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진 야산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야생차는 고향 하동의 특산물로 가정의 상비약처럼 자리한다. 변변한 약국 한 군데 없는 궁벽한 동네, 봄과 여름에 채취한 찻잎은 환절기 건강을 챙기는 데 요긴하였다. 할머니는 봄에 찻잎을 따다 찻잎을 시들게 한 뒤 아랫목에서 발효시킨 차를 겨울에 끓여 주었다. 방안을 훈훈하게 데우는 화로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잭살차 주전자가 놓여 있다. 방안을 달구는 화톳불 빛깔처럼 붉은빛으로 우러난 잭살차는 약용 음료로 감기 예방에도 한몫했다. 기관지에 좋은 돌배를 함께 끓이면 단맛은 배가 되어 면역에도 도움 되었다.

 

 할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 농약을 치지 않으면 물러 떨어지는 감 농사 대신 병이 잘 안 들고 벌레도 잘 안 먹어 기르기 수월한 차 농사를 지었으면 하였다. 조상들 제사를 모시는 조건으로 받은 땅에 차나무를 심어 손자들이 자라면 찻잎을 수확하여 차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생전 후손들을 위해 가을에 씨앗을 받아 그늘에 말려 두었다가 이듬해 봄 심은 뒤 여름에 손가락만큼의 가지를 잘라 심었다 이듬해 봄 움트기 전에 밭으로 옮겨 심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차나무는 잘 자라 잎을 내어주고 가을에는 꽃을 피워 그윽한 차향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잘 익은 열매를 짠 기름으로 나물을 무치면 느끼함이 덜하여 주로 쓴다. 녹차 씨를 이용한 기름에는 카테킨·사포닌 같은 노화 예방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건강한 기름으로 유용함이 더한 녹차이다.

 

   828년 신라 흥덕왕 3년 대렴(大廉) 공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왕명으로 화개 동천에 차를 심었다. 지리산 남녘 화개동천은 밤낮 기온차가 크고 지리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개울이 흘러 다습하고 안개가 많아 녹차 시배지로 적합한 조건을 충족한다. 그래서인지 하동읍에서 화개를 향해 섬진강변을 달리다 보면 차밭이 제각각 도열하듯 늘어서 있다. 차밭에서 차와 함께한 시간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선대에서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차를 만드는 사람에서는 차를 만들어 소비자들과 교유하는 생활이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인터뷰가 실렸다.

   ‘차는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근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

   7대째 차 농사를 지어 온 도심다원 대표는 전통 방식을 지키며 차를 만들어온 장인의 손길이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차를 마시며 자랐고, 어른이 되어서는 차를 만들며 평생을 차와 함께해온 관록이 묻어난다. 대표는 집집마다 다른 김치 맛만큼이나 녹차 역시 깊이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진대 경험으로 알아차리는 순간을 중시한다. 4월에 딴 새순으로 만든 차는 일 년 내 품고 있던 성분을 배로 가지고 있어 5월에 만든 차보다 깊은 맛이 우러난다며 차 농사를 지으며 터득한 내용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전통의 맥을 이어나가기라도 하듯 그는 도심다원에 있는 큰 차나무를 가꾸며 오늘도 차밭을 지킨다.

 

   고통 없이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하동 토박이 만수가 만드는 차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서 큰 욕심 내지 않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사는 일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운다. 건강해지고 싶어 몸에 좋은 차를 만들어 마셨고, 만수가 만든 차를 마시고 소비자들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차를 만드는 질박함이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난다. 극도로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부탄을 찾아 현지인들에게 도움이 될 경제적인 작물로 선정된 녹차를 가르쳐준 일을 들려준 삼태다원 대표 말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차 사업을 처음 시작한 조태연가 대표는 우리 차를 세계 시장에 알리기 위해 실천하였다. 1990년대 작업을 할 때에는 육 년을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차를 만들었다는 말에서는 좋은 차를 만들겠다는 그의 집념을 알 수 있었다. 차에만 골몰하다 보니 아집이 생겨 차에 대한 안 좋은 평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열린 마음으로 차를 만들며 생긴 문제점을 조금씩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차 동호회에서 쌍계사 근처로 차를 마시러 왔다 인연이 되어 살고 있다는 천년지향 부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부부는 주거 안정을 바라기보다는 아무것이 없어도 어디에 가든 몸 가고 솥만 있으면 차를 만들었을 정도로 차를 사랑하고 차와 함께해온 삶이다. 찻잎은 상온에서 산소와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 달궈진 솥에 들어가 열기를 쬐며 덖어지다 향은 깊어진다. 덖은 차의 열기를 식히며 비비기를 반복한 뒤 다시 솥에 들어가는 찻잎은 그윽한 향을 더한다

 

   농사를 짓는 이들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절기(節氣)를 염두에 두고 계절마다 챙겨야 할 것들을 준비한다. 욕심을 내지 않고 뿌린 대로 거두는 일상에 익숙한 팔순의 어머니는 고향 하동에서 25년째 차를 만들고 있다. 섬진강 건너 광양 매화 밭,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찻잎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차밭을 오가며 올해 차 농사를 가늠한다.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에 곡물들이 잠을 깬다는 속담처럼 녹차 농사를 짓는 이에게 곡우는 좋은 차를 만들어 내는 분수령이 되는 절기이다.

