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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주경철 지음 / 사계절 / 2009년 12월
평점 :
낡은 사진첩을 들추며 추억 속 아련한 향기를 맡으며 깨알 같은 글씨로 새겨 놓은 시간 속에는 앳된 소녀 시절의 역사가 담겨 있다. 가끔은 사진을 붙이고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나만의 기록물로 남겨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일을 서슴지 않을 때도 있었다. 크고 작은 시대적 경험 속에 융해된 감수성은 서정 시인으로 변모해 어쭙잖은 글을 남기며 개인의 역사를 창조해 갔다. 일반적으로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며 남긴 흔적을 되짚어 보며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객관화된 사실 중심의 사건을 따라잡기에도 힘겨웠다. 이름부터 낯선 정체불명의 나라의 지명과 정치가들의 이름을 외우기에도 버거웠던 세계사 시간은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수업 시간 중 하나로 자리한다. 하지만 세계사를 공부하는 시간에 문학 작품을 펴 두고 학문 간 소통하는 시대적 배경과 인물을 둘러싼 맥락을 꿰뚫어 토론하며 재해석한 책,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는 어렵다고만 여겼던 세계의 역사를 쉽게 풀어 줬다. 지난 시대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며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정서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연구는 문학 작품과 역사적 사실을 아우르고 있다.
부조리하고 불온한 시대일수록 부정적 상황은 도처에서 벌어져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키고 그 일에 연루된 이들이 희생되고 마는 일들을 역사 속에 보아 왔다. 그럴 때마다 문학은 시대적 아픔을 작품 속에 용해해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 뿐 아니라 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통찰력을 키워줬다. 현명한 노예 이솝은 당대에서 중시하던 도덕적 덕목을 우화 형식에 담아 넌지시 알려 주던 <<이솝 우화>>를 통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문학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통시적 고찰 아래 놓인 역사적 배경이 문학 속에 깃들어 있는 부분을 간명히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귀결하는 글은 균형 감각을 더한다. 피는 피를 부른다는 말처럼 원시적 복수의 연쇄를 끊고 공적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신과 인간 모두 법질서를 지켜야 함을 정당화한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는 그리스 시대 절대적 규칙을 정했던 역사의 이면을 가늠케 한다.
상상력으로써 인간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문학에 여러 유형으로 나타나는 사랑은 행복한 삶을 사는 인간의 일상에 촉매로 작용한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트리스탄과 이즈의 곡진한 사랑은 중세의 봉건적인 인습을 뛰어넘은 사랑의 힘으로 비춰진다. 14세기 흑사병 창궐로 수많은 이들이 맥없이 스러져 갈 때 피렌체 양갓집 남녀 10명이 흑사병을 피해 간 곳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열흘 동안 내놓은 이야기를 묶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탐구서가 되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휘둘릴 수도 있는 인간이지만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지혜 속에 스스로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하는지 답을 주고 있다. 개선 가능성이 없는 심각한 사회 모순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 혁명을 초래한, 푸시킨의 <<대위의 딸>>은 농민들의 처참한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왔지만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고는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한 나폴레옹의 억압을 불러왔다. 힘과 권력으로 여성들 위에 군림하며 여성들에게 자아를 말살토록 강요하던 영국 사회의 남성적 시각을 개선하여야 함을 <<코린나>>에서 넌지시 밝히고 있다. 국가를 대리하여 해외 사업을 수행한 사업가로 민족적 영웅으로 떠오른 초기의 해적이 제국주의자로 변신해 이민족을 침략해 보물을 빼앗아 부를 쌓는 소년의 이야기인 스티븐슨의 <<보물섬>>은 해군 제독이 된 해적 드레이크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국가로부터 적으로 취급받으면서도 문명 세계를 등지고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대해 깊은 성찰을 담았다. 미군이 멕시코를 공격해 전쟁을 일으킨 사실에 반대하며 양심대로 살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깨끗하고 소박한 삶을 이어 왔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과 만나 서면의 극장에서 봤던 영화,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이 연출한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연기 속에 숨어 있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상대를 죽여야 이기는 전쟁과 홀로고스트로 불리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잔혹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을 넘어 아들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이 달달하게 녹아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경험을 담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는 생명 연장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느라 절대 고독에 시달리며 공포에 떨었던 시간을 작품 속에 반영하여 후세인들에게 반성의 시간을 준다. 히틀러를 위시한 우월주의에 젖어 광기어린 탄압을 해 온 독일인들의 잔혹한 학살을 쥐에 담은 만화는 진실 너머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미국 경제가 대공황을 겪던 시절 극심한 가뭄과 농업구조의 변화로 땅을 잃고 서부로 이주해 간 소작농들의 삶을 다른 작품,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생명체가 공존하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피를 팔아 한 가족을 부양하는 허 삼관의 눈물겨운 삶을 다룬, 위화의 <<허 삼관 매혈기>>는 문화 대혁명을 살아 온 가장의 슬픈 인생은 자신의 기(氣)를 빼내서 가족을 살리는 끈끈한 사랑 아래 버티고 서 있는 책임감이 눈물겹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로 발전적인 미래를 위한 지평을 열어나가는 길에, 문학은 역사적 사건을 작품 속에 발현하여 보편성을 얻어 생명력을 더하고 있다. 지금은 실존하지 않지만 살아 온 자들이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현재를 반성하고 내일을 구상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문학 작품은 영향을 끼친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후 많은 상처를 입은 프랑스 국민들이 한 민족의 노예가 되더라도 모국어를 간직하는 한 정신까지 앗아갈 수 없다는 점을 담은 <<마지막 수업>>은 패권주의에 물들어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가는 청소년들에게 삶의 좌표가 될 듯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삶의 주체로 우뚝 서기 위해 과거의 모든 일은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해야 할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