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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대화를 통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며 관계를 형성하지만, 때로는 의도치 않은 오해로 그 관계가 파국에 이르기도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말처럼, 표현되지 않은 타인의 마음을 읽는 일은 어쩌면 왜곡된 오역을 전제로 하는 위험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화자(나)가 독서 교사로 방문한 오언의 집에서 목격한 풍경은 잔혹하고 섬뜩하다. 곤죽이 되어 널브러진 거구의 사내 앞에서, 오언은 아가씨에게 그의 속마음을 읽으라고 명령한다. 화자는 보스의 여자인 ‘아가씨’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입주 튜터로 고용되었지만,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고 그 속을 읽어내라는 보스의 기이한 요구에 의문을 품는다.
아가씨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다. 보육원 시절, 성적 학대를 가하던 노인의 팔을 물어 뜯으며 흐르는 피를 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읽게 된 것이다. 당시 오언의 중개로 훈방된 그녀는 자활을 꿈꿨으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취업 사기와 학대 속에서 재회한 그는 그녀를 구원하는 듯했으나, 결국 비상구 없는 저택에 가두고 통제한다. 그녀에게는 삶을 결정할 선택권이 없었다.
오언은 아가씨의 능력을 잔혹하게 이용한다. 그는 아가씨 앞에서 자신의 신체를 칼로 긋고는, 핏자국 선연한 상처를 통해 자신의 진심이 읽히기를 갈구한다. 그는 아가씨를 위해 선생님을 고용하고 값비싼 옷을 사주지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결핍으로 점철된 인간이다. 자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그의 갈구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는 그의 마음 읽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아가씨를 향한 오언은 마음은 커졌고, 그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둘은 비극을 마주하였다. 탈출을 도왔던 기타 선생님은 죽음을 맞이하고, 아가씨가 절망의 수렁에 빠졌을 때 남편의 죽음을 파헤치려는 화자(나)가 등장한다. 거액을 들여 잠입한 화자가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를 징계하려는 대목은 이 소설의 강렬한 반전이다.
화자는 아가씨를 인질로 삼아 오언에게 운전대를 잡게 한다. 햄릿의 대사를 인용하며 죽음을 예견한 그는 결국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상처를 통한 일방적 소통이 아닌, 처음으로 '말'이라는 수단을 택해 아가씨에게 진심을 전한다. 그것은 어쩌면 평생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오언의 죽음 이후, 화자는 "상처를 입히지 않고 인생을 살기는 어렵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아가씨를 다시 찾는다. 아가씨는 이제 타인의 피 고름을 통해 생각을 읽던 과거에서 벗어나, 성당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 종속된 삶의 상징이었던 저택을 벗어나 딸기 무늬 손수건을 품고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비극을 통과한 인간이 비로소 피워낸 능동적인 인생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