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무선)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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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리를 걸어 다니며 등하교를 도맡아 했던 초등학교 시절 차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일이 작은 바람 중 하나였다.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 근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멍게처럼 울퉁불퉁한 길을 바로 펴 비포장도로를 확장하는 공사가 강가에서부터 동네 앞까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하릴없이 섬진강 가를 돌며 공사판 주변을 기웃거리다 차를 태워주는 아저씨의 큰 트럭에 올라 앉아서는 놀이공원이라도 온 것처럼 부풀어 올라 즐거워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흙을 운반하는 큰 차에 낑낑거리며 올라 타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속력을내며 달리기 시작하면 그동안 가슴 속에 품었던 작은 꿈을 실현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중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의 우악스러움과는 대별되는 자애로운 기사 아저씨는 새참으로 얻은 빵을 내게 건네고는, 맛있게 빵을 먹는 가무잡잡한 소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하였다.  그 당시 가정 사정으로 딸과 멀리 떨어져 생활하느라 만날 수는 없지만 딸을 보듯 어린 소녀를 귀애하며 아껴줬다. 30년이 훌쩍 흘러 기억 속 아저씨 얼굴은 가물가물해졌지만 어디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소식이 궁금하고, 보름달 빵을 전해 주던 아저씨의 따스한 손길이 그리워진다.

 


   타인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유대하며 존재감을 확인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바람대로 쉽게 되지 않는 인생이 많다는 것을 절감할 때가 있다. 7년 전 채 여물기도 전에 동화작가 등단이라는 열매를 거둬들인 오명랑은 이내 무명작가로 전락하여 침체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진정한 작가는 고독한 것이라고 가족들에게 항변해 보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스스로 위축되어 대안을 찾아야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작가는 기거하는 집에 ‘이야기 듣기 교실’을 개설하고 1개월 무료 수강으로 회원들을 모집하였지만 회원 수는 세 명으로 정해졌다. 영어 학원에 가는 대신 우회하여 들른 종원, 그 동생 소원, 동화작가를 꿈꾸는 나경이를 두고 작가는 꼭 들려 줄 이야기가 있다며 말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작가는 ‘그리운 건널목 씨’ 이야기가 실화인지 허구인지 알아맞히라는 수행 과제를 아이들에게 제시하며 아련한 향수 속에 자리하고 있는 건널목 씨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파트 후문 앞  2차선 도로에는 건널목이 없어 통행할 때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통행에 불편을 느꼈던 이들은 구청에 건널목을 세워달라고 민원을 제기하여 봤지만 성사되지 않아 통행할 때의 안전사고의 위험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 사실을 목도한 허름한 행색에 정체 모를 남자는 배낭에 넣어 둔 카펫을 꺼내 들고는 그것을 아파트 앞 도로에 건널목이 그려진 카펫을 펼쳐놓고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교통 지도를 시작하였다.  이동식 건널목을 따라 아이들이 안전하게 지나가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건널목 씨’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경계를 풀고는 비어 있는 경비실에 방을 꾸미고 아저씨와 이웃처럼 지내게 되었다.  말없이 아파트를 청소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그를 아파트 주민들은 좋아하였다.  거널목 아저씨는 쌍둥이 자식을 교통사고로 잃고 다른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허한 마음을 달래며 자신이 받은 상처를 타인에게 나눔으로써 부재(不在)의 아픔을 극복하여 왔다.

 


   폭력이 난무하는 가정의 자녀들은 또 다른 마음의 상처를 안고 가슴에 큰 멍에를 진 채 살아간다.  일시적이나마 폭력을 피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아저씨가 기거하는 경비실이었다. 건널목이 없어 통행에 위험이 따랐던 도로에 건널목을 서게 하여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한 것처럼 아저씨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약한 자들을 감싸 안아 그들을 도왔다. 건널목 아저씨는 돈을 벌어 집칸이라도 마련하겠다고 집을 나간 어머니대신 태희, 태석이를 돌보았고,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찾아 온 도희의 주린 배를 따끈한 라면으로 달래 줬다.  이야기가 정점을 향해 치달을수록 눈치 빠른 아이들은 그 내용이 실화에 바탕을 둔 것이었음을 알아차리고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어린 시절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던 작가는 그녀의 가족들까지 도와 준 아저씨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어린 제자들에게 이야기로 들려 줬다.

 


  ‘불안했던 가정이 제자리를 찾을 기미가 보이자 자신의 일은 끝났다는 듯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 건널목 아저씨는 건널목이 필요한 곳에 이동식 건널목을 펼치고는 교통지도를 하고 있을까?’
   보호자 없이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져 안개 자욱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준 건널목 아저씨는 항로를 이탈하지 않도록 비춰주는 등대처럼 자리했다.  규격화된 삶 속에 평준화된 삶을 거부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길을 떠나고 있을 것만 같은 아저씨가 자꾸만 그리워진다.  어쩌면 그것은 각박한 시대에 자애로운 모습으로 인정을 베풀며 사는 이를 그리워하는 방증인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에게 안전한 건널목이 되어 그 사람이 지금의 아픔을 삭일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은 건널목 아저씨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하루가 다르게 나무들은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고 햇살 아래 빛을 발산하며 싱그러움을 더하는 5월,  맑고 밝은 영혼으로 세상을 환히 비추는 건널목 아저씨가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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