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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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초록 잎이 갈맷빛으로 물들어가는 5월 초부터 시작된 연휴를 즐기려는 차량 행렬은 열병식 하듯 이어진다. 고희를 넘은 어머니의 손을 덜어주기 위해 금요일 버스를 타고 고향 집을 찾았다. 유년시절부터 자라온 집은 세월 따라 퇴락하여 거미줄을 뒤집어쓰고 집 나간 이의 발길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녹차를 따야 하는 때면 잊지 않고 찾아온 방문객을 맞으며 사십 년 전의 기억 속 추억 한 방울 마음에 떨어뜨려 파란을 일으킨다. 저녁 설거지를 끝낸 밤 9, 서둘러 잠자리에 드는 것은 이튿날 일을 오롯이 행하려는 이유다.

 

   “일어나라. 동네 사람들 모두 밭으로 간다. 잠자러 왔나?”

    라는 어머니의 소리에 놀라 일어나면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지난밤 어슴푸레한 꿈 속 기억을 되뇌며 눈을 비비고 양치질한 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주먹밥과 간식·포대를 챙겨 일터로 향한다. 이슬 머금고 있는 찻잎을 따며 어머니와 그동안 품고 지냈던 일들을 주고받는다. 무한 재생되는 동네 어른들 이야기에 흥미는 가신 지 오래지만 홀로 일하는 어머니의 고독한 마음을 헤아리며 맞장구를 친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호응하는 일은 한 생명이 존재할 이유를 실어준다. 하나의 생명이 두 개의 생명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랑임을 일깨운다는 대목은 왠지 모를 공감 능력을 발현하며 사는 일에 인색한 것은 아닌지 반추한다.

 

   범죄자를 구금하는 물리적 공간인 교도소 생활은 바깥에 사는 이들에게는 착각을 일으키는 정치적 공간으로 속박 없이 살아갈 자유를 함의한다. 통혁당 사건으로 스무 해를 수감자로 살아온 저자는 그곳에서 만난 재소자들의 삶을 통해 견고한 관념의 틀을 깨고 교도소를 새로운 배움의 연장에 놓인 대학 생활로 여겼다. 사회의 모순 구조가 첨예하게 밀집된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이 쉽지 않았던 이유를 찾아 스스로 그들과 함께 지내려 저자는 결단을 내렸다. 일류대 최고의 학과에서 공부한 그의 이력은 재소자들과 함께 하는 작업장 일에서도 벽으로 작용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힘겹게 살았던 이들과 먹물 옷을 입은 지성인으로 대별된 그는 언어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검증받으려는 각오로 버림을 실천했다. 책을 통해 습득한 관념적 논리를 허물고 상대의 처지에 입각하여 인식을 정확히 하는 일에서부터 관계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과서적 범주를 벗어난 다양한 경험 속에 사회구조적 특성을 통찰하는 안목을 키우며 더불어 성장하는 길을 탐색하는 시기로 삼았던 대학 생활은 소외 계층과 연대하는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지향하였다. 1986년도에 대학에 입학하였을 당시 대학가는 군사독재 정권 퇴진을 위한 시위가 이어졌고, 대자보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던 사회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등을 모색하는 일로 촉발된 관심은 연대를 통한 시위 대열에 동참케 하였다. 평화적인 촛불행진의 원류로 삼을 1987년 유월 항쟁의 민심은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열기를 더하였다. 수레를 끌며 과일 행상하는 이는 서면 광장을 걷는 시위대를 응원하기 위해 과일을 나눠줬고, 인근의 병원 근무자들은 마스크를 나눠주었던 감동적인 장면은 30년이 다 되어가도지만 명징하게 떠오른다. 퇴근 후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여 민주화를 향해 결집된 열망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 조치 시행을 끌어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는 흐려져 부정, 부패는 만연해졌다.

 

   거대 자본의 바퀴에 물린 작은 바퀴를 열심히 돌려야 생존할 수 있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 경제적 자생력을 기르는 일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화폐 중심으로 치닫는 자본주의는 물질적 낭비와 인간적 낭비를 가속화하여 관계를 파탄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타인에게 물건을 팔아 이윤을 챙기기보다는 물건의 쓰임이 여럿에게 도움을 주고 환경에도 이로운지 살피는 노력은 관계를 살피어 정성을 다하는 모습으로 투영된다. 화폐를 통한 교환에만 비중을 두기보다는 가슴을 울리는 교감으로 남을 재화의 재구성으로 시장은 자리해야 한다. 피를 팔아 가족을 먹여 살리려던 젊은 청년은 식량을 마련하지 못할 때 가게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공생 관계를 떠올리는 구절에서는 타인을 고려하는 선량한 마음을 읽는다.

 

   질곡의 공간인 수감생활에서 만난 이들의 출소를 앞두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벌이는 송별식에서 유일하게 아는 노래인 시냇물을 불러 숙연한 분위기를 만든 일화는 목울대를 적신다.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는 노래를 들을 수도 없는 곳에서 20년을 보내고 출소하여 들은 노래를 들었을 때의 충격은 갇혀 지낸 시간의 강직이 순식간에 풀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무명의 껍데기를 벗고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과 맞닥뜨린 대학 생활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통찰하며 살아가야 할 당위성을 일깨워주었다. 학회 일을 함께 하며 크고 작은 일을 풀어가는 자리의 뒤풀이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는 양성우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이라는 곡목이었다. 애절하면서도 처연한 소리로 선창하면 하나둘 노래를 같이 불러 정의로운 세상을 구현하려는 의연한 가치를 추구하는 연대의 움직임은 커졌다. 누군가의 우산을 들어주는 것보다 그와 함께 비를 맞는 것이 진정한 도움임을 새기며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 아픔의 치유를 위한 실천은 작은 관심에서부터 촉발된다. 때 묻지 않은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여럿이 더불어 살아갈 세상을 바라며 생명체를 품고 살아갈 공생의 숲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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