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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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끝이 시리도록 맹렬하게 부는 강바람을 맞으며 학교를 다니던 겨울, 어머니는 군불 지핀 방 아랫목 이불 아래 밥공기를 묻어두었다. 찬밥을 먹으면 마음까지 시려진다며 고이 담아둔 밥에 무국을 데워 먹으며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렸다. 온몸을 꽁꽁 얼려버릴 추위에도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발품을 팔며 이 동네 저 동네로 장사를 다니느라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지만 자식이 배곯지는 않은지 염려하였다. 대가 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 덕분에 오누이는 걱정 없이 생활하며 자신의 일을 도모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어머니가 배고플 딸을 위해 준비한 공기의 밥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실천의 그릇이었다. 두꺼운 양말도 귀하던 시절 발 시릴까 밥을 짓는 가마솥 위에 양말을 얹어 따뜻하게 데워주던 어머니의 마음에는 자비의 감수성이 함께하였다.

 

   죽을 때까지 감당해야 하는 삶의 원초적 진상인 고통을 자기 나름대로 완화함으로써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다른 존재에게 폐를 끼치고 있음을 기억하고 나와 타자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균형을 찾아내야 한다. 상대방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그 고통을 잠시 완화하려는 감정의지와 실천이 사랑으로 귀결된다. 최소한 나로 인해 타인의 고통이 가중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심장을 가득 채울 때, ‘한 공기의 사랑은 아낌의 인문정신을 만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대로 발화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무수히 많은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항상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는 삶을 정정한다. 미래라는 목적을 위해 현재를 수단화하여 재미없는 노동을 계속하며 시간을 소진한다. 어떤 존재, 현상 등을 고정된 실체로 보고 집착하며 무상을 직면하지 못한 채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갈 뿐이다. 수단과 놀이가 일치하는 놀이의 즐거움을 찾아 기적 같은 오늘 하루를 완전히 향유하는 일은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가는 일이다.

 

   모든 개체나 사건은 여러 인연의 마주침으로 발생한다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연기(緣起)의 의미로 모아진다. 억겁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영원하지도 순간적이지도 않음을 알고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아야 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을진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영원한 행복을 다짐하며 삶의 균형을 잃고 지낼 때가 흔하다. 편견 없이 세상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볼 때면 그동안 경험과 언어적 사유가 발동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주어진 세상에서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살기 위해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의식을 비워내야 한다

 

   살다 보면 고유한 독자성을 유지하며 자기만의 계통을 지키기란 쉽지 않음을 통절히 느낄 때가 있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삶의 주인으로 서지 못할 때 회한에 젖곤 한다. 이익과 이해의 관계에 치우쳐 타인이 원하는 것에 복종하는 경우 자유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마음 가는 곳에 몸이 가고, 몸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가면 좋을 텐데 몸만 가 있을 때가 늘어난다. 부부로 함께 살면서 선배를 만나는 자리에 함께 가자는 남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하여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을 안타깝게 여긴 적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상대의 의중은 헤아리지 않고 요구에 응해주기를 바라는 일들이 우호적 관계 증진이라는 목적 아래 이뤄지는 일들이 흔하다.

 

   상대방의 고통을 관심사로 여기며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보시는 사랑과 자비행의 결정이다. 상대방을 아끼므로 함부로 부리지 않고, 귀하고 무겁게 여겨 가볍게 대하지 않게 된다. 자신은 배가 고프더라도 상대방의 배를 불리고, 스스로 힘든 쪽을 택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낌없는 사랑을 전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며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사랑은 우리에게 자유를 요구하고, 자유는 우리에게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고 상대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의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할 때가 있다. 아끼는 대상이 기쁨을 유지하며 지낼 수 있게 배려하는 일은 상대방을 부처처럼 존중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고통의 감수성을 고양하는 공동체로 나아가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공포를 덜어주는 사랑이 필요하다. 모든 생명의 고통을 알고 자기만큼이나 타인의 고통에 아파하는 일이 늘어날 때,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순간이 예고 없이 올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번뿐인 인생을 고마웠다 인사하며 마감할 수 있기를 발원한다. 김선우 시인의 花飛, 그날이 오면에서 말하는 눈부처를 그대의 눈에서 보며 마주치는 사이 서로를 무시하지 않고 자비를 실천하는 부처처럼 존중하며 아끼는 삶의 진수를 확인하며 기적 같은 오늘을 향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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