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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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화가 한창인 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 철마다 행상을 다녔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생필품을 팔던 어머니는 막차가 끊기면 아는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할머니와 함께 퇴락한 집을 지키며 제 할 일은 스스로 행하며 가족 누군가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쌀이 귀하여 보리에 감자와 고구마를 섞어 지은 밥을 주식으로 삼아 먹으며 귀한 손님이라도 오는 날에는 쌀밥을 맛볼 수 있었다. 쌀밥은 씹을수록 입에 착착 달라붙어 얼른 한 그릇을 비우고 할머니가 한 숟가락 덜어주는 밥까지 비우면 행복감은 밀려들었다.

 

   먹을 것이 많은 지금은 밥을 배불리 먹어보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담고 있는 이들이 흔치 않다. 후미코의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 가족으로서 한 집에서 살아갈 기능마저 앗아 가버렸다. 집을 나온 후미코와 어머니는 돌아갈 곳 한 군데 없는 숙명적인 방랑자로 이 골목 저 골목을 전전하였다. 혼자 딸을 키우는 일이 녹록치 않아서인지 후미코의 어머니는 행상을 하는 새아버지를 만났지만 싸구려 여인숙을 전전해야 했다. 이들은 잘 팔리는 품목을 갈아타며 행상에 나섰지만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해가 넘어가도 돌아가 편히 쉴 곳 없는 신세라 여인숙에서 지난한 생활을 잇고 있어도 튼튼한 몸만 믿고 열심히 일을 하자고 다짐하지만 곤궁한 현실의 벽은 철옹성처럼 견고했다. 광부를 상대로 장사를 하였지만 돌아갈 고향도 없이 돈벌이를 찾아 헤매야 하는 후미코 가족의 비루한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빌린 문짝을 엎고 그 위에 속옷을 늘어놓고 20전 균일 팻말을 걸고 장사를 하면서도 그녀는 책을 읽었다. 야시장 노점을 전전하는 행상의 고된 노동은 그녀의 자신감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렸지만 바보처럼 주눅 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지금 누군가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을까?’

   좀체 헤어나기 힘든 가난의 굴레에서 가난을 구제해 줄 누군가를 갈구할수록 현실은 엇박자를 놓으며 희망적 삶에서 멀어져 갔다.

 

   여느 사람들처럼 조촐한 밥상을 앞에 두고 편안히 밥을 먹는 일상적 삶조차 누릴 수 없는 그녀였지만 심미적 체험을 고양하는 시작(時作)을 멈추지 않았다. 창작 활동은 곤핍한 현실로 지쳐 있는 자신을 구원하며 고양된 영혼으로 황폐화된 삶을 넘어서는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시를 쓰며 밥벌이를 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후미코의 시는 밥 한 끼를 선물하지 못하였다. 문예지에 원고를 투고하고 받은 고료는 평가 절하되어 무명작가의 감성마저 갉아먹기 일쑤였다. 후미코는 돈이 들어오는 일거리를 찾아 직업소개소를 전전하며 일을 하지만 돈은 자신에게로 오지 않았다. 카페 종업원으로 일하며 손님이 없는 날에는 동화를 써 받은 원고료 중 일부를 어머니에게 송금하며 부모를 부양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면서 비틀거리며 살아내느라 기운을 소진하며 하루살이처럼 살고 있지만 그녀는 비루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남녀 사이의 인력이 작용해서인지 그녀 역시 몇몇 남자와 인연이 있었지만 다른 방향의 길을 걸어야 했다. 고향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를 반대하는 남자의 부모도 있었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한 몸 눕힐 공간도 없이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물질을 앞세워 그녀와 함께하려는 남자의 고백을 거절하였다. 그 후 그녀는 혼자도 버거운 생활에 글을 쓰는 노무라와 함께 지내며 그의 질책과 폭력을 견디기 힘들어져 그와 헤어졌다. 생계를 위해 나서는 의지가 희박한 새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하던 일도 내팽개쳐 빚만 늘어났다. 내 집에서 편안하게 쉬고 이튿날 아침 밥상을 마주하는 평온한 일상이 요원한 현실에서 야반도주라도 해야 살겠다는 어머니를 보면서 헤어나기 힘든 가난의 굴레에서 그녀는 숙명적인 방랑을 떠올렸을 것이다.

 

 

   비자발적인 방랑으로 살아온 후미코는 떠돌이 생활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죽을 때까지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동화와 야사를 써 생활고를 해결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가난은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일하며 받은 돈으로 동경하는 작가 체호프와 톨스토이의 삶이 드러나는 작품을 헌책방에서 구매함은 비장미를 더한다. 조용한 관조로 일상을 돌아보며 소박하지만 자기 나름의 멋진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은 책을 읽으며 더 강렬해졌다. 띄엄띄엄 받은 원고료와 일한 대가를 모아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도 있지만 후미코는 필요한 이들에게 돈을 전하는 온정주의자로 남았다.

 

    시인으로 살고 싶은 이상을 드러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벌이가 안 된다며 말린다. 피로를 풀고 쉬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방 한 칸이 없는 이가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누적된 생활고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필요로 한다. 후미코는 밥 한 그릇 제대로 먹는 게 특별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시 창작에 심혈을 기울인다.

   후지 산이여!

   너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여자가 홀로 여기 서 있다.

   너를 비웃는 여자가 여기 있다.

 

   후지 산이여 후지여

   활활 너의 불꽃 같은 정열이

   으르렁으르렁하며

   고집 센 이 여자의 목을 꺾을 때까지

   나는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기다리리. (142)

   살아남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냈던 후미코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창작의 열정은 일본의 최고봉인 후지 산에 고개 숙이지 않는 당당함으로 그려져 비장감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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