 삶을 뒤엎을 순 없다.

열 다섯 살의 다인에게 사막은 우물을 감춘 곳이다.

꿈꾸는 자의 눈에 따라 서로 다른 꿈을 열어주는 '길 없는 길' '발 닿는 데가 곧 길'인 곳이다.

마흔 다섯 살 숙희는 100% 허상인 신기루에서 '실재하는 삶'을 찾으려 한다.

나, 나라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걸어온 시간이 가치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에 흔들리는 숙희의 눈물은

참 아프다.

그러나, 그 고통 끝에 숙희는 현실에 치여 살며 묻어두고 있었던 의문과 죄책감에 대한 답을 얻는다.

그리고 여행의 순간순간들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딸과 함께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그래, 이것이면 충분하다.

무엇이 신기루인지, 무엇이 길인지 알 수 없는 삶이라는 사막 속에서 함께해 주는 것.

그가 꾸는 꿈을, 그가 걷는 길을 믿어주는 것.

 

머리가 하얗게 세어가는 엄마의 딸이며, 새로운 모든 것들에 대해 탄성을 지르며 질문으로 하루를 채우는 딸의 엄마인 내게

용기와 위안을 준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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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이솝우화 나는 1학년 2
이솝 지음, 마술연필 엮음, 김미은 외 그림 / 보물창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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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억하는 최고의 선생님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선생님이죠.

꽉 짜여진 삶 속에서 죽은 듯 살아가던 학생들에게

새롭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걷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현재를 즐기라!"고 외쳐주던 그 모습은

정말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제2의 부모'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 키팅 선생님처럼 참 재밌게, 쏙쏙 들어오게 

우리 아이들에게 참지혜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바로 2천여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 그렇구나!"하고 이마를 탁 치게 만들어오신

 이솝선생님이시죠! ㅎㅎ

 

 

기원전 6세기, 지혜의 고향이었던 그리스인들을 놀라게 했던 이솝의 이야기들은

  첨단과학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한 경이를 간직하고 있는 듯해요.

 

이제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1학년들을 위해

그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358가지 이야기들 중에 열여섯 가지 이야기들을 담은

책들이 나왔네요~

 

그림만 봐도 딱 알겠죠?

<서울쥐와 시골쥐>

서울쥐가 욕심많은 돼지 흡사하게 그려진 것이

그림 또한 재치가 넘치지요.

풍족 속에서도 불안에 시달리며 사는 바보 같은 우리와

가난하지만, 꼭 필요한 삶 지혜들로 충족된 삶을 사는 이솝이 만나는 장면 같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

 

 

이 책에 실린 열여섯 가지 이야기들이예요.

제목만으로 "아~ 이 얘기!"하게 되는 이야기들.

이 책의 특징은 몇 가지 이야기들이 같은 주제로 나뉘어, 묶여 있다는 거랍니다.

 아이들이 꼭꼭 마음에 새겨야 할 명제들이죠.

 

 

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한 페이지에 간략하게,

그리고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아이들 상황에 빗대어서

교훈을 풀이해 줍니다.

 

진정한 힘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

대가 없이 베푸는 것의 가치,

작아보이는 것과 함께 함의 위대함,

진정한 친구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가 끝나면

<무엇이 진짜일까요?>라는 질문으로

이솝이 얘기하고자 했던 '진짜 소중한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지요.

 

 

 

<노력은 가장 힘이 세요!>

<넘치는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해요>

<무엇으로도 진실을 가릴 수 없어요>

로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들도

언제나 새로운 오래된 지혜를 전해줍니다.

 

 

 

 

1학년이 되려면 아직 1년 남은 저희 딸래미가 혼자

열심히 이 책을 읽고 있네요.

벌써 두번째예요.

두번이나 연달아 읽는 걸 보니, 지혜도 지혜지만 무척 재밌있나 봅니다.

즐거운 독서 속에 그득그득 쌓이는 지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고, 수업 마치는 종소리가 원망스러운 시간,

어렵지 않게 쏙쏙 머릿속에 넣주시는 지혜와 지식들......

'최고의 선생님, 이솝'

 

제 말이 맞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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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 빈처 올 에이지 클래식
현진건 지음 / 보물창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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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의 어원은 '앓음+답다'라고 한다.

앓음 - 곧, 고통과 시련을 겪은 후 얻게 되는 것이란 뜻이다.

 

현진건의 열 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이 작고도 묵직한 책을 덮으며 무심결에 떠오른 단어가

이것이다.

'아름답다. 참으로 아름답다.'

 

소설 속 인물들의 처연함은 여전하다.

그러나, 어렸을 땐 답답하고 한심스럽기만 했던 그네들이 이젠 그저

나 같다.

우리 같다.

 

'웃기보다 찡그리기에 가장 적당한 얼굴('고향')'을 지닌 정 많고 한 많은 사람들,

"나의 소용은 술 뿐이오.('술 권하는 사회')"라 괴로워하는 지식인들도,

야속한 이를 탓하지도 못하고 '그 사회란 독한('술 권하는 사회')' 것만을 사무치게 원망하는

마음 약하고 미련퉁이 같은 이들의 눈물도,

청춘의 찬란한 사랑과 꿈 또한, 묵고 썩은 관습이 숨을 끊어놓는 것까지('희생화')

세상은 변한 게 없다.

현대의 화려함 속에서 오히려 더 깊고 절망적인 나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삶의 모든 고통을 피할 요량도 없이 그저 온몸으로 짊어지며 처절하게 살았던 그들은

그럼에도 자신보다 다른 이의 아픔을 더 안쓰러워 하며, 함께 한다.

