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처 마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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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 줘, 살려 달라고!" 


해초 한 쪼가리 보이지 않는 바닷물속에서 구명대를 지지삼아 부유하며 망망대해에 홀로 조난된 남자. 살기위해 배로 보이는 물체를 향해 헤엄치고 미친듯이 소리 지르며 발버둥치지만 돌아오는 건 그 자신의 헉헉대는 호흡과 물소리가 전부다. 머릿속에서 하나둘 떠올려지는 기억들. 자신이 살아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소설은 바다 한가운데서 조난당한 크리스토퍼 마틴이 조여오는 죽음의 공포에 대면한 현재와 그와중에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을 오가며 서술한다. 


그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로지 살아남는 데에 머리 회전이 돌아가고, 몸이 움직인다. 암석 위에서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삿갓조개'처럼 몸을 웅크려야 하고, 물 한모금을 마시기 위해서는 바다표범처럼 몸의 앞쪽을 들어올리고 고개를 내려놓은 채 가만히 있어야 한다. 생존에 초점이 맞춰진 모든 행위 앞에서 마틴은 스스로에게 지성인임을 꾸준히 각인시킨다. 그가 살겠다고 별짓을 다 하면서도 집착하는 한 가지는 '지성'이다.  


ㅡ 


"난 안 죽을 거야! 안 죽을 거라고!"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생각해"
"나는 지성적이다."
"쉼터, 쉼터를 마련해야 해."
"너 포기하면 안 돼."
"해야만 해. 해아만."
"정신 차리자. 교육과 지성으로."
"난 오늘 구조될 거야."
"나는 예전의 나 그대로다."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롭다고!" 


마틴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는 말들이다. 
머릿속 한 켠에서는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라고, 삶을 놓아주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삶의 끈을 놓지 못한다. 처절한 외로움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로 인해 마틴은 스스로를 광기로 몰아간다.  


그러던 중, 재킷 안쪽에서 다 젖은 소책자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사진과 신분증을 보면서 마치 그동안 몰랐던 것인 양 자신이 영국 해군 대위 크리스토퍼 해들리 마틴이라는 사실을 각성한다. 그는 자신이 지성인임을 또다시 되뇌이며 바다를 향해 이기고 말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를 달리한다. 바닷물에 절어서 벗어던진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고, 거추장스러워 벗어버린 방수 장화가 아쉬워진다. 다 젖어버린 신분증이 다시 문명 세계로 향한 티켓인 것처럼.  



마틴은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암석에서부터 해군, 극단, 대학, 학창 시절, 지하실에 갇혔던 어린 시절까지 되돌아 간다. 그의 뇌리에서 친숙하면서도 떠나지 않았던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아직 미치지 않고 제정신인지 수시로 확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장 처한 상황에서 광기보다 나쁜 것은 제정신이라고 말하는 그는, 종단에 이르서 무엇이 더 나은 건지조차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마틴의 절규처럼 우리를 으스러뜨리는 건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마틴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던 까닭이 그가 조난된 이유와 연관이 있을까? 마치 정신착란증세처럼 보이는 마틴의 모습은 조난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의식과 무의식, 환시와 환청을 오가는 마틴에게 누군가가 묻는 한 마디.  


"이제 할 만큼 했나, 크리스토퍼?"
마틴은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다고 대답한다. 신도 천국도 인간이 지어낸 창조물이고, 지금 처한 현실을 이끌어낸 것 역시 인간 본인이라는 것. 즉 소설은 마틴의 상황을 극단적 설정했을 뿐 대부분의 인간은 소통의 부재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고 있으며, 이를 지성인이라는 허위로 감추고 있음을 얘기한다.  



소설 속에서 마틴은 혼잣말의 대가다. 이 증상이 미쳐서인지, 미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지, 그것도 아니면 생존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마틴이 생존을 포기하지 말라고 스스르를 끊임없이 다그친 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작가 자신도 그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틴,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아직까지는). 꽤 오래 전에 이 말을 했을 때 한 선배로부터 "넌, 인생이 살만한가보다"라는 조소 섞인 말을 들어야했다. 사람마다 '살만한' 인생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그것보다 죽는 게 더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틴의 공포를 이해한다.  


이 소설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파리 대왕>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비행기와 배만 다를 뿐 조난자라는 설정부터 인간이 갖는 야만성과 악, 그리고 살고자하는 갈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문명이라는 허위가 그렇다. 차이라면 개인과 집단에 있겠다. 아직 <파리 대왕>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두 권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사족 
마지막 문장에서 뜨악! 진정한 반전일세. 




118.
"전 살아남느라 바쁩니다. 이 암석을 이름들로 투망질해 두고 길들이고 있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어떤 것에 이름이 주어진다는 건 인장이자 사슬이 주어진다는 거거든요. 이 암석이 나를 제 방식에 맞추려고 들면 나는 거부하고 이 암석을 내 방식에 맞출 거예요.(...) 이 암석을 이름들로 묶어 둘 겁니다. 암석이 흡묵지로 나를 소멸시키려고 들며, 그럼 내 말들이 울려 퍼지고 현저한 소리들이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시켜 주는 이 안쪽에서 말할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들을 자아내기 위한 정교한 공작 기계로서 내 뇌를 사용할 겁니다. 안위를, 안전을, 구조를. 그러므로 나는 내일을 생각의 날로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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