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역사다 - 한국 영화로 탐험하는 근현대사
강성률 지음 / 살림터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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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벽한 남단의 섬마을에는 영화관이 없어 영화를 보려면 인근 도시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이 따르기에 학생들은 불법으로 영화를 다운로드해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저작권을 보호해야 영화인들이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을 놓치지 않는다. 기말 고사를 치르고 난 뒤 방학을 며칠 앞둔 2007년 여름 노는 토요일 희망 학생들과 함께 화려한 휴가를 단체 관람하고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나와 슬픔을 진정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93년에 출생한 딸아이 또래들은 죄 없는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잔혹하게 사살할 수 있는지 납득하기 힘들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국사 책에서 간단히 언급되었던 광주 민주 항쟁을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겨 왔을 뿐인데 영화를 보니 5.18 광주 항쟁이 왜 일어났는지 점점 궁금해지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 간 이들에 대한 처벌이 따르지 않은 점을 의아스럽게 여기는 눈치였다. 군사들의 총칼 아래 처참하게 스러져 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피해자의 슬픔에 남은 자의 슬픔이 더해진 듯하다. ‘영화는 역사다’라는 책을 읽으며 날카로운 관찰력과 분석적 통찰력으로 영화를 읽어가는 행간을 좇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자의 글에 빠져들고 만다.  

  지나 온 시간을 기록하여 후대에 본보기를 보이려던 뜻에 사관들은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그들만의 사료를 정리해 나갔다. 때로는 삼엄한 경계 속에 시류에 영합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지만 과거의 기록이 남아 있기에 새로운 비전을 품고 질적인 발전을 이뤄가는 토대를 마련해 가는 길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특정 시기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제작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점만 보더라도 과거는 사장되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영화평론가인 저자는 특정한 시대의 소재를 연출 모티브로 삼아 극적인 사건으로 재해석하는 영화감독의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기억해야 할 부분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위 연결 선상에서 영화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 지를 궁구하여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았다.
 

  역사와 영화의 문제는 해석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이념적인 문제까지 결부지어 영화감독의 역할에 대해 영화를 예로 들어 시대적 흐름 속에 그것을 적절히 융해하여 분석했다. 그의 역할이 특정 시기를 영화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과거 속의 사건이지만 새롭게 인식하려는 관객들의 의중을 간파한 감독은 그들과 소통하려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있었다. 1903년에 영화 상영이 보편화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는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 세계적인 영화제에서도 한국 영화의 권위를 인정받으며 발전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처참한 현실을 폭로하여 풍자하고 외압에 저항하기보다는 신파에 젖어 망국의 현실을 잊으려 했다. 1920년 당시에는 경술국치와 삼일 운동의 실패로 허무주의에 젖은 민족 정서를 영화에 담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조선 영화계에 충격적이었다. 카프 계열의 감독이 만든 작품은 일제의 검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와 해방 후 정부의 억압에 맞서 저항하며 <유랑>, <화륜> 등의 영화를 통해 이상적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해방과 분단을 겪으며 파란 많은 시대의 우울한 모습은 전후(戰後)의 폐허 위에서 국민들의 오락물로 영화는 자리를 잡아 갔다. 다소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어 영화의 황금기를 맞기도 했지만 군부독재 시대를 맞아 영화법을 새롭게 정하여 반공을 국시로 삼던 시절에는 반공 영화 제작을 재촉하였다. 영화를 문화 예술로 여기지도 않던 신군부 시대를 겪으며 암흑기였던 한국 영화도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통해 검열의 철폐 등을 끌어내 뚜렷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위안부 여성들의 비극적 삶을 재조명한 <낮은 목소리1~2>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의 싸움의 정당성을 밝히는 가운데 할머니들의 인간적인 모습까지 전하며 관객들과 교감하였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한 위안부 할머니의 고단한 삶과 소송 과정을 다뤘지만 향후 뚜렷한 성과가 없어 아쉬움이 더했다. 이에 글쓴이는 과거 청산의지가 부족한 정부의 안이한 태도까지 꼬집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은 4•3항쟁에서부터 전면적으로 확대된 한국전쟁이 야기한 분단은 빨치산, 이산가족, 비전향 장기수, 조총련의 삶까지 영화 속에 그려냈다. 이범선 원작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오발탄>은 분단이 초래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빚어낸 인간의 황폐화와 가정 해체는 분단의 그림자를 반영하고 있다. 냉전 시대를 방불케 하는 분단 고착화는 국책 대결의 수단에서부터 민중의 절절한 현실 속 아픔, 형제애 등을 영화 속에서 다양하게 다루며 분단이 진행형인 시대를 평화적으로 극복해야 함을 넌지시 알리고 있다. 4•3항쟁의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의 아픔을 재확인하며 제주도민들의 무참한 학살을 자행한 세력에 대한 응징이 채 이뤄지지 않아 미완의 과제로 남은 사건을 <끝나지 않은 세월>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고백을 담았다. 

  분단으로 가족의 생사도 모르고 지내던 이산가족 상봉이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울고 불며 매달리는 그들을 보면서 분단을 극복하여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반세기가 넘는 분단 고착화는 개인의 정서까지 이질화해 생각의 간극이 커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모습을 일으켜 만남 자체가 또 하나의 문제를 파생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서는 헤어진 자매가 서로를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감정의 간극이 빚어낸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정부의 노력이 요구됨을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 이 시대까지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현 사회의 모순점을 고발하여 풍자하고 있다. <백색인>은 현 사회의 계급 문제를, <지리멸렬>은 지배층의 모순된 모습을, <살인의 추억>은 군부정권의 허상을 꼬집고 있다. 이처럼 영화는 역사와 무관하게 존재하기보다는 시대적 흐름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역사다'를 통해 저자는 과거든 현재든 우리 역사에 대한 감독의 독특한 시각과 해석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보았다. 과거는 현재의 필요에 의해 Fact+Fiction으로 재구성해 스크린으로 담을 수 있는 과거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이재수의 난' '웰컴 투 동막골' '피아골' '태백산맥'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화려한 휴가’등은 비극적 현대사를 다루고 있지만 각 사건을 조명하는 감독들의 시각과 해석에는 차이가 드러났다. 몰락한 좌익 집안에서 태어나 갖은 고생을 하다 충무로에서 영화 생활을 시작해 굴지의 영화감독으로 점점 사라져 가는 우리 민족의 전통을 영화 속에 불러내 교감하고 그것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음을 프레임에 담았다. 임순례 감독은 무한 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양적인 팽창을 위해 질주하는 2000년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흥미롭게 변주하여 점점 행복과는 거리가 먼 현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화를 관객들이 보고 소통해 나갈 때 독특한 시각을 담은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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