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꿈꾼 나라 - 실록으로 읽는 세종의 위업
이석제 지음 / 인간과자연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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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한 한글 창제는 세종의 큰 업적으로 남아 있다. 자주·애민·실용·창조 정신으로 집약되는 훈민정음 창제 정신을 넘어서는 세종의 인간애는 성군으로 자리할 바탕을 이룬다.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라는 말 덕분에 유희와 애완의 격물을 두루 갖추며 성장하였다.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은 세자로서 궁중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종사를 이을 수 없다는 신하들 상소에 따라 충녕대군은 조선 4대 왕위에 올랐다. 외유내강형의 충녕대군은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로 선택과 집중의 지도력을 발휘하며 조선을 통치하였다.

 

   학문을 즐기며 경연을 게을리하지 않은 세종은 고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글을 읽는 동안 생각을 일깨워 정사에 접목하여 시행하는 부분이 많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 세종은 꽉 짜인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성리의 학문을 정독해 고금의 모든 일에 통달하여 어느 한쪽에도 막힘이 없었다.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운 일이 닥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나라를 보호하는 계책을 널리 알렸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군사 훈련을 독려하며 화포를 비롯한 각종 신무기 개발에도 전력을 다하였다. 세종은 국토를 안전하게 방어하여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왕의 사명이라고 여기며 왜인과 야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세종은 왕이 거처하는 궁궐에서 포를 쏘아 올려 최강의 나라를 향한 선전포고를 드러내며 치국과 관련 책을 두루 섭렵하며 무사 양성 계획을 세워 실행하였다. 궁궐 내 활터를 지어 활쏘기 연습을 시키고, 격구로 무예 연습을 지속하였으며, 도순검사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군대 형편을 살피게 하였다. 조선에 복종하면서 평화롭게 지내다가도 갑자기 침략과 약탈을 자행해 변방의 골칫거리로 떠오른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최윤덕은 6진을 개척한 김종서와 함께 북방 정책을 펴 나라를 튼튼히 하는 데 힘을 쏟았다.

 

   편안한 때일수록 위태로운 것을 잊지 않고 경계함은 나라를 위하는 도리임을 한시도 잊지 않은 세종은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변경에 성을 쌓는 일은 만세의 장구한 계책을 위함이었다. 한가할 때 성책을 굳게 하고 수비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완성하기까지 백성들의 궁핍과 고통은 수반될 수밖에 없었지만, 세종은 뜻을 함께하는 신하들과 함께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군비를 강화하며 후일을 도모하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는 야욕은 힘없는 나라를 침탈하는 일로 이어져 백성들이 받는 고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일왕의 대장경판 구걸과 사신 단식 투쟁, 노략질 모의 등은 끊이지 않았고, 훗날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일제의 야만적 침략은 핍박으로 이어져 굴욕적인 역사로 큰 발자국을 남겼다. 세종초, 대마도 토벌 이후 많은 것을 주면 줄수록 더 많은 것을 찾아서 배를 타고 넘어오는 왜인들로 삼포 왜인 단속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나랏일을 보면서 모든 부정적인 일들을 자신의 부덕과 책임으로 돌리고 성찰하며 지혜를 모으기 위해 경서를 읽고 또 읽었다. 백성들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제도는 혁파하고, 쇄신 정책을 펴나갔다. 공정성을 상실해 힘없는 백성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공법(貢法)을 정해 시행하였다. 전 백성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여 백성에게 좋은 방안을 찾아 실행에 옮겼을 정도로 세종은 민본 사상을 실현하였다. 병든 노인과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은혜를 더 베풀었고, 여자 노비들은 출산 전과 출산 후 휴가를 법제화해 모성을 보호하였다. 백성이 법을 몰라서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법을 알게 하는 것이 긴요하며 죄수를 가두는 옥을 정결하게 유지하는 일까지 살폈을 정도로 자애(慈愛)를 실천하였다

 

   무지몽매함을 벗어난 백성들이 스스로 잘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음을 간파한 세종은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하였다. 백성들이 읽으면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지어 널리 보급하려는 큰 뜻을 세웠다.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대부분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세종 혼자서 비밀리에 했던 일임을 실록의 기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14431230일 세종은 정음 28자를 처음 만들어 예를 간략히 들어 보인 뒤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글 서적을 편찬케 하였다. 세종은 한글 창제 후 한글의 쓰임을 실험하고 연구하기 위해 고질병을 들어 세자에게 섭정을 위임코자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의 거센 반대로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찌르는 듯 아픈 임질[대상포진]과 시야가 흐려지는 안질을 앓으면서도 선택한 일에 집중하는 실천력으로 한글은 세상에 빛을 보았다.

 

   글자를 가진 민족만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글 작업 완료 시점을 몇 개월 남겨두었을 때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세종은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하였다. 새 글자인 한글을 창제한 후 집현전 학자를 중심으로 중국어 자전을 번역하게 해 책자 보급에도 힘을 썼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짠 것처럼 세종은 백성들이 전하고 싶은 바를 쉽게 전하여 소통할 수 있는 일상을 위해 쇠한 몸으로 선택한 일에 집중하였다. 우리 말과 중국의 말이 다름을 아는 데서 출발한 자주적 관점과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하며 만백성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는 민본주의적 관점은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세종답게 실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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