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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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에 따른 삼라만상의 변화는 세월의 더께만큼이나 다양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자욱한 먼지 속에 피어난 벚꽃은 탄성을 몰고 오는 튀밥처럼 튀어 올라 화사함을 더한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움틔우는 몸짓은 활기를 더하고 지쳐 있던 마음까지 바로 세우는 힘이 있다. 태어난 지 오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와 이복동생,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는 로즈는 가난한 지역의 누추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타인의 눈에 나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역부족이었다. 로즈는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다가도 자신의 생각을 피력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뜻을 비치고 이를 트집 잡은 새어머니 플로는 초반에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로즈의 언행을 문제 삼았다. 이를 빌미삼아 딸을 잔혹하게 매질하던 아버지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과장된 연기도 서슴지 않았다.

 

어둡고 흐릿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일을 플로는 역겹게 여기며 가족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헛간에서 놀음하는 공동체로 안정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사랑으로 서로의 부정적인 면까지 포용하며 지낼 수 있어야 하는데 로즈는 안온한 분위기와는 먼 비루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더했다. 예민한 감수성에 결핍을 견디기 힘든 사춘기 시절 변두리 학교에 다닐 때에도 도처에 자리하는 폭력의 표적에서 비껴나려는 노력은 본심을 숨기고 체제에 순응하며 버텨내야 했다. 재래식 변소를 들락거리며 배설하고, 아이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따르며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로즈는 연기하며 살아가는 생활에 젖어갔다.

 

아들로 태어나 별다른 노력 없이 특권을 누리며 인정받고 지내는 남동생과 달리 딸로 태어난 로즈는 안정적인 생활을 갈구하며 누추한 환경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했다.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니는 로즈는 누군가의 후원이 없으면 학업을 지속하기도 힘든 상황이라 학비와 용돈 걱정 없이 생활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욕망의 끈이 닿지 않을 공간으로 머무르는 시선을 거두면서도 걱정 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일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

 

결핍으로 점철된 그녀와는 달리 가진 게 많은 패트릭을 만나 사랑을 가장하며 만남을 이어갔다. 남루한 생활을 잇는 처지에서도 영민함을 지닌 로즈에게 끌린 소심한 역사학도 패트릭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백화점 소유주의 아들로 중산층 가정의 자제로 그와 결혼한다면 안정적 생활로 진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가진 것이 없어 자립을 꿈꾸기도 힘든 고단한 생활과 결별하고 싶은 바람이 큰 그녀는 이른 나이에 고심하지 않고 패트릭과의 결혼을 선택하였다. 이후 그는 그녀를 위해 역사 공부는 팽개치고 백화점 후계자가 되기로 마음먹고는 심신을 단련하기보다는 집의 외장을 화려하게 꾸미고 사람들을 초대해 집을 자랑하였다.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라는 패트릭의 말은 파경을 배태하고 있었다. 거지 소녀는 패트릭이 좋아하는 이미지에 불과하였다. 인간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중산층의 속물근성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 경계선에 발을 들여놓고 안정적인 생활을 잇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사랑의 축복으로 귀결되는 결혼 생활과는 멀어진 가정은 파경으로 치달았고 로즈는 성적 일탈을 감행하며 자유로운 사랑을 구가하였다. 가난한 생활로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조슬린 부부와 소통하며 갖지 못한 부분을 공유해왔지만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정서적으로 공감하며 지내고 싶은 남자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가 떠나는 게 두려워 마음을 정리하는 편지를 썼으나  췌장암을  앓다 죽은 사이먼의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사이먼의 소식을 전한 이의 말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임의대로 판단하고 해석한 로즈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여겨진다. 가난했던 시절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경멸하던 조슬린은 부자가 된 뒤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띠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이들의 내재적 욕망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러 지역을 떠돌며 고독하게 지냈던 시간들을 정리하고 살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새어머니 플로는 스스로를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플로는 타인의 도움을 받는데 반감을 드러내며 고집을 드러냈다.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 준 정신적 근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는 요양원으로 가면서도 정신만은 챙기려 애썼다.

 

 상대방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가난한 지역에서의 불안에서 도피해서라도  안정적인 생활을 바랐지만 행복한 생활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떤 남자 때문에 떠나야 했고, 어떤 남자에게 버림받는 게 두려워서 편지를 쓰고 치욕을 느끼면서 또 다른 희망을 품는 아이러니는 로즈 자신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러 경험 속에 기대가 꺾이며 맞닥뜨린 실망과 좌절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일 때도 있었지만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노려도 스스로 행할 때 의미 있음을 알아차리고 타인의 태도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온 로즈는 새어머니 플로의 삶을 통해 인간은 소멸을 향해 가는 유기체임을 일깨우며 그림 속 이미지에서 탈피해 스스로 주인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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