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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다상담 3 - 소비·가면·늙음·꿈·종교와 죽음 편 ㅣ 강신주의 다상담 3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12월
평점 :
온라인 쇼핑이 늘면서 택배물이 밀려들 때에는 하루에도 서너 박스가 도착하여 주변인들의 시선을 의식할 때가 있다. 클릭으로 물건을 구매하다 보니 언제 어떤 상품을 주문했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어 소비를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쉽게 재화를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을 들어 필요 이상의 상품을 구매한다. 벌어온 만큼 쓰게 되어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듯 소비함으로써 주인으로 자리하는 즐거움에 빠져 수중에 남는 것 없이 돈을 쓸 때가 있다. 힘들게 번 돈을 너무 쉽게 소비하는 노동자는 돈을 쓸 때만큼은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고 주인이 되고 싶다는 유혹에 소비 욕망이 커진다는 저자의 말은 계획 없이 소비하여왔던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돈을 쓰면서 얻은 일시적인 자유와 기쁨에 계속 일함으로써 돈을 벌고 다시 소비하는 순환의 고리를 끓기 위해 소비하는 자유 대신 긍정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정체성 있는 자신으로 설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의 집어등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욕구를 충족시키고 불만을 해소하는 소비는 찰나의 행복을 주고 회한을 남기는 지출일 뿐 본질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새기며 소비지향적인 생활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면서 다른 것을 요구하는 일은 상대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도움을 줬다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조언하였고, 소비를 일삼아도 행복하지 않아 고민인 내담자에게는 소비 목록 리스트를 작성할 것을 당부했다. 자본을 가진 이가 우월함을 보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본주의를 회복하는 길은 자기 가족 중심의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대로 살아갈 때 점진적으로 나아질 수 있음을 되새긴다.
싱그러운 나이 팔딱거리는 생명력으로 거리를 활보할 때는 맨얼굴로 나섰다는 자각도 잊은 채 목적지로 향하였다. 나이 들어 주름이 잡히고 얼굴에 잡티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며 진솔함을 감추고 위장술을 펼치고 사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싫은 내색 없이 모임에 참석하였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싫어도 함께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나란 존재에 대한 환멸은 커져갔고 급기야는 내면의 소리에 따라 움직이며 스트레스를 줄여갈 수 있었다. 약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사는 우리들은 상황에 순응하면서도 때에 따라서는 가면을 벗고 맨얼굴로 지낼 때가 있다. 가면과 맨얼굴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과의 상담 시간이 무르익어갈수록 가면을 벗지 못한 채 살아가는 약자들의 아픔은 깊은 상처를 드러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과 감정을 검열하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삶을 사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는 게 잘사는 것처럼 보인다.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는 관계에서 맺고 있어야 가치 있다는 구절에서처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인 친구나 애인 앞에서는 가면을 벗고 맨얼굴로 대했을 때만이 그 관계는 지속되고 두터워질 것이다.
40대 후반의 나이 흔들림 없이 포용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부는 바람에 가슴이 저리고 내리는 빗소리는 가슴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적신다. 갱년기 증상을 호소하며 일상을 보내기 힘들다는 친구들의 하소연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육신을 마주하는 일은 서글픈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은이는 노동자와 소비자로서 각광을 받게 되지만 늙은이는 이용 가치가 떨어지는 퇴물로 전락하여 존재감을 상실한 채 생존하는 이로 비춰지기 때문에 늙음을 피하고 싶은 욕구는 커진다. 나이 듦을 배척하는 시류가 팽배해질수록 늙음에 대한 공포가 늘어나는 점을 이용하여 부가적인 이익을 남기려는 자본가들은 안티 에이징 열풍을 초래하였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사실에서 비껴날 수 없는 우리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자연스레 노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정해진 궤도를 걷다가도 돌연한 일들을 겪으며 체득한 생명력은 완숙함을 배태한 만큼 나이 듦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거두고 당당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 하나만 있어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꿈은 없어야 한다.’
꿈을 화제로 삼은 저자는 꿈이 없어야 한다니 의아스러운 마음으로 행간을 좇아 읽어갔다. 큰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여기며 꿈 없이 지내는 아이들을 한심하게 여기며 질책해왔는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꿈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말에는 미래를 걱정하거나 미래의 일을 당겨 백일몽을 꾸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재적 삶을 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꿈을 설정하고 실현하려는 목적에서 스스로를 옥죄며 현재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유예하고 버거운 일상을 잇는 일에서 탈피하여 현실을 향유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 현재에 몰두하여 행복했던 경험이 하루하루 쌓여 일생을 이룬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내일만을 염두에 두느라 현재적 삶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적당히 즐기며 살고 싶은 한량의 꿈을 가지고 있는 이에게는 고독을 다반사로 끼고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지 생각의 물꼬를 터갔다. 공부를 잘하면 꿈을 이루며 살 가능성이 높다는 교육 체제에 반하는 강의를 접하면서 현재를 향유하는 자신과 대면할 때 현실에서 실현시켜야 할 꿈이 의지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중년의 고향 친구들 문자 메시지 중 대부분은 직계존속의 부음을 전하며 발인 일을 적은 근조(謹弔) 안내다.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사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이 지내다 노년에 병을 얻어 자리보전하고 있다가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애도받기보다는 이승에서 더 이상 고생하지 않고 잘 돌아가셨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3인칭으로 객관화하여 문상을 하다 보니 조문객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을 불러 모아 되새기는 추억의 마당에서 놀음을 즐기는 무례함도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부재하는 현실에서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를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음을 후회하며 비통해하는 시적화자의 절규가 김소월의 ‘초혼(招魂)’ 시에는 나온다. 죽은 사람을 2인칭 ‘너’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상대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에 고통을 느낀다. 저자는 사랑하는 너를 잃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종교로 위로받으려는 행동은 유치한 일로 치부하며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사랑의 상실과 결여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고 종교에 빠지게 된다는 점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만족도를 높여 갈 때 불행한 일들을 견디며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