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리멸렬한 삶의 현장 속으로

  생계를 위해 여러 곳을 떠돌던 엄마를 대신해 하루하루 때를 끓이며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다음 날 공부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중시되었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릴 때면 회한으로 가득해진다. 빨리 어른이 되어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아궁이와는 결별하고 싶은 소망이 앞섰던지 때 이른 유학으로 도회에서 생활하며 지내는 행운을 맞게 되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고 행하지 못할 게 없어 의기보다는 객기로 충만했던 20대 청춘시절을 추억해 본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만족하기보다는 가지 못한 길을 동경하며 돌파구를 찾아 방황을 일삼으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하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고 살던 그 시절 때때로 내 마음이 내 안에 있지 않고 주변을 맴돌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배회할 때가 더 많았다.

일기장에 아름다운 문구를 적어 넣던 소녀 수경은 사라지고 기득권자에게 종속된 채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여 오로지 참아내는 것만으로 시간을 소진하며 지내왔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이 로봇이라고 주장하는 낯선 남자의 집요한 접근에 자리를 함께 하여 그가 말하는 로봇 3원칙을 들었다. 수경은 그와 만나 대화하며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며 찰나지만 카타르시스를 맛봤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서 생애 최고의 희열을 느낀 수경은 그를 사랑하기에 모든 걸 잃어도 좋다고 말하는 순간 남자는 떠나 버린다. 로봇 3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스스로를 지킨다는 조항을 들어 수경을 떠나간 사내는 서로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사랑하며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녀를 떠났는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복종하는 것은 나의 운명.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기쁨. 그러나 그것이 당신을 해치는 것이라면 따를 수가 없습니다. 안녕, 내 사랑’으로 결별을 선언하였다. 사장의 욕망을 배설하는 성적 대상에서 벗어나 사랑의 본질을 조금 알아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갈 수도 있는 상황에 수경은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가정을 이루고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해가는 중에도 가끔씩 떠오르는 상대의 이름을 검색해 볼 때가 있다.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서서는 외로워도 혼자 꿋꿋이 잘 버텨낼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가슴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아련한 추억 속에 떠오르는 인물을 검색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아내는 일쯤은 손쉬워 진 정보혁명 시대의 위력을 새삼 깨닫는다. 한선은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여자 친구 수진과 헤어진 뒤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는 계륵(鷄肋)이야기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는 돌연 수진에게 결혼 전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하고는 수진의 집 앞에서 그녀를 납치하듯 차에 태우고 동해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뜻밖의 테러를 당하고 민다. 응급조치를 취하던 구급대원이 수진에게 보호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서울로 회귀하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지금 곁에 있는 이에게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면서도 가끔은 옛 사랑을 그리워하며 한 번쯤은 그 시절로 돌아가 연인처럼 교감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시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 벌어진 틈새를 메우기도 힘들 정도로 어긋나 있을 때가 많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변성기를 겪으며 미성(美聲)을 선물 받은 소년은 직업 가수로 무대를 발판으로 성공적인 삶을 열어갈 것처럼 비춰졌다. 노래로 청중을 사로잡는 힘을 지닌 그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가끔은 아무런 노력 없이 성장과정을 겪으며 덤으로 얻게 된 목소리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생각이 부정을 낳았는지 그는 목소리를 잃게 되고 입을 벌린 채로 죽어 있던 악어를 발견하였다. 악어 농장을 구경해 본 사람들은 낚싯대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를 향해 입을 쩍쩍 벌리며 달려드는 악어를 봤을 것이다. 그 역시 먹잇감을 향해 이 무대 저 무대를 전전하며 정체성을 찾기도 전에 소진해 가버린 우울한 이들의 자화상을 투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폭력으로 이지러진 삶 속에서 피어나는 슬픔의 변주곡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골든 벨 프로를 보면서 서로 문제를 듣고 정답을 맞히겠다며 너스레를 떨 때가 종종 있다. 정답을 맞히게 되면 왠지 모를 의기양양함은 승자를 우대하는 풍토에서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찰나의 행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퀴즈쇼>의 은이는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묻지 마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한순간에 맞닥뜨린 부모와 동생의 죽음은 그녀를 공황장애로 몰고 갔다. 그동안 성실히 살아 온 부모님이 남긴 재산의 유일한 상속녀로 스무 살이면 그 유산을 자신의 명의로 돌릴 수 있는 수혜자이기에 더더욱 세상 사람들을 믿고 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점점 위축되어 가던 은이가 찾은 성당의 수녀는 공포에 굴복하지 말고 공포에 맞서 이겨나가야 한다며 그녀가 퀴즈쇼에 출연할 수 있게 했다. 마침내 그녀는 퀴즈쇼에서 옛 중학 동기를 만나 그동안 겪은 일들을 털어놓으며 또 다른 인연의 끈을 이어 외로움을 탈피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다. 지금껏 타인을 믿지 못한 채 말문을 닫아버렸던 그녀가 동국과 소통하며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일의 전조로 비춰진다.

