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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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리를 걸어 중학교를 다니던 소녀는 중년에 이르러 부음 문자가 일상이 되어버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양원에서 생의 끝을 기다리며 연명하던 부모들의 죽음, 암 투병 중인 친구의 죽음, 아침에 나갔다 사고를 당한 지인의 죽음, 사춘기 열병을 혹독하게 앓던 학생의 극단적인 선택 등 다양한 죽음이 도처에 자리한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에서 자유롭지 않은 유한한 인생임을 알면서도 죽음이 나와는 거리가 멀게 여기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현재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제목은 유미가 재준에게 건네 준 파란 일기장 첫 장에 적힌 문구이다. 생각지도 않은 날, 막역하게 지낸 친구의 존재가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려 만날 수도 없다면 그 상실감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절망적일 것이다.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을 하지 않아 그다지 친하게 지낸 친구는 아니지만 트로트를 구성지게 잘 불러 목소리로 남아 있는 친구가 고 1때 세상을 떠났다. 밤에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다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났다. 재준이 짝사랑하는 소희에게 폼 나게 보이고 싶어 오토바이 운전에 도전한 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소심한 재준은 한 사람의 행동이나 양태를 보고 성급하게 일반화하여 매도하는 담임을 향해 주장의 부당함을 말하는 유미의 당당함에 끌려 그녀와 친하게 지낸다. 자신이 갖지 못한 부분을 가진 유미의 적극성에 친구를 요청하여 둘은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며 든든한 버팀목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칭찬하며 지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뤄진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유미처럼 부모와 자식의 삶을 객관화하여 거리를 두는 경우도 있다. 새아빠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으며 감사함을 느끼고 도움을 전해야 할 때면 의붓동생을 챙기는 유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가정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살아온 문화가 달라서인지 부모마다 자식을 교육하는 데 이견이 팽배하지만, 부모들보다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일한 듯하다. 재준의 아버지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자식을 대하며 훈계를 빙자한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지만 재준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대신 상처를 택한다.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배우 채플린을 좋아하여 희극 배유를 꿈꾸지만 학교생활은 젬병이라 위축되어 지내기 일쑤다. 재준의 엄마는 천식을 앓고 있는데 자식이 속을 썩이면 병이 도져 어쩔 도리 없이 재준은 부모의 명에 복종하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소심하게 행동하던 재준이 시체놀이만큼은 독보적으로 잘하여 주변인들을 깜짝 속게 하는 능력은 출중하였다.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연출하며 주변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던 재준이 오토바이를 타고 속력을 내다 하늘로 붕 떠올랐다 주검으로 돌아왔다. 죽음을 소재로 노랫말을 적어 재준에게 평을 바라는 문자를 보낸 것이 마지막 문자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유미는 파란 일기장 속 민낯을 드러내고 있는 재준의 마음을 읽는다. 쉽지 않은 용기로 오토바이를 타고 소희에게 멋진 남자로 인식되고 싶은 바람이 큰 그의 생각을 보며 유미는 재준이 그토록 좋아한 소희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해 볼 것이 많은 나이 열여섯 살에 재준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자신이 이렇게 일찍 생을 마감할 줄 알고 살아있는 지금에 충실한 삶을 보내자고 다짐하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내가 죽는다고 여기며 유언을 작성한 뒤 촛불을 켜두고 유언장을 돌아가며 읽을 때의 추억이 떠오른다. 유언장을 읽어 내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눈물은 곡성으로 변하여 더 이상 유언장을 읽을 생각은 접고 서로를 끌어안던 기억이 난다. 고작 열여섯에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재준이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지 가늠조차 힘들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구석구석에 자리하여 평온한 일상의 흐름을 깬다. 돌연한 사고와 죽음은 여럿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며 쉽지 않은 길을 걷게 한다. 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는지 잘 모르기에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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