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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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동자가 가장 훌륭한 노동자일까요?"
"가장 값싼 노동자지요. 부려먹기에 가장 경제적인 노동자요."  

 






그래픽노블 버전이다. 다 읽고나니 원작 희곡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읽다보면 내용이 단순하지 않다. 인류 종말 앞에 인간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더구나 AI가 점점 더 보편화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보다 더 깊게 생각해봐야할 지점들이 상당수다.  


이야기 속에서 과학 기술을 추앙하는 이들의 말처럼 산책, 예술, 동식물과의 교감 등의 행위와 거기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는 것을 쓸데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다. 또한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함으로써 물질의 노예로 사는 삶은 끝이 날 것이고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을 하게 될 것이라는 부분 역시 온전히 받아들일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알퀴스트처럼 과학기술을 무조건적으로 증오하는 이는 더더욱 없을 터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전혀 극단적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책 속에서 지금의 우리 모습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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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들은 로봇을 만드는 이유가 오로지 노동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알퀴스트는  노동, 노동에 따른 피로, 봉사 등 힘들지만 보람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삶에 대해 말하지만, 해리는 앞으로 사라질 것들에 대해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한다.


10년 후 그들 눈앞에 도래한 세상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꽤 많은 부분 겹쳐진다. 일상의 편리함에 만족하는 한편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부분들을 자동화라는 이름으로 AI(로봇)가 깊고 넓게 차지하는지 놀랄 지경이다. 제조업 생산 라인은 말할 것 없고, 위험 직업군, 은행, 고속도로, 식당과 마트를 비롯한 편의시설, 유원지와 문화시설 등 눈에 띄게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출산을 멈추게 되는데, 현재 세계 곳곳, 특히 경제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는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심각을 넘어서고 있다. 또한 인간에게 실리적이고 소비되지 않는 생명체들은 필요에 따라 개종하고 멸종시키기 일쑤다. 또한 생산의 주체가 수요임을 들어 로봇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구매, 사용, 폐기 처분까지의 과정에 동참한 모든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음을 짚는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을까? 사라져가는 인간의 노동과 일자리, 저출산, 삶의 자유 등 어떤 것에도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효율성과 생산성과 가성비를 따지는 동안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종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생명의 자연성을 인간의 편의와 이기에 맞게 개조하는 오만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성과 감정들을 꼬집으면서 알퀴스트를 통해 인간의 마지막 과업은 역설적으로 비생산성에 있음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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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몇 가지 지점은, 


헬레나가 일하는 인권연맹에서 원하는 것은 로봇들의 보호이고, 궁극적으로 로봇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한다. 헬레나가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의 로봇들에게는 자유의 개념 아예 없었다. 그런데 도서관 로봇 라디우스가 자아를 각성하면서 인간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그럴 수 없다면 분쇄기로 보내달라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로봇이 원하는 것은 정작 자유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인데,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헬레나는 남편과 이사진들에게 제발 공장을 폐쇄하자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해리는 오히려 나라마다 공장을 세워 생산확대 및 대량생산 예정을 말한다. 더하여 각국의 공장에서 생산된 로봇이 다른 공장의 로봇을 죽을 때까지 증오하도록 교육시키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로봇 라디우스 말과 다른 듯 하지만 묘하게 일치한다. 


섬을 장악하고 인간을 몰살 한 뒤 로봇이 외치는 구호는 "로봇들이여, 일터로!"다. 즉 노동이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자 목표인 셈이다. 그런데 읽을 때에는 인간과 로봇의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쓰다보니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수단이 아닌 듯하다.  


로봇 연구자 갈이 로봇의 기질을 인간으로 바꿈으로써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갈은 왜 독단적으로 로봇의 기질을 인간적으로 바꿨을까? 헬레나는 로봇이 인간을 증오할까봐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녀가 갖은 두려움의 기저는 무엇일까? 독자들이 각자 생각해보면 좋을 듯 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퀴스트.
알퀴스트가 갖는 희망의 두 객체.  


인간이 멸종된다면 로봇도 살아남을 수 없다.
21세기 첨단 시대에 로봇의 반격이 두려워 그들 없는 세상을 살기에는, 인간은 '편리함'이라는 달콤함을 버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원론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혜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우리는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각자 상상하는 '더 좋은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고민해볼 일이다.   



원작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황이 스멀스멀 시작될 무렵에 출간한 점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에서 다루어지는 요소들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전쟁, 가난, 노동, 독재, 인간성 말살 등 인간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는데 상대적으로 기술은 발달하고 있다. 1920년대에 쓰여진 이 작품이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텐데 오히려 지금이 더 읽기에 더 적절한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카렐 차페크는 모 광고의 카피처럼 '사람이 희망'임을 놓치 않는다. 
마지막장의 그림은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독자의 눈에 콱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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