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의 고독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 김병순 옮김 / 싱긋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원이 귀하고 부족하던 시절, 농사를 짓고 사는 궁벽한 시골 살림살이에서 아이들은 농사짓는 어른들 일손을 거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남아들은 꼴을 베어 소여물을 주고 여아들은 빨래터로 가 빨래를 씻어 넌 뒤 학교를 향하였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는 퇴비증산을 위한 울력에 온 동네 사람들이 나서야 했다. 두 발로 걸어 양손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풀을 베고 모으는 일에 나서야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걷고 움직이는 일상을 들여다본다.

 

   느닷없이 쓰러져 정신을 잃고 병원 응급실로 간 저자는 뇌전증 진단을 받고 의사의 권고대로 운전면허증을 반납하였다. 지금껏 차를 운전하며 생활했던 이에게 운전 금지는 여러 불편함을 가중시킬 수 있었지만 저자는 생각을 달리하여 이동 방법을 바꾸었다. 직립 보행으로 원하는 일들을 처리하며 지냈던 석기 시대의 수렵·채집 생활을 떠올리며 생필품을 사러 갈 때에도 걸어서 다녀오는 방법을 고수하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오고간 길을 되짚어 걸으며 문명의 이기에 짓눌려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저자는 걷는다.

 

   부모와 두 여동생이 함께 오두막에서 지냈던 유년 시절, 보금자리가 깃든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던 남매의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겼다. 울울창창한 숲 사이로 난 외길에 선 남매는 배낭을 메고 서로 손을 잡고 집 뒤쪽 숲속으로 걸어갔다. 길을 걷다 보면 목이 마를 수도 있으니 물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기는 일은 길을 떠나는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마음을 담았으리라....... 지금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며 사느라 자주 만나기는 힘든 남매이지만 그 시절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 한 장에는 가족의 서사가 깃들어 있다.

 

   처음부터 있던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 길을 찾을 때가 있다. 산길을 걷다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잡목으로 우거져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길로 빠졌을 때 두려움이 밀려든 경험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출구를 찾기 힘든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길을 걸어 평지와 이어지는 길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곱절로 든다. 저자는 친구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노르웨이 하르당에르고원을 가로지르는 옛 산길을 탐사하며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매료되었다. 험한 산길을 걷는 아이들 역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걸음으로 저마다의 보폭을 유지하며 걸었다. 벼랑에 난 틈새에 쌓아올린 돌무더기는 주위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표식으로 이정표 기능을 하였다.

 

   저자는 탐사 중 떠오르는 중요한 생각을 메모하며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걷기를 즐겼다. 오슬로 인근의 노르마르카숲을 걸을 때에는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길을 택해 기존의 탐방로가 아닌 길을 찾는 모험도 감행하였다. 개울은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는 길을 따라 쉼 없이 흘러 강에 이르고 바다로 흘러간다. 누구든 산길을 걸었다 다시 걸어 돌아오는 길, 힘에 부쳐 주저 않고 싶은 순간이 올 때면 반환점을 지났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산길 중간을 넘어섰다는 말은 하산할 때와 멀어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숨이 턱에 닿을 듯 힘이 드는 순간, 너럭바위에 앉아 오던 길을 내려다본다. 오랜 시간 속 풍화를 견딘 표적은 바위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돌 틈에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의 원색적 빛깔은 자연 속에 함께하는 설렘을 선물한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시름이 깊을 때면 동네 뒷산을 찾는다. 특별한 장비 없이 황톳길을 걸으며 마음을 어지럽힌 일들을 불러내 내적 소통을 꾀하며 한 걸음씩 움직인다. 인기척에 놀라 소나무 위로 내달리는 청설모에게 따스한 한마디를 건네며 가슴속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떼어 낸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들이 새롭게 들어오는 경험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이들에게 주는 통찰의 힘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들판으로 가는 길, 길가에 우거진 풀숲은 짧게 자른 남동생의 머리처럼 민숭민숭함을 드러내며 진한 풀냄새를 풍긴다. 모내기를 끝낸 들판에는 연두 빛깔의 벼들이 청초하게 자라나 걷는 이의 마음을 싱그럽게 물들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