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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의 방 ㅣ 푸른도서관 41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는 어린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며 지내야 했다.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어쨌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엄마는 여성이라는 삶의 고리를 끊고서라도 살아가야 했다. 돌배기 아들과 다섯 살 어린 딸을 위해서라도 이를 앙다물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계절마다 행상을 나간 엄마가 오지로 떠돌 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사나흘이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말을 잘 안 듣는 손녀에게 엄마가 도망가서 다시는 안 돌아온다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행여 할머니 말을 잘 안 듣고 있으면 엄마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할머니 말은 손녀를 점점 순응적인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생명체의 죽음은 한 가정의 기틀을 무너뜨려 결핍으로 잇게 하여 상처 입은 가슴에 흉을 남기는 사례가 많다. 철이 들기도 전에 맞닥뜨린 부모님의 부재는 어린 소녀가 떠안고 살아가기에는 족쇄를 채우고 걷는 것처럼 힘겨울 것이다. 아들의 돌연한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할머니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할 며느리에 대한 연민보다는 자식을 앗아간 장본인으로 낙인을 찍고는 며느리 스스로 집을 떠나는 순으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영문도 모른 채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소희는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가슴 속 한 마당에서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자리했다. 할머니를 의지하며 살던 소희에게 천수를 누리고 간 할머니의 죽음은 친척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으면서 지내야 했다.
달밭마을을 떠나던 날 소희는 그곳에서 두터운 정을 나누며 친하게 지낸 바우와 미르를 먼저 버리고 소중히 여겼던 일기장을 함께 버렸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사실 중 하나가 눈치를 보면서 지내게 된다는 점이다. 소희는 사촌들과 함께 생활하며 학업성적이 뛰어나도 기뻐하기는커녕 식구들 눈치를 봐야 했고, 숙모가 운영 중인 미용실 바닥의 머리카락을 쓸며 애어른이 되어 갔다. 삼촌 집을 나와 엄마가 사는 곳으로 거처를 옮길 때 아기 때 헤어진 엄마를 만나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도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십 수 년이 지난 세월의 간극이 빚은 틈새를 메워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리해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냉랭한 어조로 우진이와 우혁이를 우리 애들로 명명하며 자신과는 선을 긋는 엄마를 볼 때 소희는 가슴 속 큰 짐을 안고 지내야 했다.
아저씨 딸 리나가 머무르다 미국을 가버린 곳에 가방을 푼 소희는 자신만의 자율성이 확보되는 공간에서 정소희, 윤소희를 떠나 오롯이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 소희는 이전의 무상 급식 대상자라는 연민의 시선과 함께 감내해야 했던 모멸감, 수치심에서 벗어나 엄친아의 가면을 쓰고 살아갔다. 소희는 영화감상 반에서 활동하며 진솔한 모습으로 적극적인 생활을 잇는 채경,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힘겹게 생활하면서도 영화감독을 꿈꾸는 지훈과 정을 나누며 그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빚는 외로움을 상쇄해 나갔다. 소희는 차갑게 대하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바라는 모범생에서 점점 비껴나 자기감정에 충실한 열다섯 살 소녀로 존재해 나갔다. 엄마가 사다 준 비싼 옷보다는 아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고는 그동안 가슴 속에 재워 둔 말을 하나씩 꺼내며 자신에게 냉담했던 엄마와 마음의 문을 열어 대화하며 소통해 갔다.
자신의 본질을 숨기고 과거의 윤소희와는 단절한 채 살아가던 정소희는 디졸브로 활동하는 재서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며 위로받고 적절한 조언으로 생활의 변화를 이끌어 갔다. 처음부터 소희가 어떤 아이였는지 알고 있던 재서에게 자신의 치부를 다 틀어넣고 만 듯해 그를 대하기 힘들기도 했지만 서서히 둘의 관계는 회복해 간다. 아저씨의 달 리나가 스물이 되어 다시 집을 찾았을 때의 서먹서먹함이 애틋한 동질감으로 화해 갔듯이 소희는 찬란함 뒤에 숨겨진 초라함을 끌어안으며 하늘을 쳐다보며 꿋꿋이 살아가는 하늘말나리라처럼 성장해 갈 것이다. 소희가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달밭마을의 느티나무가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히 살아나 무성한 잎을 달고 한여름 시원한 그늘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듯 사랑을 베풀며 자신의 본질을 깨우쳐 가리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