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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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를 비롯해 <인생>, <형제>까지 시대의 비극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민중의 삶에 천착하는 위화는 찰라의 순간에 녹아드는 인생의 유머와 피폐함 속에서도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위화의 소설들이 참 좋다.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 하나 마음에 남지 않는 이가 없다. 이것도 위화만의 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천융량 부부의 경우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스냅사진처럼 딱 찍혀지는 느낌인데, 예를 들면 린바이자 대신 천야오우에게 인질이 되라는 부분에서 내가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이러한 (꽤 많은) 장면들이 그순간 찰칵! 찍히듯 기억에 남아 있다. 린샹푸는 그의 인생 자체가 한 점의 수묵화 병풍처럼 남아 있고, 샤오메이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고 애잔하다. 아마 그들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 터다. 그래서 더 그들의 발걸음에 마음이 간다. 책장을 넘기며 아창이 차라리 샤오메이를 기다리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갔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의 죽음에서 순간적으로 울컥하고 말았다. 17년만에 찾은 고향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한 채 맞은 죽음에 괜스레 내가 더 서러워졌더랬다. 연신 눈물을 훔치며 그를 대신하는 이 설움이 가시기도 전에 만행이 다시 시작되는 상황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세상은, 시대는 누군가의 슬픔과 누군가를 향한 애도를 기꺼이 기다려 주지 않았었지'라고. 그리고 소설을 이어 읽으면서 또 다시 든 생각은, '그래, 그의 삶이 서럽다 여긴 건 내 생각이었구나'라고. (나는 지금 쓰면서도 목이 메어...) 


ㅡ 


그들의 운명을 이토록 꼬아 놓은 건 누구일까. 
누구에서부터,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소설에 등장하는 토비들처럼 절대악인(이 아닌 토비도 있었지만)이 아니라면, 시대의 운명에 있어 개인의 힘은 미미하기에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는 모호할 따름이다. 잠시 쉬어가자했던 그 짧은 만남이 한 남자의 굴곡진 인생을 만들어 갔을 줄은 그들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샤오메이가 안고 살아야했을 그 깊은 고독과 아픔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나.  


이 소설에는 운명을 처절하게 원망하며 이겨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은 운명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신이 지켜내야할 것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며 또 다시 몸을 일으킨다. 읽으면서 겸허히 느꼈던 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체념도, 패배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혈연과 상관없는 애끓는 가족애를 갖고 있는 천융량 부부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타인을 향한 선善과 도리.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무모해보일지언정, 세상은 사람으로 인해 살아갈 만한 것임을, 위화의 소설들이 전해준다. 


머릿속에서 한편의 흑백 영화처럼 남는 소설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뎦는 순간까지 울어서 찐득해진 눈을 비볐다. 
이 여운을 어쩌나... . 



사족.
위화의 소설들이 다 그렇지만, <원청>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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