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세기를 아우르는 네 여인의 일상이 세대를 넘나들며 기억 속 빗장을 풀고 흘러나온다. 흐름이 완만한 개울물이 강으로 흘러들고 바다로 합수되어 격랑의 파고를 견디며 융화되는 것처럼 지연은 흘러간 시간 속 직조된 추억을 불러 모은다. 지연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바람으로 결혼 생활을 꿈꾸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남편의 바람으로 마음을 다해 한 일들에 모멸을 느낀 지연은 이혼을 하였다. 지연의 부모는 믿음을 기반으로 쌓은 가정이 붕괴되어 참담한 심정인 딸을 위로하기는커녕 몸 약한 사위의 안위를 걱정하며 상처를 더했다. 전근대적인 사고에 사로잡힌 남자와 그 가족으로부터 착취당하기만 한 엄마는 남자가 필요하다며 헛헛한 딸의 마음까지 짓뭉개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이 막힘없이 뚫려 크고 작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으면 다행한 삶이지만 뜻대로 안 되는 인생길에서 인연은 한 사람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짧은 결혼 생활을 청산한 지연은 이혼 후 희령 천문대 연구원으로 채용돼 살던 도시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탐욕의 먹이사슬이 유혹하는 문명세계와는 달리 한산한 희령에서 조용히 지내며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랐다. 당시 지연은 상대의 비화를 가십거리로 삼아 뒷공론하지 않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에서 익명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지연은 외도를 하고도 죄의식 없이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남편을 보면서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의 길임을 알면서도 씁쓸함과 비통함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열 살 때 엄마와 함께 왔던 희령은 여름으로 기억되는 도시 이다. 울울함이 더한 시간이었지만 고개 들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견딜 만했다. 슬픔과 냉혹한 현실의 짐을 포용하고 흐르는 바다는 넉넉한 사랑으로 그동안 살아내느라 고생하였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자연으로부터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던 위안을 받으며 최소한의 활동으로 행동반경을 줄이며 지내던 중 지연은 열 살 이후로 만나지 못했던 외할머니와 재회하였다.


  ‘익명으로 살고 싶은 내 의지와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하나?’

   우려하면서도 지연은 할머니와 서로의 집을 오가며 그동안 끊어진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다. 지연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모계의 선대인 증조모와 증조부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으며 생생한 삶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증조모는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병환이 깊은 고조모를 봉양하며 지냈다. 전쟁 와중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전리품으로 차출되어 학대를 받았던 시절, 증조모는 개성으로 가자는 증조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산다는 것

이라는 증조모의 한마디는 나락에서 자신을 건져 준 증조부에게 고마워하는 대신 한 남자의 날개를 꺾은 죄책감을 이식하며 지내야 했다. 지연은 피난민 행렬에 끼어 불안정한 삶을 부지하며 생존을 위해 힘쓴 선대의 서사를 들으며 고통으로 이어진 과거사를 떠올렸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살아갈 에너지를 비축하며 지내온 할머니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모계 역사는 선대 여성들이 겪어온 사료(史料)로 의미가 크다.


   증조모는 명약관화한 불행을 피해 개성으로 가서 혼인 신고하고 살자는 증조부의 말을 따른다. 백정의 딸이라는 꼬리표는 증조모를 힘들게 하였지만 곰살궂게 따스함을 전하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서로 의지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시간으로 채웠다. 말로 전할 수 없는 메시지를 담은 편지는 실의에 젖은 사람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새비 아주머니가 낙담하여 힘들어할 때 증조모는 살아야 할 이유를 담아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여 살지 못하는 전쟁 상황은 생이별의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적 공동체임을 확인시킨다. 새비 아주머니는 고모가 있는 대구로 피난을 갔고, 개성에서 남으로 내려 온 증조모는 증조부의 말만 믿고 희령으로 와 고단한 시간을 보낸 여인들을 하나 둘씩 맞았다.


   중혼한 남편과 헤어진 지연 할머니는 붙박이별처럼 희령에서 지냈다.

   ‘어딜 가든 뭘 하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열흘 후에는 꼭 건강하게 돌아와야 하는 거야. 그것만 약속해줘.’

   지연의 엄마가 지연을 맡기고 자유의 시간을 보낼 때에도 할머니는 딸의 생각을 지지해주었다. 그 후로 마음의 결이 서로 달라 모녀간의 왕래는 끊어졌지만 지연이 희령에서 생활하게 되어 모녀는 관계를 조금씩 회복해 갈 여지가 생겼다. 새비 아주머니도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딸 희자와 함께 희령을 찾아 상실의 아픔을 상쇄하였듯이 희령은 끊어졌던 인연의 고리를 연결해 고단한 심신을 위무하는 공간으로 자리한다.


   남성들 우정 못지않게 소설 속 여성들에게서도 진한 우정은 빛을 발한다. 지연은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며 지냈다. 차갑고 곁을 내어주지 않는 엄마 대신 외로움과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지연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또 다른 세계를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천체 동아리에서 만난 지우와 소통하며 교유한 시간은 현실을 딛고 일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결혼 전 지연의 엄마가 근무한 우체국에서 만난 명희 아줌마가 엄마 수술비용을 건네주며 쾌차를 바란 일은 아낌없이 전하는 사랑이다.


   소설에서는 여성들 위에 군림하는 가부장적 사고에 갇혀 지내는 지연의 부계 중심의 서사 비중을 줄이고 여성들의 굴곡진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암흑의 밤을 등불로 밝힌다. 새비 아주머니, 증조모, 영옥, 희자, 지연은 생물학적 여성성이 갖는 특징을 넘어 유기적 생명체로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천착한다. 생전에 대구에는 걸음도 하지 말고 네 갈 길을 가라는 엄마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파혼한 뒤 독일로 유학 간 희자는 암호학자로 위상을 떨치며 학문의 길을 걷는다. 지연이 희령에서 들은 모계 중심의 서사를 통해 다른 곳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써서 자신의 길을 찾아 새로운 길 위에 선 것처럼 지연 역시 대전에 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희령에서 떠나보낸 반려견 대신 반려묘 현미와 함께 낯선 세계에 발을 딛고 다시 일어설 힘을 모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