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어쩌면 가까이 - 슬픈 날에도 기쁜 날에도, 제주
허지숙 & 허지영 글.사진 / 허밍버드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바쁘게 움직이며 살던 친구는 에너지 고갈 상태라 재충전이 필요한데 빛의 속도로 움지깅며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고 하였다. 코발트 빛 바다와 달콤 쌉싸름한 추억을 몰고 오는 바람에 가슴 속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그만인 곳 제주도로 가자는 암묵적인 소통에 우리는 제주 공항에서 만나 사나흘 함께 지내기로 하였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이들도 하나 둘 곁을 떠나고 남아 있는 친구가 몇 안 되기에 그들과 교감하며 사는 일은 인생의 노년을 풍요롭게 보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가슴 속 이야기를 나누며 살 수 있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음을 잘 알기에 지금 곁에서 정성을 다하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며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수다를 늘어놓는 잦은 만남이 주는 공허함보다는 자주 보지는 못하여도 서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든든한 보호막이 내게도 필요했다.

   두모악 김영갑 갤러리를 찾아 생전 그가 담았던 제주의 풍광을 보면서 오름 하나하나의 가치가 새롭게 파고들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제주도 곳곳을 피사체에 담아 제주도의 속살들을 보여주었다.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제주도의 내밀함을 찾아 제주도를 찾는 이들에게 이국적인 풍광에 인생의 진솔함을 투사하여 고독을 상쇄하며 지냈던 그가 떠오른다. 또 하나의 사진첩을 발간한 허 자매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공부를 하러 제주도를 떠났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제주도에 살면서 사계절마다 다른 빛깔로 손짓하는 제주도를 담았다. 일상적인 공간이 색다른 의미로 창조되는 시간은 너와 나가 우리로 연대하여 소통하고 교감하는 순간이었다.

보리밭 사이를 걸어가는 자매의 치맛자락이 나풀거릴 때마다 제주도 생활의 이야기는 도르래에 감긴 실이 풀리듯 간결한 문장에 녹아 흐른다.

   제주에 정착한 이들은 예술적 심미안을 바탕으로 재능을 발휘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함께 하는 일상을 피사체에 담아 제주도를 드러냈다. 가만히 있어도 좋을 공간 제주도이지만 외지인들에게는 특별한 공간으로 비춰지는 제주도의 속살들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곳으로 가고 싶은 열망을 더한다. 사계절 내내 다채로운 색과 문양으로 신비로움을 더하는 공간 제주도를 다녀온 이들이라면 느긋하게 움직이며 천혜의 자연과 함께 하는 자매의 일상이 부러움으로 차오를 정도다. 올레 길을 걷는 이가 늘어나서인지 구석구석에 들어선 게스트 하우스와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 이색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비축하며 지내기에는 제주도만한 곳이 없어 보인다.

    제주의 자연을 사랑하고 시간이 깃든 오래 된 물건을 각별히 아끼고 소중히 여기던 엄마의 감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딸들은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며 풍광 속에 주인공으로 자리하여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여행 중에 만난 벨기에 청년과 함께 일몰이 아름다운 수월봉을 찾았고 미래의 이상형을 만나 바닷가에서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연출하며 상상 속 아이디어를 재현한 일은 통념을 부수는 행동 중 하나로 신선함을 더했다. 화산 폭발 때 날아온 화산재가 겹겹이 쌓인 화산쇄설층은 폭발의 격렬함을 가늠하기에 충분한 줄무늬로 새겨져 있었다. 동백 언덕으로 불리는 카멜리아 힐의 수국 동산은 남다른 매력을 주는 청초함으로 가득했다.

    여름에 제주도를 여행했을 때 대지의 열기와 인파에서 묻어나는 열기로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 떠올라 여름 여행은 꺼리기 일쑤인데 사려니 숲길, 삼다수 목장, 마방목지 등을 구경하기에 좋은 516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라면 마음이 달라질 것 같다.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장마는 제주의 고독과 처연함이 공존하는 때로 호젓한 묘미를 즐길 수 있다니 이 무렵 제주를 찾았을 때 장마를 만나더라도 불평은 잠재워 둘 일이다. 가을에는 오름을 오르며 오름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곁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겨울이면 온 세상을 순백으로 뒤덮어 이색적인 절경을 선사하는 제주도의 산은 경이로움 속에 태곳적 비밀을 간직한 듯한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다.

   새해 벽두 돈내코에서 영실로 내려오는 한라산을 오르며 헛디뎌 실족할까 봐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디디며 걸었던 눈길 산행은 지금도 선연하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하였던 특별한 산행은 정신을 한군데 모아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뚜렷한 성취감을 주었고 어던 일이든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귤 수확이 한창인 때는 농가를 찾아 귤 따는 일을 도우며 제주도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한 방에서 모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도 따사롭게 전해진다. 숫자 49가 들어가는 날이면 제주 오일장은 갖가지 명물들로 전을 벌이니 장날 제주도 전통 장 구경에 나서서 색다른 즐거움에 빠져들고 싶다. 미처 가보지 못하였던 곳을 향해 하늘을 가르고 비행하는 물체에 동경하는 마음을 담는 길에 자매의 사진 속 일상이 융해되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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