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시를 말하다
시에 대하여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무슨 말을 할까?
철학적이면서도 선문답 같기도 하다.
평소에 시를 대할 때, 깊이 생각할 필요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시란 그냥 시라고 생각했다.
좀 더 이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시란 일전한 내재적 운율을 가진 아름다운 생각을 글로 정리한 것이다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의 꿈이 시인이었다.
왜 시인이 되려고 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도 설명도 할 수가 없다.
단지 뜬 구름 잡는 심정이랄까 그저 막연한 동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기도 한다.
학창 시절 나는 공부시간에도 공상에 젖는 시간이 많았고, 그 때 당시만해도 10월 9일 한글날을 기해 열리는 백일장 같은 행사에 참여하여 장원은 한 기억이 없지만 시 부문에서 장려상을 몇 번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는 그 이력이 당연히 시인의 가능성과 자질을 확인하는 명분이 되었고, 그럴수록 시에 심취되어 학교 공부에도 지장을 줄 정도로 열심이었다.
각 언론사에서 매년 모집하는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해 보았지만 번번히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만 했다.
나에게 시가 무너냐고 묻는다면, 지금도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시란 시 그 자체를 손대지 않고 보호해 주는 것이 시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한다.
어줍잖고 설익은 이론으로 시를 설명하는 것은 시에 대한 비례이며, 불경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 책은 20여 년간 시인으로써 활동하는 시인이 동서고금의 시인들의 아포리즘을 소록한 책이다. 이 책에서 모든 시인들은 한결같이 시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시에 대하여 내로라하는 시인들조차 이 정도이니 시를 모르는 범부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역으로 설명한다면, 시가 이토록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은 시를 쓰고 있는 것이며, 감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본다면, 시란 처음부터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거나 아예 없었던 그 무엇인지 모른다.
시는 그저 감상과 생각을 적어 놓는다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란, 감상과 생각 그 이상인 영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잘 된 시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위무시키며, 인생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 시를 쓴 시인조차도 감동시키지 못한 시로는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가 없다.
이 책은 하얀 공간이 텅 비어 있음이 시원함과 사유의 자유를 준다.
글을 읽으며, 그 행간의 의미를 더 자유롭게 내가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이해한다.
시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빌려 흘러나오는 우주의 노래’라고 하는 이도 있고, 정호승같은 시인은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시란 사람과 일체임을 확인한 대 발견에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