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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평점 :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군담 소설 ‘박씨전’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가공의 인물인, 이시백의 아내 박 씨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여 청나라 장수인 용골대의 항복을 받아내 병자호란의 굴욕적인 패배를 심리적으로나마 보상하고 있다. 실상으로는 병자호란 당시 많은 인명 피해를 보고 청나라의 경제적 피탈로 우리 백성들은 극심한 고단함과 배고픔을 견디며 수렁에 갇혀 지내야 했다. 굴하지 않는 마음으로 꺾이지 않는 기개로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고자 한 작품 창작 의도와는 달리 반정으로 정권을 약탈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심이 지나친 인조에 대한 분노가 들끓어 오른다. 저자는 ‘인조(仁祖) 1636’에서 무능한 지도자의 그릇된 인식과 판단이 엄청난 전쟁 원인을 제공한 도화선이 되었음을 사료(史料)를 기반으로 밝힌다.
조선·청·명 세 나라가 읽힌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하는 전쟁은 복합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왕의 권한은 무소불휘의 힘을 갖고 있기에 정통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반정으로 왕좌에 오른 인조는 권력 유지를 위한 세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청나라 황제로부터 정묘호란 후 청나라는 무리한 경제적 조공을 요구하며 명나라를 치는데 협조해주기를 강요하고 있다. 인조 정권은 적의 외침에 방어 전략을 펴는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한 채 왕위를 공고히 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강화로 향하는 길, 김경징은 강화 검찰사라는 중임을 졌으면서도 국가의 위급함을 생각지 않고 그의 처자식만 보호하려고 하니 나랏일이 걱정된다는 말이 지척에 오갈 정도였으니 사사로운 이익을 중시하는 관리의 표본을 드러낸다. 김류는 그의 아들 김경징을 강화 검찰사에 앉혀 가문을 지키려는 욕심은 능력이 안 되는 아들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인물에 대한 능력 검증도 없이 김류의 청을 받아들인 인조 역시 강화 함락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청군이 강화에 들이닥치자 강화 검찰사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산속으로 달아나버리자 청군 방어에 나섰던 군사들 또한 달아나버려 청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육하였다. 청군에게 살육당하기 전에 자결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피바다를 이룬 강화의 인권 유린의 현장인 셈이다.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한다.’
로 시작하는 청 태종의 조유문 12개 조항 끄트머리에 적힌 -국가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를 생각하라-는 구절에서는 조선을 청나라 속국으로 여기는 태도를 자명하게 드러낸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로 항복 의식을 치른 뒤 청 태종의 수하에 들어갔음을 공표하였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척화파의 영수로 오랑캐 임금에게 머리를 숙인 인조 밑에서 벼슬하는 것을 수치라 여기고 안동으로 낙향했다 심양으로 압송되어서도 굽힘 없는 기개를 드러냈다. 김상헌은 심양에서 다시 만난 주화파 최명길과 함께 있는 동안 나라의 주권을 잃은 조선의 신하로 서로 속내를 주고받으며 화해하였다.
많은 피로인과 함께 볼모로 붙잡혀 심양으로 온 소현세자가 본국에 있는 부왕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떠나려 할 때, 세자가 청의 영토를 벗어나려면 그와 비견될 만한 누군가를 잡혀야 하였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만난 신부 아담 샬과 교유하며 서양 과학문명을 접하고 우수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고 하였다. 아들의 진정 어린 말을 곡해한 인조는 똑똑한 소현세자를 왕으로 추대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기며 아들을 냉랭하게 대하였다. 병약한 소현세자는 심양에서의 팔 년을 보내고 고국으로 돌아와 서른넷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저자는 인조반정→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소현세자의 볼모 생활과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꼼꼼히 살펴 인조반정 후 벌어진 참화를 여실히 드러냈다.
억지춘향이 식의 명분-폐모살제, 배명금친, 무리한 궁궐 공사-을 내세워 서인 주도의 반정으로 인조 정권을 세웠지만 광해군이 청에 의해 왕위를 이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광해군을 제주로 유배를 보냈다. 인조 정권은 성곽을 보수하고 관방 시설을 정비하는 등 기찰을 강화하여 인조 정권을 지키기 위해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국가적 위기 상황을 외면한 채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집착한 끝에 전쟁을 자초한 결과 막대한 피해로 도탄에 빠진 이들은 백성이었다.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어육(魚肉)이 되어가고 있는 죄 없는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 개월 짧은 기간의 패전으로 끝이 난 병자호란은 참패한 나라가 감당해야 할 몫치고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인간 사냥을 방불케 하는 오십만 명 이상의 피로인은 청나라의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붙잡은 민간인들이다. 청나라 장수의 첩이 된 조선 여인은 청나라 장수의 본처들에게 갖은 학대를 받았다. 질투와 시기로 조선 여인을 곱게 보지 않은 탓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조선에서 환향녀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결을 강요받기도 하였다. 부국강병을 위한 자구책을 찾기보다는 절대군주로 건재하려는 인조의 과욕이 초래한 병자호란은 나라를 통솔하는 지도자의 요건을 생각게 한다. 민심을 저버리지 않고 상생의 철학을 가지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새로운 꿈을 품고 살아갈 희망의 씨앗을 퍼뜨리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