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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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동자가 가장 훌륭한 노동자일까요?"
"가장 값싼 노동자지요. 부려먹기에 가장 경제적인 노동자요."  

 






그래픽노블 버전이다. 다 읽고나니 원작 희곡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읽다보면 내용이 단순하지 않다. 인류 종말 앞에 인간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더구나 AI가 점점 더 보편화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보다 더 깊게 생각해봐야할 지점들이 상당수다.  


이야기 속에서 과학 기술을 추앙하는 이들의 말처럼 산책, 예술, 동식물과의 교감 등의 행위와 거기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는 것을 쓸데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다. 또한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함으로써 물질의 노예로 사는 삶은 끝이 날 것이고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을 하게 될 것이라는 부분 역시 온전히 받아들일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알퀴스트처럼 과학기술을 무조건적으로 증오하는 이는 더더욱 없을 터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전혀 극단적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책 속에서 지금의 우리 모습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ㅡ 


생산자들은 로봇을 만드는 이유가 오로지 노동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알퀴스트는  노동, 노동에 따른 피로, 봉사 등 힘들지만 보람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삶에 대해 말하지만, 해리는 앞으로 사라질 것들에 대해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한다.


10년 후 그들 눈앞에 도래한 세상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꽤 많은 부분 겹쳐진다. 일상의 편리함에 만족하는 한편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부분들을 자동화라는 이름으로 AI(로봇)가 깊고 넓게 차지하는지 놀랄 지경이다. 제조업 생산 라인은 말할 것 없고, 위험 직업군, 은행, 고속도로, 식당과 마트를 비롯한 편의시설, 유원지와 문화시설 등 눈에 띄게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출산을 멈추게 되는데, 현재 세계 곳곳, 특히 경제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는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심각을 넘어서고 있다. 또한 인간에게 실리적이고 소비되지 않는 생명체들은 필요에 따라 개종하고 멸종시키기 일쑤다. 또한 생산의 주체가 수요임을 들어 로봇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구매, 사용, 폐기 처분까지의 과정에 동참한 모든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음을 짚는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을까? 사라져가는 인간의 노동과 일자리, 저출산, 삶의 자유 등 어떤 것에도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효율성과 생산성과 가성비를 따지는 동안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종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생명의 자연성을 인간의 편의와 이기에 맞게 개조하는 오만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성과 감정들을 꼬집으면서 알퀴스트를 통해 인간의 마지막 과업은 역설적으로 비생산성에 있음을 얘기한다.  


ㅡ  


흥미로운 몇 가지 지점은, 


헬레나가 일하는 인권연맹에서 원하는 것은 로봇들의 보호이고, 궁극적으로 로봇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한다. 헬레나가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의 로봇들에게는 자유의 개념 아예 없었다. 그런데 도서관 로봇 라디우스가 자아를 각성하면서 인간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그럴 수 없다면 분쇄기로 보내달라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로봇이 원하는 것은 정작 자유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인데,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헬레나는 남편과 이사진들에게 제발 공장을 폐쇄하자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해리는 오히려 나라마다 공장을 세워 생산확대 및 대량생산 예정을 말한다. 더하여 각국의 공장에서 생산된 로봇이 다른 공장의 로봇을 죽을 때까지 증오하도록 교육시키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로봇 라디우스 말과 다른 듯 하지만 묘하게 일치한다. 


섬을 장악하고 인간을 몰살 한 뒤 로봇이 외치는 구호는 "로봇들이여, 일터로!"다. 즉 노동이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자 목표인 셈이다. 그런데 읽을 때에는 인간과 로봇의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쓰다보니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수단이 아닌 듯하다.  


로봇 연구자 갈이 로봇의 기질을 인간으로 바꿈으로써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갈은 왜 독단적으로 로봇의 기질을 인간적으로 바꿨을까? 헬레나는 로봇이 인간을 증오할까봐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녀가 갖은 두려움의 기저는 무엇일까? 독자들이 각자 생각해보면 좋을 듯 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퀴스트.
알퀴스트가 갖는 희망의 두 객체.  


