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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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향해 마모되어 가는 불확실한 인생이지만 햇수가 늘어날수록 자신만의 언어로 집을 만들며 살아간다. 노화의 진행과 함께 일어나는 퇴행은 중년의 삶에 서글픔과 회한을 더한다. 낮달만 만나는 해는 밤에 뜨는 반달을 모르듯 경험하지 않은 시간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타인에게는 싹싹하면서 아버지에게는 야박하게 구는 딸을 보며 명덕은 모르는 영역이 많은 가족을 떠올린다. 딸과는 달리 감정의 오르내림이 전혀 없던 전처를 떠올리며 함께 지내도 모르는 영역이 많은데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은 딸과는 서로 친밀해질 시간조차 많지 않았다. 가까이 지내도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로 마음결을 살피지 못한 채 지내다 스러져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지만 남은 시간 스스로를 다잡고 살아야 할 명분은 있다.

 

   ‘손톱은 슬플 때마다 돋고 발톱은 기쁠 때마다 돋는다.’

   는 속담처럼 우리 삶은 슬픔이 기쁨보다 더 많다는 말처럼 손톱의 소희는 참혹함 속에서도 집 나간 언니를 기다린다. 그녀는 판매원으로 일하며 한 달에 번 돈 중 일정액을 저축하며 계획적으로 생활한다. 엄마가 언니의 돈을 들고 집을 나간 것처럼 언니도 동생의 적금을 들고 집을 나갔다. 옥탑방 보증금 걸었던 대출금을 먼저 갚을 요량으로 고단함을 감내하며 아껴 쓰고 저축하는 일에 골몰하였다. 하지만 손톱이 깨져 염증이 생기고 덧나 냉동치료를 해야 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 그마저도 포기하고 손톱 없어도 된다고............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뭘, , ? ? ?’

   외쳐보지만 공허한 메아리만 그녀의 가슴을 후려칠 뿐이다

  

   악행과 악덕이 횡행하는 폭력을 받아들이며 현실의 부조리를 견디는 일이 다반사로 이어지는 삶은 사회적 약자들의 일상과 흡사하다. 부정한 사회 구조에 편승해 사는 이들에 맞서 항변조차 못하는 비정규직 직장인들이 있다. 두 달 동안 임시교사로 일하는 N너머공간에 짙게 드리워진 패악을 목도하며분노에 휩싸였다. 학급의 뒷문이 고장 나 수리를 부탁하는 N교사를 향해 기사가 어디 있냐며 주무관이라 부르라는 고압적인 태도는 주객이 전도되는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요양 병원에 있는 어머니를 방치한 간병인의 가증스러운 태도는 잡급직에 대한 경계를 허물고 간병인을 대했던 자신의 우둔함을 탓해야 했다. 어째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물을 수도 없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알기도 힘든 마음은 희박한 마음에도 드러난다.

 

   가족이라는 생물학적 범주로 서로를 묶어 불편한 도리를 강조하며 형제 들은 서로를 힐난하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는다. 자식으로서 고령의 어머니가 피안의 세상으로 떠나는 날까지 잘 모시자고 하면서도 각기 다른 생각을 고집하며 불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어머니는 원하지도 않는 일을 감행하는 큰아들은 다른 형제들의 생각을 수용할 생각조차 않는 위압적 태도로 일관한다. 어머니 뜻까지 거스르며 아버지 묘를 파헤쳐 유골을 화장한 뒤 평장하려는 송추의 가을속 맏형의 고압성은 가족 내 서열에 따른 불평등 구조의 심화를 드러낸다.

   예상 밖의 일들을 겪으며 낯선 환경에 노출되어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2020년은 코로나블루로 절망적인 시간을 견디며 지내는 이들이 늘고 있다. 별 일 없이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만나 소통하고 교감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었는지 떠올리게 한다. 창문 너머 맑은 하늘을 쳐다보고는 일상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며 하루를 시작하는 내가 있다. 생로병사의 법칙 아래 놓인 우리는 늙고 병들어 지난한 시간을 보내다 영면에 든다.

 

   전학이 얼마나 힘든데……. 전학 가면…… 불쌍해, ……불쌍해선 안 돼.’

   ‘친구속 민수는 가해 학생들의 폭력 아래 상습 자해로 스스로를 망가뜨리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여성용품 마케터로 일하는 해옥은 아들의 상처를 알지 못한 채 학교에서도 친구가 많은 아들로만 여겼던 것이다. 전학을 많이 다녔던 민수는 익숙한 환경에서 지내고 싶은 욕구가 컸다. 폭력을 일삼는 아이들의 행동을 장난이라고 치부하며 낯익은 공간에서 살고 싶었다. 엄마에게 사실을 은폐하고 가해 학생의 폭력을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더 큰 폭력은 연쇄적으로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일로 비화될 수도 있었다. 폭력을 장난으로 미화하여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진실한 태도는 차별과 억압의 사슬을 끊기 위한 문제 제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기댈 곳도 없고 아무 쥘 것도 남지 않은 이제 와서야 비로소 겉돌던 세상의 틀 속에 겨우 들어앉게 된 기분

   을 느끼며 살아날 가망 없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의 주인공은 불안을 공허함으로 덮는다.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가 흉측한 벌레로 변한 변신이야기를 해충으로 규정하며 주인공 역시 불투명한 수술을 앞두고 지난 시간을 반추한다. 자신의 병을 알고 민지를 데리고 나가버린 아내는 저세상으로 갔고, 민지를 돌보던 이모 역시 고단한 중년을 보내고 있어 연락이 끊긴 민지에게 관심을 계속 두지는 않았다. 보호자 없이 수술대에 오를 주인공은 불확실한 결과에 충실해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곤궁, 차별, 불공정 등의 이유로 불행을 겪으면서도 슬픔을 견디고 힘을 빼는 행위는 생의 감각을 살려내는 몸짓에 해당한다. 흡인력 있는 말로 좌중을 전율케 하던 전갱이의 맛속 그는 성대 낭종 수술을 받고 묵언함으로써 목소리를 지켜낼 수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말로 먹고 살 것이라 여기던 이가 목소리를 잃고 사서 일을 대안으로 여기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모습은 고무적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돌연한 일들에 짓눌리게 되더라도 아직은 남은 시간이 있으므로 지레 겁먹고 삶의 의미를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직 멀었다는 말은 함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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