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시, 우리
진성림 지음 / 지식과감성#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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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가혹하고도 절박한 생존의 무게는 가족 간에 따스한 사랑을 주고받는 법 대신, 서로가 알아서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사는 방식을 가르쳤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생존 방식으로 얼룩진 유년 시절이었지만, 다행히 학창 시절 만난 다정한 선생님의 진심 어린 보살핌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비록 서툴렀을지라도 사랑받고 자라는 삶이 무엇인지 그 온기를 가르쳐 준 소중한 기억이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우며 주변 어른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성인이 된 이후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는 여전히 젬병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타인의 연애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가슴 한구석에서 설렘과 알 수 없는 회한이 동시에 밀려들곤 한다. 연인들이 겪어내는 아찔한 설렘과 다가올 이별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을 멀리서 관조하며, 내가 감히 가보지 못한 길을 아득하게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상처와 두려움이라는 나름의 방어기제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듯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서도 깊게 투영된다. 의사 성림의 삶 역시 온전한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저는 무너지기 전에 일단 버팁니다.”

  라는 성림의 고백처럼, 그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거대한 책무 앞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지면서도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는 지독하리만치 인색하다. 그는 감정이 개입되기 전에 철저히 구조를 읽어내고, 상황을 파악한 뒤에는 냉정하게 거리를 조절하는 변호사 슬기를 환자로 만났다. 슬기 역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허락해 생활의 리듬이 흐트러지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사랑에 먼저 마음을 기울이면 더 크게 다칠 것이라는 방어기제 때문에 의사를 향해 자꾸만 향하는 마음을 억지로 붙잡았지만, 이미 가슴이 행하는 일은 이성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겼어.”

  성림과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불안감과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슬기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고, 종국에는 이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슬기는 성림과 이별한 뒤 오히려 그를 더 깊이 떠올리며 그리움에 몸서리친다. 누군가 자신의 방식을 조금이라도 지적하는 순간 가시를 세우며 공격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태도는, 평범한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에 치명적인 걸림돌이었다. 감정에 달떠 한때의 불꽃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호흡 속에서 꾸준히 사랑하는 태도를 유지하며 누군가와 함께 보폭을 맞추는 일에는 깊은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

성림은 슬기와의 어긋난 인연으로 깊은 상심을 겪으면서도, 상대를 자신의 욕망이나 두려움의 잣대로 함부로 해석하지 않고 끝까지 냉철함과 품위를 유지한다. 마치 인생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듯, 그에게 또 다른 결의 인물인 정원이 다가온다. 형사 사건 관련 자문회의로 병원을 찾은 정원은, 성림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의 깊은 피로와 고립감을 먼저 알아차리고 조용히 온기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말 없는 고요 속에서도 좋아하는 감정의 거대한 파란이 일렁였을지라도 이를 경솔하게 내색하지 않은 채,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덜 무너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관지 내시경 시술로 호흡기 중환자를 살려내는 임상적 역량이 뛰어난 성림이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과호흡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을 때 그의 곁을 묵묵히 지킨 이는 다름 아닌 정원이었다. 그녀는 그 위급한 아픔의 순간에, 이 사람을 잃어버리면 나 역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정원은 여전히 성림을 깊이 연모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슬기가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스스로 물러서는 길을 택한다. 상대를 향한 연정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삶 전체를 송두리째 붙들어 매어둘 수 없다는 성숙한 자각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의 곁에 더 오래 머물수록 성림이 느껴야 할 미안함이 가중될 것을 알기에, 그를 사랑하였지만 다가설 수 없었다.

  “늦어도 돼, 근데 혼자 울게 두지는 않을 거야.”

  재엽이 건넨 한마디는 정원의 가슴속에 뚜렷한 파문을 일으키며 꽂혔다. 그는 정원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존재함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화려하게 앞세워 밀어붙이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만의 호흡으로 기다리는 사랑의 방식을 택했다. 공연장으로 와 달라는 재엽의 요청을 수락한 정원은, 비록 상처와 아픔이 남았을지라도 이제는 자기만의 속도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참된 사랑이란, 내가 나약해지고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 끝까지 나의 곁을 지키며 함께 서 있어 주는 것이다.

의사로서 성림은 오직 환자의 상태와 병증만을 바라보며 진료하는 소신을 지켰고, 의료계와 자본의 권력이 결탁한 눈치를 보지 않은 채 십자성 전자 측의 부당한 비공개 진료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거대 기업의 평판을 흔들어 성림을 압박하려는 악성 글이 난무하여 법정 다툼으로까지 비화했다. 돈과 권력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의료진까지 어떻게 포섭하고 짓누르려 하는지 그 추악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성림은 음흉한 소문의 진상을 낱낱이 규명하고 다시는 이런 부조리가 재발하지 않도록 법적 방패 역할을 자처한 정원에게 미안함을 느꼈지만,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성림의 시련을 관조하던 슬기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대의 상태보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과 방어적인 감정 선을 먼저 살피며 도망치듯 살았다. 사랑에 눈을 뜬 그녀는 병원을 묵묵히 지키며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성림을 진심으로 배려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까지 깊이 들여다보며 진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슬기의 모습은 뼈아픈 성장의 기록이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을 향한 일방적이고 강렬한 감정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한 십자성 전자 회장의 긴급한 치료를 위해 병원 측은 기관지 내시경 시술의 권위자인 성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만성적인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는 회장을 살려내면 다행이겠지만, 환자를 살리지 못할 경우 의사 개인이 감내해야 할 사회적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성림은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쓴 채 시술을 감행했다. 보수적 상식에 안주하지 않은 과감하고도 소신 있는 치료 덕분에 성림은 회장의 목숨을 극적으로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성림의 환자 구명 행위가 현행 의료법의 엄격한 잣대에 가로막혀 형사처벌 위기에 처하는 부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맞서 변호인 정원은 응급 환자의 생명이 위급할 때 예외적 진료가 가능한 조항들을 치밀하게 파고들며 성림의 입장을 완벽하게 변론하였다. 정원의 정의롭고 적법한 변론 덕분에 기각 판결이 났으나, 성림은 오랜 친구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십자성 전자의 해외 비자금 흐름, 정치권 로비 자금, 의료계를 향한 협박 자료, 그리고 차명 법인 거래의 모든 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USB를 반환하지 않은 채 진실을 파헤치려 했기 때문이다.

  성림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끝내 먼저 다가서지 못하고 물러남으로써 자신의 자존과 영혼을 지키려 했던 슬기는, 자신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정원을 보며 미묘한 질시와 두려움을 느꼈다. 정작 자기를 향한 마음을 먼저 솔직하게 꺼내는 순간 한없이 약해질까 봐 염려하며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으로만 세상을 살아왔던 슬기였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혼자서 견디는 생존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발맞추어 세상의 풍파 앞에 당당히 서는 것임을 소설은 넌지시 일깨운다.

   사랑은 상처와 결핍으로 얼룩진 각자의 삶에서 도망치거나 숨는 대신, 불완전한 서로의 손을 잡고 다시 관계의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일이다. 과거의 상처가 남긴 회한과 이별의 두려움을 넘어, 서로의 부족한 모서리를 깎아내지 않고 그 존재 자체를 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로 거듭날 수 있다. 슬기와 성림이 거리를 두고 각자의 시간을 예비하는 기간은 인연의 실타래를 찾는 여정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건네는 안부로

  다시 함께 나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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