인간이 멸종된다면 로봇도 살아남을 수 없다.
21세기 첨단 시대에 로봇의 반격이 두려워 그들 없는 세상을 살기에는, 인간은 '편리함'이라는 달콤함을 버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원론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혜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우리는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각자 상상하는 '더 좋은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고민해볼 일이다.   



원작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황이 스멀스멀 시작될 무렵에 출간한 점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에서 다루어지는 요소들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전쟁, 가난, 노동, 독재, 인간성 말살 등 인간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는데 상대적으로 기술은 발달하고 있다. 1920년대에 쓰여진 이 작품이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텐데 오히려 지금이 더 읽기에 더 적절한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카렐 차페크는 모 광고의 카피처럼 '사람이 희망'임을 놓치 않는다. 
마지막장의 그림은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독자의 눈에 콱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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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발명된 신화 -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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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스라엘의 기원을 시작으로 유대인 추방의 신화, 유대인공동체 및 정체성, 유대인 음모론과 반유대주의, 시오니즘, 이스라엘의 우경화, 그리고 현재 여전히 심각한 국제 문제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 및 중동 분쟁과 미국 트럼프 정부와의 관계 시점까지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이 겨루려는 대상은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얽힌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놓고 극단적 편항으로 양분된 일반인들의 인식임을 밝히면서 유대인은 역사가 만들어낸 산물임을 인식함으로써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극단적인 편향 인식을 교정하는 데에 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흩어져,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던 것은 고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유랑의 결과가 아니다. 애초부터 다양한 지역에서 흩어져 살며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당시 시대의 필요에 의해 유대교로 개종한 뒤 기독교 세계에서 차별받는 분리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농민으로 속박된 삶을 살았던 기독교도와는 달리 유대인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신 교육과 이동의 자유가 있었다. 그들은 상업과 금융에 종사하며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산업 사회에서 우위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질시와 혐오는 근현대 들어서면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의해 강화됐고, 유대인 음모론과 홀로코스트까지 이어졌다. 유대인들은 각자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동화나 이주를 선택했고, 종교 및 역사적 시오니즘에서 정치적 시오니즘으로 전화시키며 현대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생경하면서도 재미있을 부분은 고대부터 근대 이전의 유대인 궤적과 정체성일 듯 하다. 저자의 지적처럼 고대 유대 주민의 후예임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사실 지중해 전역의 다양한 지역 출신의 후예이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대 원주민의 후예일 가능성이 더 크다. 


박해와 유랑의 서사,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성서의 계시, 유대교의 개종 및 포교와 신자의 증감 등이 오류와 짜집기로 만들어진 신화이며, 후대에는 현대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민족적 이데올로기로 활용됐음을 하나하나 짚어간다. 더하여 유대인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주변의 강요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그들 또한 강요된 정체성을 스스로 강화하며 주변의 차별과 억압에 대응했고, 유대교 신자에서 출발해 종교 공동체를 거쳐 종족적 의미의 유대인 집단에 이어 민족과 인종 집단으로까지 나아갔음을 서술한다.  


ㅡ 


우리가 알다시피 2차대전 뒤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허락하는 유엔 결의안을 채택했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은 기나긴 싸움과 협정을 거쳐 무산됐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사보타주도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무관심했던 주변 아랍 국가들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현대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드러나는 핵심 사안은 그 땅의 정당한 권리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설령 고대에 유대인이 그 땅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기존 주민을 일방적으로 몰아내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무엇보다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이 정통한 유대 주민ㅡ유대교가 아닌ㅡ일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그들이 내세우는 조상의 땅이라는 주장도 역사적 신빙성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120년 전부터 그 땅에 들어왔다. 그 세월 동안 토지를 매입하고 정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프라를 구축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도시를 건설했다. 120년이라는 세월과 그들의 노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저자는 유대인이과 팔레스타인 모두 그 땅에 살 권리와 당위는 충분하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책을 읽다보면 어디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다시 시작을 해야하는지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ㅡ 


현대 이스라엘 정부가 내놓은 역사적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고 모순되는 부분이 상당하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텅 빈 땅'이었다는 둥, 무슬림 정복 당시 유대교도들을 추방했다는 둥, 심지어 시오니스트도 인정한 팔레스타인 주민이 유대 주민의 후예임을 인정하는 유대 기원론 삭제까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거리다.   


