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두 얼굴 -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
최광현 지음 / 부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며느리로 산 지 26년째이지만 설날 장만해야 할 음식을 꼽으며 장을 봐야 한다는 남편의 소리가 달갑지 않다. 이왕 할 거면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면 될 텐데도 아들 다섯 중 효심이 남다른 남편의 바람을 들어주는 데에도 한계에 직면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부엌에서 진종일 일할 생각을 하니 설 연휴 사나흘 전부터 과민해진 신경은 너울을 타고 감정의 파고를 넘나든다. 남편 역시 아내의 말에 발끈하며 응수하지만 지금껏 해온 게 있으니 뭐라 말은 못하고 다음 명절에는 나만 갈 테니 집에 그냥 있으라며 쐐기를 박는다. 시집와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공동체에 결속되어야 하지만 물에 기름처럼 융화하지 못한 채 겉도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가족 공동체와 분리되어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버지를 여의고 남매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친정어머니는 맏딸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생업에 종사하였다. 어려서부터 희생을 관행처럼 여기고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자아에 대한 애착이 생기면서 야속함과 서운함이 가슴속에 자리하였다. 장녀라는 이유로 희생양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논리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가족의 질서를 유지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가는 일을 미덕으로 받아들이며 상황에 순응하기를 강요한다. 남편 역시 홀로 지내는 여든 여덟의 노모의 손발로 살아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머님을 돌보는 일을 천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어 가정불화는 빈번했다. 넷째 아들이 곁에 없으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며 자식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어머님은 아들에게 의존하는 전형성을 띠고 그 아들은 어머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효자 아이콘으로 자리하니 풀기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마음속 깊은 상처로 남아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힘들게 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성년이 되어서도 쉽게 벗어나기 힘든 나락 속으로 밀어 넣는 경우가 흔하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기억은 채워지지 못한 사랑에 집착하며 건강한 삶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또 다른 불행을 초래하기도 한다. 불행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은 안데르센은 자신의 불행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작품에 내면을 투사하여 상처를 치유해 갔다. 내면에 직면하여 불행의 단초를 희망의 실마리로 풀어가는 열쇠로 패러다임을 전환해 갈 때 불행했던 경험의 굴레에서 벗어날 힘을 얻을 수 있다.


  속내를 드러내고 말을 하고 싶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이가 없어 고독함이 더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늉하면서 부모의 뜻을 관철하려고 해 말하기가 싫다며 말문을 닫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밖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말해보지만 쓸데없는 말 늘어놓지 말고 할 일이나 잘하라는 핀잔을 들으니 아이는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대학 신입생인 아들은 말해봤자 소통이 안 되니 말할 필요가 있겠냐며 푸념을 늘어놓을 때가 많은데 경청하는 공감적 듣기로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은 부모가 함께 개선해야 할 몫이다. 가족 내의 위계를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관행대로 움직이며 각자의 자리에 충실할 때 가정의 평화는 유지될 것이라는 환상 속에 사로잡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지내온 시간들이 회한을 낳는다.


  결혼한 부부 간에 보이지 않는 관계통장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는 척도로 작용할 수 있다는 보스조르메니 나지의 인상적인 이론은 입금과 출금의 선순환을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할 부분을 짚고 있다. 공평하게 주고받아 관계 통장에 잔고를 많이 쌓은 부부는 위기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낼 힘을 얻지만 일방적인 줌과 받음은 부부 간의 결속을 와해시킨다. 밖에서 안 좋은 일을 겪은 이가 가족에게 감정을 전이함으로써 분노를 사는 경우가 빈번하다. 가족 간 감정반사적인 행동이 자주 일어나기에 이런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이성적으로 통제하고 조절하는 자아분화의 발달로 불안감을 극복해 갈 때 가정 내의 긴장은 이완되고 갈등은 해소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