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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 7조 - 정치 격동의 시대, 조은산이 국민 앞에 바치는 충직한 격서
조은산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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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20만 동의를 얻은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 글과 일상에서 느끼는 정치에 대한 단상을 더해 현 정부를 향한 직언을 담았다.책을 다 읽은 후 많은 부분에서 동의.공감했고, 일정 부분에서 불편했고, 문장 사이사이 물음표를 놓아두었으나 책의 마지막, "나는 나의 세상에서 살며 쓴다"라는 문장으로 대부분 납득했다. 
 


나는 우리나라 정치에 진정한 진보주의자(심지어 보수주의자도)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정치에 관심을 두려고 노력하지만 특별한 정치색이 없고, 지지하는 정당도 없다. 거대 정당 두 개가 헤쳐모여를 반복하며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는 정치환경을 가진 나라에서 지지할 정당을 찾기조차 어렵다. 가능하면 진보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주변에 진보주의자가 많지 않아 (거의 없다는 표현이 맞겠다만은)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 노력의 방향이 맞는지 스스로 점검하지 않으면 샛길로 빠지기 쉽다.  








 
저자가 기본 소득에 대해 갖는 우려가 무엇인지 이해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비록 현재 시행하고 있는 기본 소득 정책이 선심성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 정책이 수정, 보완되어 정착되기를 바란다.  
 


특정된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면 대한민국에서는 수입이 없는 사람은 굶어죽을 수 밖에 없다. 극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백성이 번듯한 직장에서 근무하는 것도 아니요, 처자식 혹은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하는 여성의 비율은 늘었다고하나, 여전히 양육의 부담은 여성들의 몫이며 이로 인해 경제활동을 중단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만약 외벌이 집안에서 경제력을 책임졌던 가족 구성원의 수입이 중단되거나, 자영업자 혹은 영세 사업자의 부도로 인한 가정 경제 붕괴가 발생하는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 이와 관련한 처참한 기사는 무수히 많다. 한 학기 대학등록금이 수 백에서 1천만원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자기 계발은 고사하고 등록금 마련에 수업조차 집중해서 듣기 어려운 학생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기본 소득은 무소유로 가기 위함이 아니다.  
 


학업이 뛰어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섞어 한 교실에 집어 넣은 하향 평준화. 그런데 학교는 학원이 아니다. 오로지 성적의 우열만으로 학생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학원만으로도 충분하다. 학생 개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며 다양성에 입각한 교육 방식을 지향하지 않고, 시험에 의한 성적만으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방식 자체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대학 입시에 성공하는 지름길은 자퇴라는 웃지 못할 말도 있다). 저자의 말대로 학업이 뛰어난 학생들에 대한 교육 방식을 포함해 교육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함은 당연한 일이다.  
 


부동산 문제를 비롯해 현 정권을 향한 저자의 쓴소리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대북 문제와 분배를 위한 성장에 대한 글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현 상황에서 그의 글에 충분히 공감한다.   





 
나는 각자가 다른 관점으로 인해 불편한 글들을 꾸준히 읽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기에 어느 누구의 말이 정답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여러 의견들이 만나야 하고, 미처 짚어내지 못했던 부분들을 채워나가며 조율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모두가 동의하는 글은 위험하다고 여기기에, 저자가 앞으로 써 나아갈 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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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1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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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오브 로마] 2부에 해당하는 <풀잎관> 증 1권의 주요 내용은 술라가 당분간 히스파니아로 떠나 있고, 마리우스는 가족 여행을 빙자한 동방 시찰을 다녀오며, 추후에 로마의 골칫거리가 될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불만과 비교적 평화로운 로마의 전반적인 제도에 대해 서술한다.  
 







 
 
제국의 위기 상황이 지나면 의례 대두되는 문제는 세금이다. 로마에 세금을 내고 있는 동맹시들의 불만은 전쟁에 의한 젊은이 착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토지 약탈, 지역 내 인프라에 투자하지 않아 쇠퇴하는 지역 경제다. 다음으로 시민권 문제. 제국 안에서 로마 시민권은 그 자체로 엄청난 특혜다. 로마 시민권이 없는 사람은 로마 정부 사업에 입찰하거나 로마 시민과 결혼할 수 없었고,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더라도 로마 법원에 항소할 수 없었다. 죽을만큼 매질을 당하고 아내를 도둑 맞아도 가해자가 로마인이면 법적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로마 최고의 협력자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공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이탈리아인들로서는 당연히 불만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주는 데 대한 반대는 로마 상류층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민층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로마인들은 시민권에 인색할까? 이에 마리우스가 지적하는 바는 배타성이다. 태생이 로마인이 아니면 열등한 존재, 즉 이탈리아인들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태생적 우월감을 놓고 싶지 않은 심리. 
 


"로마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진정 그렇게 큰 죄입니까?"