이스라엘 건국은 박해받는 민족(집단)의 자구책이었으나,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또 다른 차별과 배제를 만들었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이스라엘 건국 정당성을 찾는 동시에 그들을 짓밟았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다. 저자는 이를 유대인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음을 얘기한다. 유대인 문제는 서양 기독교 문명이 만들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기독교 문명에 입각한 패권국가가 만든 국제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오니즘이 정치적으로 전환되고 거기다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팔레스타인(중동) 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이 되어갔다. 아랍계 주민과의 공존을 염두에 두지 않는 유대인, 정작 직접적으로 대립을 야기시켜 놓고도 근본적인 해결보다 야심에 급급한 서방 국가, 이에 못지 않은 주변 아랍 국가들, 그리고 중재자가 되어야 하건만 오히려 진짜 전쟁의 서막을 올려버린 유엔까지. 이 모든 고통의 당사자는 팔레스타인 주민이다. 탁자 앞에서 떠들고 있는 자들이 아니고. 


해당하는 두 나라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잇속까지 맞물려 꼬일대로 꼬인 실타래를 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가 그랬던가.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하라고. 그 기본이 거짓과 차별, 탐욕과 독단이 아닌 근거에 입각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타협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역사의 굴레에서 억압받는 피해자에서 폭력적 가해자가 되는 건 어느 한 나라만 해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담론에서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자유롭지 않다. 또한 국가 내 사회집단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피해자와 가해자의 순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잊지 말기를.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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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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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여섯 편의 소설들이 그동안 내가 읽어왔던 헤밍웨이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아마 이전에 읽은 책들이 대부분 장편이기 때문이지 싶다. 올해 안에 헤밍웨이의 단편선 한 권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돈, 여자, 거짓된 사랑, 여행, 화려하고 방탕했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타인의 처절한 투쟁과 고통을 지켜봤던 날들 뒤에 찾아온 슬럼프와 삶의 회의. 이런 삶이라면, 이토록 피곤한 삶이라면 그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남자,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 서로를 팔아버리듯 사랑한 두 남녀. 언젠간 찾아올 거라 예견한 죽음에 대한 기다림. 사랑은 둘이, 책임은 혼자. 강간이 사랑을 정당화하지 않음을 생각치 못하는 파렴치한 무지. 머리를 자르고, 고양이를 들여도 해소되지 않을 외로움.  


ㅡ 


이 책에는 여성의 관점에서 쓴 작품이 세 편 있다. 낙태와 강간. 내가 읽은 헤밍웨이의 작품 중 이런 소재를 중심내용으로 다룬 소설은 기억에 거의 없다. 그런데 두 단편에서 헤밍웨이의 입장은 전달되지 않는다. "그냥 이렇다고"라고 말하는 정도의 느낌이 전부다. 



내가 이 책에서 두 번 읽은 작품은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다. 한 번 읽었을 때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다. 두 번째 읽을 때 원서까지 뒤져서 같이 읽었다는(어지간해서는 원서를 안 읽는다. 내가 어떤 번역가보다 영어 실력이 더 나을리가 없기 때문에). 아무튼 이 소설은 두 남녀가 낙태를 두고 벌이는 대화이고, 결론은 없다. 남성은 임신한 연인에게 낙태를 집요하게 설득한다. 임신 즉 아이는 두 사람 사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고, 중절 수술은 수술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는 간단한 일이며, 낙태만 한다면 그들은 지금처럼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남자의 요지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럼에도 네가 원하는대로 하라고, 변함없이 너를 사랑할테고 기꺼이 동참하겠지만, 자신에게는 의미없는 일이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책임은 여자의 몫임을 넌지시 내비치면서. 여자는 바로 알아챈다. 그는 '나'를 걱정하지 않음을, 뱃속의 아이는 내다버려도 되는 '흰 코끼리'와 다름하지 않음을.  


