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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씨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영상매체가 발달하기 전 연인들은 전하려는 메시지를 편지에 담아 서로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연결하고 소통하였다. 연인은 사랑하는 마음을 모아 한자리에 뿌리를 내린 채 소담한 열매를 거두고 싶은 마음으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진한 그리움을 한 글자 한 글자에 새기며 함께하고 싶은 바람을 담아 우체통을 찾던 추억은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 그리움을 뿜어낸다. 필자가 쓴 네 편의 단편 소설은 각기 다른 삶의 행태에서 배태된 비관적 전망을 담고 있다.
‘편지’의 주인공 리지는 교사로 일하던 집의 학부모인 디어링과 사랑에 빠졌고, 공교롭게도 디어링의 아내는 얼마 후 죽게 되고 그는 아내의 유산을 정리한다며 멀리 떠난다. 리지는 멀리 떨어진 디어링에게 편지를 보내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우연은 필연을 낳는다는 말처럼 리지는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고 마침내 디어링과 결혼해 여느 부부처럼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의 낡은 짐 가방을 정리하다 그 속에서 발견한 봉인된 편지 묶음은 리지가 그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그녀는 배신감에 진저리를 치며 그동안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잊고 지낸 시간이 늘어날지라도 서로를 기만하지 않는 부부의 믿음 속에 결혼 생활은 굳건히 지탱될 수 있다. ‘석류의 씨’에서 남편에게 배달된 회색 봉투에 담긴 편지는 아내 샬럿을 불안케 한다. 샬럿의 예감대로 딴 여자에게서 온 편지임이 발각된 날, 아무리 추궁해도 입을 다물고 있던 남편은 다음날 바로 연락이 끊어졌다. 결혼하였지만 마음까지는 하나 되지 못한 부부는 각기 다른 꿈을 꾸면서 평행선을 긋고 살아가는 숙명의 사슬 속에 엮여 헤어나지 못한 채 지내야 하는 샬럿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은 극작가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예술가 생활을 바라지만 희곡은 원하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생계형 직장 생활은 행복한 삶과는 멀어져갔다. 그는 ‘빗장을 지른 문’에 드리워진 빗장을 풀고 지금과는 다른 현실을 택하고 싶지마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과거 자신이 외사촌을 죽인 범인이라고 자백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극작가로 인정받아 꿈을 실현하는 예술가로 살고 싶은 바람은 녹록지 않은 현실에 드리워진 빗장을 열어젖히기 힘든 주인공의 번민은 일탈을 야기했지만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함께 성장하는 부부로 서로 신뢰하고 인륜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결혼 생활을 그리지만 현실은 잿빛으로 가득하여 어떤 희망을 생각하기도 힘들 때가 있다. ‘하녀의 종’에서는 사랑 없는 결혼의 패악함을 드러낸다. 음산함이 가득한 집, 방에 고립된 채 헤어나기 힘든 부인은 죽음으로 남편의 흉포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종소리의 부름을 들은 하녀는 진실을 밝히려 하지만 거짓으로 둘러싸인 집안의 탁한 공기를 상쇄할 수 없었다. 진실을 은폐하고 생명을 유지해 온 부인의 죽음은 가부장적인 남편의 극악한 횡포를 고발하지만 어떤 벌도 받지 않았다. 부인의 주검을 묻은 날, 남편은 또 다른 역을 찾아 인생 노정에 나서는 결말은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무례함을 가늠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존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