 

 

  서로 사랑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부부이지만 본질적인 희구(希求)와 사랑에는 무관심한 이들이 부부라는 무늬로 여러 빛깔로 수를 놓으며 살아가는 삶인지도 모른다. 칠월 칠석 은하수 건너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단 한번 만나는 날처럼 낯선 땅에서 옛사랑을 우연히 만나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가는 <밀회>에서는 중년의 삶에 묻어 있는 고단한 삶의 돌파구를 그려내고 있다. 그녀가 독일로 이주한 것은 남편이 ‘카푸그라증후군’이라는 특이한 뇌질환을 앓고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증상을 보여 평범한 삶의 행복을 맛보며 살기에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매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찾는 주인공은 그 때마다 한번은 그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돌아가지만 그녀가 안고 있는 숙명 같은 과제를 나눌 수 없는 처지에 안타까움만 더했을 듯하다. 그녀가 자신을 찾는 날 쿵쾅거리는 소리에 달뜬 마음으로 쾌감에 젖은 채로 죽어가던 주인공은 혼미해진 의식을 부여안고 그녀의 비통한 울음을 애도의 소리로 받아들이며 밀회를 끝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짝사랑은 돈이 안 들어 경제적이라지만 혹독한 열병을 앓아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상실과 열패감보다 더 가혹한 실연을 주는 일임을 잘 안다. 마코토는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소수자로 고독을 견디며 지낼 때 사랑의 주파수를 높이고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이를 당할 재간이 없어 보인다. 한국 유학생 마코토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현주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 했던 주인공은 긴자 커피숍에서 그를 만나 유학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일을 아느냐고 물으며 뜻 모를 키스로 의식을 치렀다. 키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할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시간에 충실할 뿐이었다. 잃어버린 짝사랑의 실체를 만나 그 사랑을 확인시키려는 의도성이 강하게 배인 행위로 그동안 거세당한 마음을 보상 받으려는 듯 마코토가 이끄는 대로 그녀는 몰입할 뿐이었다.

아득해지는 감각 속에서 내 영혼이 마치 잘 맞는 야구공처럼 펜스 너머 저 광대한 우주로, 하나의 작음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암전. (137쪽)

 

 



  화장기 없는 뽀얀 피부가 뭇사람들의 로망으로 떠오르는 요즘 피부과 창구 직원의 곱고 아름다운 피부는 그 병원의 기대지수를 충족시키기에 안성맞춤일 듯하다. 하지만 고운 피부를 지녔던 여자의 피부 트러블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기적 욕망 앞에 굴복하고 만 스물한 살의 앳된 여인의 비통함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에 씁쓸함이 더하다. 의고소침하게 지내던 이가 술기운을 빌려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오늘의 커피> 에서는 커피의 쌉쌀하면서도 코끝에 스미는 짙은 향기가 주변을 맴 돌아 감정의 파고를 넘나듦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투영하는 듯하다.

 

 
 

그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상이 심드렁해질 때면 늘 새로운 변화를 찾아 또 다른 길을 찾을 때가 있다. 성실한 삶을 살다가도 요행을 바라며 백일몽을 꿈꿀 때 그 순간만이라도 쾌감에 젖어 행복함을 맛보고 싶어할 때가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기저에 강하게 깔릴 때면 망상에 가까운 희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낱개로 포장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까먹으며 더위와 지금의 신산함을 벗어나려 하지만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규와 혜선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름 냄새가 난다는 점에 착안해 소비자 고발센터에 전화를 걸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 보지만 돌아온 것은 참담함 뿐이었다. 담당자가 두고 간 초콜릿을 들고는 미츠 값의 열 배라고 위안을 삼으려 하지만 실상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비웃는 웃음만으로 퀘퀘한 방안을 가득 채웠을 뿐이다.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로 시작하는 형사 조의 일상을 추적하며 그의 내밀한 생각을 양파 껍질 벗기듯이 하나하나 드러내기 시작한다. 백화점 순찰을 돌며 범죄를 막는 일에 솔선해야 할 주인공은 그보다 눈에 들어오는 백화점 여직원들이 주된 관심사로 비춰진다. 반 지하에 살면서도 프라다 정장을 입는 화장품 판매원, 성실하게 일하는 구두 매장의 김, 점점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려 힘들게 살아가는 시계 매장 정의 움직임과 생각을 좇기에 조는 바쁘다. 그 중에서도 구정물 속의 연꽃으로 화한 정을 볼 때마다 조는 연민의 정을 느끼며 지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좀도둑을 사랑한다는 조는 도둑들의 장물(臟物)을 맡아서는 임의로 처리할 때가 있었다. 장물인 불가리 시계를 정에게 부치고 그 사실이 부메랑이 되어 조는 구치소에 감금된다.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귀한 정에 대한 애정이 이지러진 선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욕망에서 기인했던 것일까? 조에게는 마음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한 때는 즐거움을 주고 허황된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던 일들이 사라지고 현실을 직시하게 된 조는 벌을 받으며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될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또 다른 희망을 꿈꾸며

 

  6년 만에 출간한 소설집 속 13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현대인들의 다양한 삶 속으로 들어가 내면을 뚫어보는 즐거움이 무엇보다 컸다. 하지만 즐거움 속에만 침잠할 수 없었던 것은 희망적인 내용보다는 절망적인 아픔과 불행한 우리들의 모습이 용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젖은 우산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젖은 우산을 탈탈 털어 빠르게 건조시킬 수도 있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음을 살아가면서 새삼 느끼게 된다. 상대적으로 소설 속 아바타는 또 다른 현대인의 얼굴로 가슴 속에 남아 좀 더 진실한 삶을 살아 진한 울림을 주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라고 당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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