 

   초의선사는 지리산 칠불선원 아자방에서 참선하던 중 고전다서에서 필요한 내용을 뽑아 다신전으로 묶었다. 이 다서(茶書)는 찻잎 따기에서부터 차 만드는 방법, 차를 오래 보관하는 법, 다구(茶具)로 차를 우려 마시는 법까지 차에 대한 이론을 개괄적으로 싣고 있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산비탈에는 야생으로 자란 차나무들이 이웃하여 자라 지역민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보살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도 시절 인연에 따라 잎을 내밀고 꽃을 피우듯 차나무에는 새순이 돋는다. 햇볕이 가득한 산비탈에는 4월 초순부터 눈을 틔우기 시작한 녹차는 참새 혀처럼 뾰족하게 내밀고 올라온다. 이른 봄부터 시작되는 채다(採茶)는 여름이 깊어질 즈음 끝이 난다. 너무 서둘러 찻잎을 따면 차 맛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늦으면 신성함이 흩어져 다신(茶神)이 사라진다고 다신전에서는 기술하고 있다.

   어머니는 이슬이 채 깨기도 전, 새벽의 서늘한 기운을 받으며 주먹밥을 챙겨 차밭으로 향한다. 손으로 찻잎을 끊어내는 톡톡 소리는 만물을 일깨우며 녹차 밭의 고요를 깬다. 찻잎을 딸 때는 절기가 중요한 만큼 찻잎은 때에 맞춰 따야 한다. 곡우 전 5일을 최고로 삼아 차를 만드는 만큼 우전차는 녹차의 맛과 향, 기운까지 빼어나 차를 즐기는 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참새 혀처럼 올라온 잎을 따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찻잎은 자라므로 여린 순을 톡톡 따 담으려고 손을 재게 놀린다. 하루 종일 찻잎을 따더라도 혼자 2킬로그램을 따기 힘들 정도로 고된 일이지만 어머니는 녹차 잎이 돋기 시작하는 봄을 기다린다.

   차향 가득한 하동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차밭 풍경을 담은 그림은 싱그러운 빛으로 안온함을 준다. 오십 년 넘게 봐왔던 낯익은 고향의 모습이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봄 한철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드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지내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차 문화의 시초인 쌍계사와 차 시배지 등을 담은 그림은 오랫동안 차와 함께해온 삶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이뤄낸 문화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조그마한 일에도 크게 반응하며 에너지 넘치는 십대들과 생활하는 시간, 차 한 잔을 마시며 격해지는 감정을 가라앉힌다. 다관에 끓인 물을 부은 뒤 차를 넣어 우려 마시는 상투(上投) 방식으로 찻물을 따라 마신다. 홀로 차를 음미하는 시간은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기 쉽다고 한 것처럼 차 한 잔에 굴곡진 인생의 조각들을 녹여내며 마음을 다스린다. 향기롭고 맛이 일품인 차를 가까이하며 해마다 녹차를 만드는 철에는 고향을 찾는다. 노쇠한 어머니 혼자 차를 따고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힘을 보태고 싶어 서이다. 녹차 여린 잎을 따서는 차를 덖고 비비는 과정을 거쳐 수제차를 만들며 자부심을 갖는 어머니는 불의 열기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당부한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며 그 옛날 할머니가 하던 방식대로 차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차를 보낸다. 차 맛으로 오롯이 평가받으려는 견습생처럼 오늘도 차 공부를 하면서 차향을 맡는다.

 

다원 순례길, 표지판에 그려진 마스코트 찻잎새는 이정표가 되어 도보 여행자들이 헤매지 않도록 길을 안내한다. 차에 문외한이었던 찻잎새가 다도 경연을 앞두고 칠불사를 찾아가 초의선사의 혼령을 만나 다인(茶人)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은 우리 녹차에 대한 애정을 더한다. 잭살차를 어려서부터 마시고 십 수 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차를 만들며 녹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열고 있지만 한 잔의 차가 내게로 오기까지의 공정을 잊을 때가 많다. 차 한 잔에 담긴 다인들의 노력과 정성을 새기며 오늘도 마음을 다스리는 명약으로 차 한 잔을 우려 마신다. 물이 끓어오르는 찰나 산란한 마음을 재우고 집중하는 가운데 맑은 차를 음미하는 시간은 번민을 털어내는 정화의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