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구멍 난 주머니를 차고 끝없는 욕심을 채우며 바동거리며 살아가느라 지난한 삶을 보낸 이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오는 날 진초록으로 뒤덮인 산길을 오르며 위로를 받는다. 그동안 일상에 매여 사느라 떠나보낸 시간들이 기억 속 심연에 자리하여 머리를 내밀고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선택적인 출생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회인으로 자리하며 살아오는 동안 한 개인이 겪는 일상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면서도 개인이 처란 상황에 따라 특별함이 곳곳에 끼어들어 일생의 한 축을 이루기도 한다. 닉 애덤스는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인디언 여인의 분만 현장에 동행했다가 제왕절개로 태어난 생명의 신비에 전율하기보다는 또 다른 생명의 죽음으로 혼란을 겼어야 했다. 질병의 고통 속에 놓인 아이 아버지는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고 살아남은 자는 생로병사의 멍에를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였다. 누군가는 새롭게 태어나 삶의 길 위에 섰고 어떤 이는 목숨을 끊고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일련의 상황은 현실의 고락(苦樂)을 일깨운다.

   만년설로 뒤덮인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의 서쪽 봉우리에는 얼어붙은 표범 한 마리의 시체가 있다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표범이 무엇을 찾아 험난한 길에 들어섰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많은 이들이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찾아 킬리만자로를 동경하며 그곳으로 향하는지도 모른다. 순백으로 오점을 뒤덮어 정화하는 정념의 끝자락 자연의 장엄함 앞에 한없이 미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절감하며 발길을 돌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을 갈망하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서는 이들에게 아프리카 여행은 원시 본연의 생명을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비춰진다. 작가 해리는 아프리카여행에서 사냥하던 중 부상을 입고 다리가 썩어 들어가 감각마저 느끼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의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이의 고통에 좌절하여 삶의 희망까지 저버린 해리에게 곧 치료를 받으면 건강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소귀에 경 읽기에 지나지 않았다.  다리가 썩어 들어가 그의 목숨을 갉아먹는 형벌을 수용함으로써 그는 숙명적인 죽음을 통해 허무한 인생을 갈무리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짐 지워진 의무를 뒤로 하고 자연 속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며 살아가는 일은 소소한 즐거움을 선물한다. 낚싯대를 들고 강으로 내려가 메뚜기를 미끼로 송어를 낚는 닉은 혼자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유영하는 송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물고기를 낚으며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즐겼다. 궤도를 이탈해 살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살면서도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채 일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이들에게 닉의 모습은 부러움을 더한다. 작은 송어보다는 크고 멋진 송어를 낚기 위해 힘을 적절히 조율하느라 골몰하던 그가 낚은 고기는 성취욕의 산물로 집중이 낳은 선물이었다. 얕은 물에 사는 작은 송어는 그의 관심 밖이었고, 그는 큰 송어를 낚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다. 블랙 강에서 놀며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여행 중에 만난 진지한 친구를 그 후로는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그는 홉킨스를 추억하며 가슴에 품고 불행과 슬픔을 녹여내는 위로제로 삼아 현재적 삶을 살아갔다.

