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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자라온 환경이 다른 둘이 한 집에서 살아가기 위해 서로에게 배려할 부분은 많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다 보면 돌연한 일들에 발목이 잡혀 상처를 내며 살아갈 때도 왕왕 있다. 경험하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은 위험 부담을 떠안고 출발하는 모험 같은 것이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시 생활에 익숙지 않은 친구 둘은 월세를 아낀다는 명분으로 셋방에서 함께 지내다 1년은 근근이 버틴 뒤 갈라섰다. 소설 ‘아파트먼트’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주인공과 빌리의 관계를 들여다보니 스무 살의 룸메이트가 떠올랐다.
방 한 칸에서 함께 지내더라도 청소와 빨래, 연탄재 처리 등 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여러 이유를 들어 핫바지 방귀 새듯 빠져나간 친구가 떠올라 한참을 웃어젖혔다. 짙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 연탄재를 버리러 가는 일은 늘 내 몫으로 자리했다. 지난밤 숙취로 늦잠을 잔다거나 새벽바람을 쐬면 비염이 도져 생활이 힘들다는 등의 이유를 대는 친구를 대신해 고무 대야에 연탄재를 이고 가는 시간은 계약 기간 만료일까지만 버티자고 곱씹으며 자신을 달래야 했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재능을 연마하며 기량을 발휘하는 길을 찾아 나선다. 보증된 기성체제 안에서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안도감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1996년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워크숍 수업을 듣고 있다. 용기 내어 자신이 쓴 소설을 두고 합평 수업이 이뤄진 날, 원생들의 신랄한 비판과 교수의 혹평에 희망을 품기 힘들었다. 유일한 동료 수강생 빌리는, 소설가로 성장할 재능이 스스로에게 있는지 반문하며 실의에 젖어 있는 나에게 힘을 돋워 주었다. 자신의 소설을 지지해준 빌리의 문학적 재능에 매혹을 느낀 나는 그에게 룸메이트를 제안하였다.
아버지가 지원해주는 학비와 용돈으로 별 어려움 없이 대학원 생활을 하는 나와 달리 빌리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밤에는 바텐더 일을 하며 학비와 용돈을 마련해야 했다. 빌리가 일하는 바에 들른 주인공은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바의 지하실에 임시로 묵고 있는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임대한 대고모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하였다. 작가로 성공하려는 꿈을 좇아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서로의 글을 읽으며 평을 함으로써 개선책을 모색하는 최고선을 지향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둘 사이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주인공은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여성과 문학적인 삶을 함께하는 꿈을 꾸며 마음을 나누려 하지만 남성성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빌리는 수려한 용모에 강한 남성성으로 여성을 압도하는 힘이 있어 주인공에게 열등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대고모 소유의 아파트이지만 안정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던 주인공은 빌리와의 생활이 쌓일수록 열패감이 자리하였다. 그에게 선의를 제공하며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평가하며 살던 주인공도 그와 살면서 부딪히는 일들에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다. 나를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말로 고립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은 문학적 동반자로 곁에 있는 빌리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로 자기 균열이 일어났다.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 애쓰며 지낸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특권을 쉽게 조롱하면서도 후하게 베푸는 것들에 매어 사는 빌리를 보면 환멸을 느꼈다. 창작지원 장학금을 받아 그가 아파트를 떠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공모전에 작품을 낼 수 없도록 원고 파일을 날려버렸다. 주인공은 그가 간직하고 있는 애장품 같은 물건들을 파기하였다. 창작의 영감을 주는 기록물과 습작 모음집 등을 모두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버리고 강도가 든 것처럼 위장하였지만 빌리는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다. 주인공은 강도 위장 사건으로 불법 임대 거주 사실이 드러나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했다.
감정의 밑바닥에 자리하는 동물적 본능을 여과 없이 드러낸 주인공을 비웃으며 빌리는 창작 지원금을 받고 다른 룸메이트를 찾아 이사를 갔다. 읽고 쓰기를 좋아한다는 교착점이 빚은 환상에 끌려 친밀해진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 후 그는 중간급 작가로 가정을 이루었고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성취를 더하였다. 한편 주인공은 작가가 될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출판사 교열팀장으로 일하며 또 다른 길을 찾았다. 동일한 구조의 칸칸이 들어앉은 아파트 거주 가정이 각양각색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존중해주기를 바라며 작가의 꿈을 꾸며 지내온 두 청년의 열망은 서로에게 완충재로 자리하지 못하였다. 존재의 소멸과 가치의 상실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깊어지는 것이 인생이 아닐는지 두 청년의 청춘 시절을 통해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