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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아이들 -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 이야기 ㅣ 문학동네 청소년 8
박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 …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빈방에서 훌쩍거리며 행상을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의 애처로운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생계를 전담하는 엄마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인의 소년 시절의 슬픔을 담은 ‘엄마 걱정’에는 고스란히 배어 있다. 돌아 올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의 고독과 두려움은 엄마가 제자리로 돌아옴으로써 스러져버리겠지만 기약 없이 떠나버린 엄마를 그리워하며 지내야 하는 만주족 아이들의 일상은 참담함에 쓸쓸함을 더할 듯하다. <<만주의 아이들>>은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뒤 조선족 학교 기숙사에서 단체 생활하며 가슴에 상처를 안고 외롭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만나 취재한 기록을 현장의 목소리로 르포 형식에 담았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만주에 사는 조선족들에게도 ‘한국 바람, 간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다는 명분을 내세워 돈을 벌기 위해 한국을 찾는 부모가 늘어났다. 친척집에 맡겨지거나 오갈 데가 없는 아이들은 조선족 학교의 기숙사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견디고 어린 나이에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법을 체득할 수밖에 없다. 비자 연장을 위해 잠시 들른 부모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기는커녕 성적 향상여부부터 물어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종종 있다. 얼굴도 잘 생가나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며 고통 속에 나날을 보냈을 아이들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 줄 사람은 부모일진대 자본을 축적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부모들이 자식들의 마음을 헤아릴 만한 여유는 없어 보인다.
"엄마가 한국에 나간 뒤부터 무섭단 말임다. 저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봐설랑 쪼매 아꼬망, 한국은 절대 안심할 나라가 아이잖습네까. 이혼을 마치 금메달 따는 대회처럼 한단 말임다."(44쪽)
이혼율이 급증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익히 알고 있는 아이는 가정 붕괴와 해체로 외톨이로 남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강을 건너는 시련을 예상하고 그것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혼·결손 가정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심양시의 한 중학교 교장은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남아 달라는 간곡한 메시지를 전했다니 조선족 가정의 위기는 수위를 넘어 서 보인다.
광활한 만주 벌판에 정착하여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던 조선족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어른들의 선택으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점점 민족성까지 잃어가는 모습을 보는 듯해 안타까움이 더한다. 동북아 공정의 일환으로 조선어 사용 금지를 내세워 중국어 사용을 강요하는데다 점점 빠져나가는 학생들로 운영마저 힘든 조선족 학교의 실태를 엿보며 점점 자본에 잠식당하는 민족이 위태로워 보인다. 부모에게 버림 받은 상처의 골이 깊어갈수록 치유 불가능한 마음의 병을 안고 사는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잘못된 길을 걸을까 염려스럽기도 했다. 고모가 있어 다행스러운 효범이는 학업이 우수해야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며 스스로 무장하여 자기 방어책을 찾아가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조선족 자치주 주도인 연길시는 조선족 고유의 문화를 지켜가는 모습과는 괴리된 가족 윤리 붕괴와 성 도덕의 문란이 가중되어 이혼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으로 나가는 비행 청소년 같은 어른들이 많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미혜의 말은 지금 조선족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지금 곁에 있는 소중한 것을 돌보기보다는 물질적 재화를 얻기 위해 낯익은 곳을 벗어나 허영을 충족하려는 움직임은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한국행을 돕는 브로커가 야욕을 앞세워 사기 행각을 벌이고, 한국행 비자를 얻기 위해 사기 결혼을 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 한 가정을 파탄 내는 일들을 보면서 인간의 본지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목단강 4층 합숙소에는 부모를 멀리 떠나보낸 아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전기장판이라도 틀아 추위를 녹이고 방과 후 학습으로 배움의 길을 열어 갈 수 있다는 데 위안을 삼으며 지내고 있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살 길이 막막해 지자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시집 온 엄마는 지금 학교 급식소에서 일을 하며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있어 적이 안심이 된다. 여느 때와는 달리 자율학습 감독을 마치고 늦게 돌아 온 엄마를 보고는 보고 싶었다며 달려 와서는 안기는 아들을 보면서 엄마 얼굴도 잘 기억 못한다는 조선족 아이들의 얼굴이 생각나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자신의 선택 의지와는 달리 돈을 벌기 위해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길을 떠난 엄마를 기다리다 그리움만 가슴에 켜켜이 쌓아두고 지내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생일날 엄마가 끓여 준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어린 소년의 말은 고통 받는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길은 사랑의 힘을 보태는 일밖에 없을 듯하다. 가정이 흔들리면 다른 상부 조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들이 한탕주의로 흘러 돈의 하수인으로 살기보다는 근원적인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대안을 세워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생활을 지원하여 자력갱생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