소설 속 여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내가 남자에게 한마디 보태자면, 여보세요, 그 간단한 수술대 위에 눕는 당사자는 당신이 아니랍니다. 이 소설에서는 여자의 낙태 여부, 혹은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고자한 건 아닌 것 같다. 임신과 낙태의 선택권이 누구에게 우선적으로 쥐어져야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싶다.  


ㅡ 


그리고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외로움. 
삶의 회한, 독선적인 사랑,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위로와 걱정 한 마디 들을 수 없고, 둘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지독한, 바로 그 외로움.  


이런 측면에 있어서 보자면 <킬리만자로의 눈>과 <빗속의 고양이>가 대비된다. 전자가 남자의 외로움이라면 후자는 여자의 외로움이다. 그런데 두 소설이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입장의 차이가 보인다. 어째 연인이든 부부든, 외로운 사람이 누구든 간에 감정적으로 약자는 여자로 그려진다(내가 그렇게 읽은 건지도 모르고). 재미있는 점은 두 소설 다 외로움을 내비치는 상대에게 그들의 짝꿍이 던지는 말은 "제발 입 좀 다물라"는 것. 그리고 <미시간 북부에서>의 남자 역시 두려워하는 여자를 무심하게 외면한다.  


외로움은 소통과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일텐데, 외롭다고 호소하는 그들에게 대놓고 말을 차단하는 것은 상대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의지조차 없는,참 냉정하고 답답한 일이다.   


ㅡ 


실제로 한 곳에 거주하기보다는 유랑하듯 여기저기 머물던 작가의 이력 덕분인지 아프리카, 스페인, 이탈리아 등 이 짧은 소설들의 배경이 참 다양하다.   


삶이 늘 계획대로 따라가지는 것도 아니고, 안달복달한다고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는 마음, 그리고 결과에 마음 다치지 말자는 다짐.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이제 나도 정말 나이를 먹어가나보다.  




사족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여자는 사냥과 아프리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의 단면이 보이는 듯 하다. 물론 이후에 말에서 '사냥을 할 수 있는' 아프리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참 모순적이면서 동시에 해리와 자신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행복한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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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처 마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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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 줘, 살려 달라고!" 


해초 한 쪼가리 보이지 않는 바닷물속에서 구명대를 지지삼아 부유하며 망망대해에 홀로 조난된 남자. 살기위해 배로 보이는 물체를 향해 헤엄치고 미친듯이 소리 지르며 발버둥치지만 돌아오는 건 그 자신의 헉헉대는 호흡과 물소리가 전부다.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려지는 기억들. 자신이 살아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소설은 바다 한가운데서 조난당한 크리스토퍼 마틴이 조여오는 죽음의 공포에 대면한 현재와 그와중에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을 오가며 서술한다. 


그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로지 살아남는 데에 머리 회전이 돌아가고, 몸이 움직인다. 암석 위에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삿갓조개'처럼 몸을 웅크려야 하고, 물 한모금을 마시기 위해서는 바다표범처럼 몸의 앞쪽을 들어올리고 고개를 내려놓은 채 가만히 있어야 한다. 생존에 초점이 맞춰진 모든 행위 앞에서 마틴은 스스로에게 지성인임을 꾸준히 각인시킨다. 그가 살겠다고 별짓을 다 하면서도 집착하는 한 가지는 '지성'이다.  


ㅡ 


"난 안 죽을 거야! 안 죽을 거라고!"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생각해"
"나는 지성적이다."
"쉼터, 쉼터를 마련해야 해."
"너 포기하면 안 돼."
"해야만 해. 해아만."
"정신 차리자. 교육과 지성으로."
"난 오늘 구조될 거야."
"나는 예전의 나 그대로다."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롭다고!" 


