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능률도 오르지 않는 책을 붙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느니 차라리 의미 있는 곳으로 답사를 다녀오자고 벼르던 차 한민족 역사 기행을 고등학생인 딸과 다녀왔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과 고구려·발해·항일운동 유적지를 순례하는 78일 간의 일정을 소화해내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곳곳에 스민 우리의 웅혼한 민족혼에 전율하였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가는 답사로 기억 속에 지리멸렬하게 웅크리고 있는 역사에 대한 이해를 드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연변 회룡시 들판에 방치된 나철, 서일, 김교헌 대종교 세 지도자의 묘지를 찾아 벌초를 하고, 다례를 올리고 참배하며 민족 지도자들의 숭고한 애국심에 숙연해졌다.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던 대종교인들이 국권을 빼앗긴 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해 홍익인간의 이념을 살려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창시하고, 청산리전투 등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30만 신도 중 10만 명이 목숨을 바쳤으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니 아쉬움이 더했다.


   1905년 을사조약을 발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을 주재시켜 이른바 보호정치를 시행하다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를 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하였다. 대한제국을 일본에 강제로 병합시키고 동화정책(同化政策)을 내세운 무단통치로 공포 정치를 방불케 했다. 조선 총독은 막강한 지위와 권한을 가지고 항일 세력을 진압하고 러시아를 방어하며 대륙 진출을 준비했다. 접촉하고 있는 이웃 나라의 형세가 자국의 주권선 안위와 긴밀하게 관련 있는 이익선 확보를 위한 전초지로 조선을 공략했다. 동일 조상, 타율성론, 정체성론, 임나일본부설 등으로 내선일체를 주창하며 일본의 무력 진압으로 강요된 동화는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황국신민화를 부추겼다.


  충량한 신민 육성을 위해 식민지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국어를 일본어로 삼고 천황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수신 과목을 필수 교과로 삼았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모방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공포하여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아 일본의 이익을 실현해갔다. 강제병합 협력자로 작위를 받은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에 이름을 올린 정미칠적은 친일의 삶을 본격화하였다. 일본의 토지조사 사업으로 소작농은 늘어났고, 소작농 위에 군림하는 지주와 일본의 주구들은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조선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해 간도와 하와이 등지로 이주해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굶주림에서 허덕이던 민중들이 조국을 떠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데 힘을 보태며 일본의 노예처럼 살기보다는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고 싶은 바람을 일으켰다. 상하이를 독립운동의 무대로 삼아 독립을 위한 항전의 방편으로 망명을 선택한 이들도 늘어났다. 신민회는 국권회복·공화제 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구습을 타파하고 실업을 장려하는 교육 진흥 등을 내세웠다. 맹렬히 일어난 의병항쟁은 계몽 운동가들을 각성시켜 비밀 결사를 조직해 민족의식 교육과 독립군 양성 활동의 불씨로 작용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에 이어 이재명은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가격했으나 실패하여 24세에 사형대에 올랐다.


   191931일 종교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위한 비폭력 대중화를 표방하였지만 강경한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여 폭력적 혁명으로 전화했다. 4월이 지나 만세 운동은 잦아들었지만 이를 통해 조선 민중은 각성하여 외세의 도움 없이 조국의 독립을 이뤄야 함을 명확히 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파리 강화 회의에 임시정부 인사들은 조선의 독립을 거론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강대국들의 외면으로 조선 문제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국권 회복을 위한 움직임은 여러 단체로 파생됐다.


   3·1 만세 운동으로 무단통치가 실패하자 하라 내각은 문화 통치로 내선 융화를 내세우며 조선인이 일본인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일본 신민을 기르는 동화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총독부는 참정론·자치론·문화 운동 등을 앞세워 민족운동 진영 분열을 조장하였고, 결성된 친일 단체에는 활동지원금을 후원하며 일본은 제국주의의 야욕을 채워갔다. 거세게 짓밟을수록 강하게 일어나는 들불처럼 독립군들은 정의를 실천하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잇달아 대패한 일본은 그 앙갚음으로 우리 민족 수만 명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낳았고, 이는 의열단의 항일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보복성 탄압이 거세어도 걷잡을 수 없이 번진 조선의 독립운동은 최후의 일인이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것임을 선언하고 대중적인 운동으로 발전해갔다.


   2019년은 국권 피탈 후 자주 독립을 염원하며 3·1 만세 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맹렬하게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외침으로 얼룩진 민족의 역사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제의 탄압에 맞서 백성이 주인 되는 대한민국 수립 운동을 위한 대응은 전략상 문제를 낳기도 하였지만 지난한 시간 지속적인 항일 투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무단통치와 시작된 저항 세력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강도짓을 일삼는 일본과 그 주구를 궤멸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으며 대중을 각성시켜 독립운동으로 이끌었다.


   3·1 만세 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서도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은,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흔들림 없는 투쟁 의지를 보이다 일본 경찰의 지독한 고문으로옥중에서 사망했다. 강대국의 침략으로 주권을 잃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기보다는 권력을 쥐고 흔드는 외세에 붙어 자신의 영화를 추구한 이들의 후손들이 기득권으로 자리하고 있는 지금, 나라의 진정한 국권 회복을 위해 친일 잔재 청산은 해결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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