   예기치 않은 전쟁은 기존의 관계가 배태하는 삶의 균형을 깨고 상흔을 남긴 채 일상을 파괴하여 치유하기 힘든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적 고통을 낳을 때가 있다. ‘이제 내 몸을 뉘며’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아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쉬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에 내면의 무료함과 답답함을 씻어내리며 전쟁의 공포에서 비껴날 수 있었다. 냇물을 보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지금껏 알고 있던 냇물과 다른 점을 들추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무미건조한 전선에서 찰나나마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애잔함이 더했다. 극도로 예민한 신경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장교와 결별하며 기쁨을 토로하는 주인공은 전선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 때문에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목숨처럼 걸고 지키고 싶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천하는 열정을 거두고 적대시하며 목숨을 걸고 싸워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과는 괴리되는 일들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자행하는 야욕의 시대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묻어난다. 통치하거나 통치할 수밖에 없는 전쟁과는 다른 길을 찾고 싶어 하였던 닉은 쉽사리 도달하기 힘든 ‘가지 못할 길’을 향해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싶은 열망으로 길을 나섰다. 가지 않은 길로 나섰다가 길을 잃고 떠나왔던 길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의무가 지워지더라................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랑하던 여자 친구를 떠나보내고 괴로워하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며 사냥감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을 정도로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긴다. 거센 바람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파편들을 거두어 갔다며 새로운 희망으로 달뜬 닉은 ‘사흘 간의 바람’에 여과 없이 드러난다. 닉은 심드렁한 모습으로 여자 친구를 떠나보내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낚싯대를 들고 나서는 광경은 ‘어떤 일의 끝’이 끝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일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원천임을 일깨운다. 카페에 밤늦게까지 앉아 있고 싶어 하는 웨이터는 잠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인 노인의 태도를 수용하며 젊음과 자신감으로 일을 해나가는 젊은이를 부러워하며 밤이 이울도록 카페 안을 환히 비추고 싶은 소망을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에 담았다. 어둠과 밝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하는 공생체로 어둠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음울함이 엄습하기를 거부하는 자기만의 저항 방법으로 불을 환히 밝혀 둔 것이리라.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만큼 행복의 조건을 충족하려는 일련의 활동으로 기운이 빠지는 일상을 반복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목표물을 설정해 두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제대로 한번 쉬어보지도 못하고 안달재신하며 지냈던 삶은 회한을 낳아 가던 길을 멈추고 걸어 온 길을 돌아보게 한다. 자신이 걸어 온 만큼 인생이라는 말이 예삿말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경험은 개인의 의미 있는 역사를 이루는 순간이기도 하다. 직업 사냥꾼 윌슨과는 달리 사냥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프랜시스 머콤버는 사냥감의 어느 부위를 맞추어야 포획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공포가 자리하여 실천에 제약이 따랐다. 머콤버는 우여곡절 끝에 사자를 맞히었지만 치명상을 입지 않은 사자는 사위어가는 목숨의 끈을 부여잡고 총기를 든 인간들에 맞서 사력을 다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달한 짐승이 끝까지 버티며 목숨을 지키려는 몸부림에 공포를 느낀 머콤버는 주춤하며 돌아섰고, 차에서 남편의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전문 사냥꾼 윌슨은 노련함으로 포획물을 손에 넣은 뒤 머콤버는 위축되어 갔지만 물소 사냥에 성공한 그는 지금껏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두려움을 극복하여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세 마리의 물소를 잡았다고 안도하고 있던 찰나 달아나던 사자처럼 총알을 몸에 박고 숲으로 달아난 덩치가 크고 멋진 물소를 찾아 나섰던 그들을 향해 물소는 반격하여 긴장감이 더했다. 물소가 사냥꾼을 해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든 아내는 물소를 향해 쏜다는 게 그만 남편의 머리를 쏴 그를 죽음으로 몰고 말았다.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은 성취감으로 희열에 감돌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못한 채 그의 짧은 생은 마감되었다.

    태어난 뭇 생명들은 영생 불멸의 꿈을 꾸기도 하지만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죽음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서서 생을 마감하는 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고군분투하며 지내느라 자연을 찾아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성찰할 기회를 내지 못한 채 지낼 때가 많다.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가야 할지 가늠키 힘든 상황에서 자연적 흐름의 수용은 닉이 냇물을 찾아 걸었던 것처럼 짙게 깔린 음울함을 걷어내는 길 위에서 의미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송어를 낚으며 아픈 상처를 치유하던 닉이 가슴이 시키는 일을 좇아 살아가던 궤도를 이탈한 것처럼 영혼의 울림에 몸을 맡기고 진정성 있는 행복을 찾아 나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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