마틴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는 말들이다. 
머릿속 한 켠에서는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라고, 삶을 놓아주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삶의 끈을 놓지 못한다. 처절한 외로움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로 인해 마틴은 스스로를 광기로 몰아간다.  


그러던 중, 재킷 안쪽에서 다 젖은 소책자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사진과 신분증을 보면서 마치 그동안 몰랐던 것인 양 자신이 영국 해군 대위 크리스토퍼 해들리 마틴이라는 사실을 각성한다. 그는 자신이 지성인임을 또다시 되뇌이며 바다를 향해 이기고 말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를 달리한다. 바닷물에 절어서 벗어던진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고, 거추장스러워 벗어버린 방수 장화가 아쉬워진다. 다 젖어버린 신분증이 다시 문명 세계로 향한 티켓인 것처럼.  



마틴은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암석에서부터 해군, 극단, 대학, 학창 시절, 지하실에 갇혔던 어린 시절까지 되돌아 간다. 그의 뇌리에서 친숙하면서도 떠나지 않았던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아직 미치지 않고 제정신인지 수시로 확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장 처한 상황에서 광기보다 나쁜 것은 제정신이라고 말하는 그는, 종단에 이르서 무엇이 더 나은 건지조차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마틴의 절규처럼 우리를 으스러뜨리는 건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마틴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던 까닭이 그가 조난된 이유와 연관이 있을까? 마치 정신착란증세처럼 보이는 마틴의 모습은 조난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의식과 무의식, 환시와 환청을 오가는 마틴에게 누군가가 묻는 한 마디.  


"이제 할 만큼 했나, 크리스토퍼?"
마틴은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다고 대답한다. 신도 천국도 인간이 지어낸 창조물이고, 지금 처한 현실을 이끌어낸 것 역시 인간 본인이라는 것. 즉 소설은 마틴의 상황을 극단적 설정했을 뿐 대부분의 인간은 소통의 부재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고 있으며, 이를 지성인이라는 허위로 감추고 있음을 얘기한다.  



소설 속에서 마틴은 혼잣말의 대가다. 이 증상이 미쳐서인지, 미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지, 그것도 아니면 생존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마틴이 생존을 포기하지 말라고 스스르를 끊임없이 다그친 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작가 자신도 그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틴,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아직까지는). 꽤 오래 전에 이 말을 했을 때 한 선배로부터 "넌, 인생이 살만한가보다"라는 조소 섞인 말을 들어야했다. 사람마다 '살만한' 인생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그것보다 죽는 게 더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틴의 공포를 이해한다.  


이 소설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파리 대왕>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비행기와 배만 다를 뿐 조난자라는 설정부터 인간이 갖는 야만성과 악, 그리고 살고자하는 갈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문명이라는 허위가 그렇다. 차이라면 개인과 집단에 있겠다. 아직 <파리 대왕>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두 권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사족 
마지막 문장에서 뜨악! 진정한 반전일세. 




118.
"전 살아남느라 바쁩니다. 이 암석을 이름들로 투망질해 두고 길들이고 있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어떤 것에 이름이 주어진다는 건 인장이자 사슬이 주어진다는 거거든요. 이 암석이 나를 제 방식에 맞추려고 들면 나는 거부하고 이 암석을 내 방식에 맞출 거예요.(...) 이 암석을 이름들로 묶어 둘 겁니다. 암석이 흡묵지로 나를 소멸시키려고 들며, 그럼 내 말들이 울려 퍼지고 현저한 소리들이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시켜 주는 이 안쪽에서 말할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들을 자아내기 위한 정교한 공작 기계로서 내 뇌를 사용할 겁니다. 안위를, 안전을, 구조를. 그러므로 나는 내일을 생각의 날로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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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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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두 작가가 만났다. 츠바이크와 발자크. 발자크 평전으로도 충분히 읽을 이유가 되는데, 저자가 츠바이크라면 말하기 입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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