하루하루 아슬아슬한 생활 속에서 약한 진상을 드러내고 상대를 원망하다가도

결국은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용서를 구하는('빈처') 내 곁의 이가

곧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임을 발견하는 눈을 지녔던 것이다.

 

그늘 속에 앉아 말없이 나를 지키고 있는 '빈처'처럼

어둡고 탐욕스런 세상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사람들을 남겨준

이야기들에 감사한다.

이렇게도 약하고 순박한 이들이 전하는 힘과 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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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첫사랑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25
엘렌 위트링거 지음, 김율희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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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하는 문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프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라고 읽었던 날이 있었다.
'내가 조금 컸나 봐.'하고 생각했었다.

'달콤쌉싸름한 첫사랑'의 원제는 'HARD LOVE'이다.
힘든 사랑......
무슨 일이든 처음이 제일 힘들다 하지만, 그 농도에 있어서 사랑 만한 게 있을까?


부모님의 이혼 이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감정과 관계들을 외면하고 살아온 존.
엄마의 우울증, 아빠의 방탕한 독신 생활,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 스스로의 삶을 정지시킨
이 '정상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공허한 영혼'은
1인 잡지에 실린 마리솔의 글을 읽는 순간, 자신의 삶을 사람들 앞에 거침없이 펼쳐 보이는 그녀에게 매료당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속을 내 속보다 훨씬 깊이 들여다보는 기분.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마리솔을 꼭 만나고 싶다.(p.18)'
 사람들하고 친해질 시간 따위 없다던 존은 알지도 못하지만 '내 속보다 훨씬 더 알 것 같은' 마리솔을 만나기 위해 그녀가 1인 잡지를 가져다놓는 현장에서 1시간을 넘게 기다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작고 왜소한 모습 속에 자신이 상상했던 특별함이 깃든 이 소녀와 만나는 순간, 존은 '살아 있기' 시작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존'이라는 이름이 촌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이름을 '지오반니'라고 해버린 것.
 열일곱의 레즈비언 소녀가 거리를 둘까봐 자신이 아직 성정체성을 찾지 못했다고 해버린 것.
 거기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지오'라고 부르는 이 진실옹호자 소녀에게 절대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버린 것.

그러나, 그 순간부터 존은 '마리솔이 내 어깨 뒤에서 지켜보며 내 거짓말을 엿듣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 맹세가 아이러니하게도 존을 '진실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분노를 인정하고 고민하게 된 것이다.
또, 그는 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스스로를 모르게 된다.
그저 '슬프면서도 희망적인 뭔가가 슬그머니 내 안에 들어온 건 아닌지.(P.112)'하고 짐작할 뿐.

존에게 있어 '삶의 뮤즈'인 마리솔 또한 상처가 있다.
입양되어 양부모님께 지나치다 여겨질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매력만점에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소녀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친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커밍아웃을 하고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기억으로
누구에게도 온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마리솔은 존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그와 가까워지지만, 그의 '진심'은 그녀의 마음을 연다.

두 사람이 함께 진실을 마주한 날,
울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던 존은 눈물과 함께 사랑을 고백하고 마리솔은 상처입고 떠나버린다.
아슬아슬한 만큼 간절했던 사랑이 끝난 것 같은 그 순간, 존은 '우습게도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
'명랑해질 지경이었다. 어리석은 소리 같지만, 몇 년 동안 나는 달리기를 싫어하는 척하며 길 옆에 묶인 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본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나는 풀려났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마음껏 뛰어들어 경기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P.195)'
그렇게도 두려웠던 진실은 너무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존을 바꿔놓는다.
그리고, 존의 진심은 마리솔에게 자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용기를 준다.
스스로를 가둔 벽을 상징했던 존의 1인 잡지 <바나나 피시>의 열쇠는 '진실',
진짜 자신으로서 떠나기를 원했던 마리솔의 1인 잡지 <탈출 속도>의 열쇠는 '진심'이었던 셈이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사랑했어......
 넌 매일매일 내 인생을 바꿔 주었어.
 내 자신을 받아들이게 해 줬어......
 사랑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힘든 사랑이라고 해도......
 기적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은 것은 이것뿐.
 우리의 인생을 치료해 주는 사랑은 힘든 사랑이니까."

소설의 말미를 타고 흐르며 읽는 이의 마음에까지 들려오는 듯한 밥 프랑케의 노래 '힘든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답을 준다.
'이토록 끔찍한 고통 속에 던져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이 노래를 썼다.

누군가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다.(p.243)'
하고 깨닫는 존은 이미 우리가 처음 만났던 '존'이 아니다.
'진실이 될 수 없는 진심'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찢어놓지만,
그는 이제 둘 다를 찾기 시작했기에 삶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사랑'이 많아진다고 한다.
복잡하고 힘든 상황 무엇 하나 바뀐 것 없지만, 존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자기 삶의 '가해자'라고 여겼던 엄마의 괴로움을 들여다보고 위로하게 되는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그의 사랑이 진짜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야기를 읽는 내내, 존이 안쓰럽다가, 또 나 같았다가, 대견해졌다.
그리고, 내가 아직 '호되게 힘든 사랑'을 해 보지 못했구나 싶었다.
나 역시 달콤쌉싸름한 사랑들을 겪었고, 그 기적으로 이 순간까지 살아온 거겠지만
이 순간, 또 다음 순간에도 
힘든 사랑들을 기꺼이 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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