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사 - 조선의 독립운동가, 그녀를 기억하다
권비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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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차림의 여성이 세상을 호기롭게 보고 있는 한 장의 사진 아래 조선의 독립운동가 김란사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귀에 익지 않아 낯선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실천한 의로운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주권을 빼앗은 일본제국주의의 횡포에 맞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의로운 삶을 접할 때마다 이들을 향한 외경심이 든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고 싶은 비장감이 짙은 란사는 허름한 복색으로 변장을 하고 중국으로 향하였다. 사는 방법은 달라도 서로 안부를 전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일에는 한마음으로 지냈던 화영에게 구겨진 노트 한 권을 맡긴 채 그녀는 홀연히 길을 떠났다.

 

   아버지의 조언대로 란사는 본처와 사별한, 나이 많은 하상기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전처의 자식을 봐야 하였지만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내를 깍듯이 예우하는 남편은 그녀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입지를 형성하는 조력자로 남았다. 불우한 처지의 여성들을 위해 일하며 살기를 바라며 자신이 원하는 삶의 길을 닦아갔다. 딸아이를 낳아 유모 손에 맡긴 뒤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한 그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유모 손에 커온, 그녀의 딸 자옥은 엄마를 서양 귀신이라 부르며 데면데면하게 지냈지만 시간이 흘러 엄마라 불렀다. 자옥이 25세로 요절하자 란사는 딸을 잘 보살피지 못하였다는 자책으로 홀로 동굴에 숨어 지낼 정도로 딸이 없는 세상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남편의 위로는 딸을 가슴에 묻고 고통을 안으며 살아야 했던 아내가 몸과 마음을 추슬러 민족적 사명의 길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이화학당 여 사감으로 학생들이 공부하여 구국 운동으로 나설 수 있도록 독려하였다

  

  ‘구더기 같은 년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 배정자를 욕하는 란사의 찰진 한마디는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 중 하나다. 고종의 신임을 받고 궁에 드나들며 정황을 살피고 염탐하여 전하는 등의 친일 행각을 벌였다. 배정자는 이토가 암살당한 뒤에도 만주에서 활동 중인 항일 독립 운동가들을 밀고하며 구차한 삶을 이은 매국 행위를 일삼았다. 이중적인 잣대로 살기를 자처하는 기회주의자들도 편승해 조국 광복을 위한 길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화영의 남편은 독립 운동 자금을 대기도 하면서 후대 왕위를 계승할 의화군과의 화친을 위해 줄을 대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지내야 하는 이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미국 유학 중에 란사는 광인처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정해 일제 감시를 피해 살아야 했던 의친왕 이강을 만났다. 섣부른 행동으로 이강을 파락호로 폄하하며 욕했던 점을 뉘우치며 이후 이강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란사는 비밀 서재를 만들어 그의 은신처로 제공하였으며 임정의 어려움을 알려 독립 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멀리 나서기도 하였다. 그녀는 조선의 자주 독립을 이루려는 열망으로 이강과 함께한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를 향한 마음도 커졌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로 마음속 깊은 정을 품고 대의를 위해 그와 뜻을 함께하였다.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고 마는 뚝심으로 선택적 삶을 살아온 란사는 이강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도둑질을 하다 발각된 병수를 털보 이 씨는 받아들였다. 도둑질하지 말고 배고프면 오라는 말을 기억한 병수는 건어물 가게에서 심부름하며 지내다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나서는 길에도 동행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특별한 분장술로 늙은 부부로 변장한 이강과 란사는 상해에서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생이별을 하였다. 낯선 중국에서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본격적인 독립 운동에 가담하기도 전 란사는 독살 당하였고 이강은 일본경찰에게 발각당하여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밀고로 임시정부 요원들과 접선하려는 뜻을 채 이루지도 못하고 낯선 땅에서 유해로 마감한 란사의 짧은 생은 처연함을 돋운다.

 

   신여성으로 널리 배운 만큼 후학들에게 가르침으로 돌려주었던 란사는 살아서 고국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화영에게 심경을 담은 공책을 전한 듯하다. 은애하는 이강을 위하여 만든 비밀 공간에서 그가 필요할 때 지낼 수 있기를 바란 일, 어린 자신을 다독이며 살뜰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남편에게 존경심을 드러낸 일 등은 그녀가 없는 공간에 씨줄과 날줄로 무늬를 아로새겼다. 독립 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곳에서 밀알로 흩어져 자생하는 야생의 꽃들처럼 피어난 이들은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우리나라의 앞날을 그리며 조국 독립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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