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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ㅣ 열림원 세계문학 1
헤르만 헤세 지음, 김연신 옮김 / 열림원 / 2023년 7월
평점 :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누르며 살아온 시간들이 다양한 얼굴로 늘어선다. 집안 살림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아동기를 보내며 해야 할 일이 많은 집을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가족을 위하여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보냈다. 조금만 참고 지내다 보면 후미진 부엌에서 매캐한 연기와 함께 보낸 시절을 보상받으리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도맡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부엌살림을 도우며 할머니를 봉양하는 일은 맏딸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 시절 동네 언니 집에서 빌린 데미안 소설 속 주인공은 뭐 그리도 생각이 많은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고 지난시절에 만난 싱클레어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치기어린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비춰졌다.
40년이 흘러 중2학생들과 만나 함께 데미안을 읽으며 그 시절 이해하지 못하였던 싱클레어의 행동이 조금씩 가슴에 와 닿는다. 따스한 가정에서 착하게 살아가던 싱클레어는 저지르지도 않은 도둑질을 거짓으로 말한 탓에 크로머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 헤어나기 힘든 시련에 부딪혔다. 어느 날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데미안은 독심술 같은 지혜로운 판단으로 시련에 빠진 크로머를 구해준다. 이를 계기로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예속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극복하여 일상의 균형을 찾고 안정에 이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정결함과 안온함이 가득한 가정에 기대어 살던 싱클레어에게 데미안과의 만남은 기존의 틀을 깨고, 관념의 성을 파괴하며 오직 나 자신에게 이르기 위한 걸음을 떼게 하였다. 허용된 밝은 세계에서는 은폐해야 하는 원시적 충동을 느낄 때마다 자신 속에 살고 있는 내적 욕구를 보아야 했다. 밝은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를 인식한 싱클레어는 금기된 성적 욕망,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교리 공부 등으로 내면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한편, 데미안은 성서 이야기를 달리 해석하여 싱클레어에게 다른 세계를 들려주며 관점을 달리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통찰하여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기를 바라며 생각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이끌었다.
내면의 선악 사이에서 고뇌하던 싱클레어는 꿈 속 영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내면의 욕구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자신을 규정하던 세계를 떨쳐냈다. 그는 문장에 새겨진 새와 한눈에 반한 베아트리체를 그리며 내면의 유혹을 달래려 하였다. 쾌락적 욕구를 이기지 못한 채 거리로 나가 금지된 영역의 유희를 탐할 때도 있지만 그는 베아트리체를 그리면서 조금씩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갔다. 싱클레어가 그린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는 데미안을 닮았던 만큼 그가 데미안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은 커 보인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새처럼 싱클레어는 관념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며 감정의 기복을 넘어 자신을 객관화하며 오롯한 나로 살아가는 데에는 인생의 스승이 자리한다. 자식이 잘못을 고백하였을 때, 자식을 토닥이며 위로하고 새롭게 살아갈 힘을 주는 어머니는 에바 부인으로 나타난다. 싱클레어에게 선한 영향을 준 데미안 못지않게 데미안의 어머니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발견케 한다. 성장 과정에서 겪는 시련을 감내하고 극복하여 환골탈태한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는 삶을 배격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