 


인구 조사에서 수 만명이 등록된만큼 인구조사 조작은 카이피오의 고발과는 별도로 사실일 수 밖에 없다. 이에 인구조사를 주도했던 크라수스 오라토르는 가짜 시민권자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자손까지 태형과 재산 몰수와 추방의 벌을 내려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가짜 시민권자들을 명부에서 지우는 것은 타당하나 그 이상은 그들이 로마와 공존해야할 존재임을 상기시키며,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불러 일으킬 뿐인 무모함은 자제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이 말을 받아들이는 원로원 의원은 두 사람ㅡ루푸스, 드루수스ㅡ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시의성. 로마는 순수 로마인만으로는 제국을 유지하기 힘들다. 이는 현대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전체 인구를 놓고 볼 때에는 인구 증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지만, 국가마다 출산율의 고저는 다르다. 무엇보다 인구비율이 직사각형 형태로 바뀌었고, 시간이 더 지나면 역삼각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곳곳에서 내전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폭력적 충돌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난민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이제는 기후 난민까지 발생하는 지경이다). 그럼에도 순수혈통, 단일민족을 내세워 배타적인 시선으로 '우리'만을 껴안고 살면 될까?  
  
 



 
마리우스와 술라의 반목은 아직까지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지만 술라의 귀환으로 이제 곧 가시화 될 것이다.  마리우스의 말대로 두 사람의 일체감은 진정한 우정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전장에서의 편의(혹은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마리우스는 술라가 루푸스와 같은 진정한 우정을 나눌만한 사람이 아님을 안다. 술라가 언젠가는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가족으로 받아들일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마리우스는 술라가 보이는 현재의 행보에 크게 놀라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술라가 그럴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납득한다. 마리우스가 신뢰하는 아내에게조차 술라의 천성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지 않는 것은 최소한의 의리였나 싶은 생각도 들고.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를 중심으로 당시 동방의 정세를 구체적으로 서술해 놓았는데 새삼,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혼으로 맺은 동맹이 대단히 유용하다는것, 반대로 딸을 국가 혹은 권력 유지의 부속품으로 여기는 한 혼인에 의한 동맹의 허무함,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은 혈육의 정을 넘어선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매 권마다 당시 여성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입(손가락)이 아플 지경이다. 이 책에서, 부모에게 관심을 못받고 자란 카이피오와 리비아의 딸 세르빌리아는 더 힘이 있다고 여기는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아이의 행위는 물론 아주 부적절하다. 세르빌리아의 양육 환경과 나이를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만약 세르빌리아가 남아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랬다면 과연 세르빌리아를 돼먹지 않은 아이로만 치부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언제는 아니였냐만, 이 책의 최악의 인물은 카이피오다. 속물인 제 아비보다 한술 더 뜨는 위인이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사기까지. 리비아가 이혼한 게 행운이었고, 그 아비 아래에서 자라지 않아도 될 아이들에게는 천만 다행한 일이다. 세상 일은 정말 알 수 없다. 유년 시절, 리비아는 오빠를 그토록 증오했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남편에게 매질을 당하고 불륜이 들통나고 이혼까지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재혼해 행복한 삶을 찾은 리비아 곁에는 오빠가 있었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손을 잡고, 데면데면했던 술라와 루푸스가 마리우스와는 결이 다른 우정을 나누다니. 세상은 요지경이다. 
 


첫 번째 속주 총독으로서 동방 원정을 손쉽게 해결하고 원하는 바를 얻은 술라의 시선은 다시 로마로 향한다.
  



 
뻘.
이 책 사이사이에는 다음 시대를 풍미할 인물들이 꼬맹이로 이름을 드러낸다. 카이사르, 키케로, 소小 카토. 어... 무시무시한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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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심장을 쳐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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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아멜리 노통브의 첫 작품은 <적의 화장법>이다. 마지막장을 덮고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오후 네 시>를 비롯해 작가의 작품을 한 권 한 권 찾아 읽었더랬다. 인간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본능과 심리를 날카롭게 들춰내는 탁월함과 동시에 놓치지 않는 풍자와 해학까지 겸비한, 그것도 중편 혹은 경장편을 통해 압축적으로 풀어내는 능력은 현역 작가 중 손가락에 꼽지 않을까 싶다. 다만 몇 년 전에 나온 작품들에서 힘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은 있었으나 지금, 이 작품에서 그 날카로움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72년, 자아가 강한 마리는 꿈꿨던 화려한 미래와는 너무 다른 세계에 정착한다. 스무살 나이에 한 남자의 아내이자 엄마가 됐다. 태어난 딸 디안은 더할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예뻤으나 마리에게는 자신을 주저앉힌 존재를 넘어 주변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한 경쟁자일 뿐이다.  




이 소설은 '모성은 본능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고, 출산을 전후로 삶의 주체가 달라지는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설 초반, 마리가 출산을 하기 전까지 마리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됐다면, 출산 이후에는 디안에게 옮겨진다. 예를들어 3인칭 화자가 마리의 부모님을 엄마, 아빠로 지칭했다면 디안이 태어난 순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로 바뀐다.



여성이 출산을 하면 적어도 일정 기간동안 개인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엄마'라는 존재만 남는다. 그런데 마리는 좀 다르다. 어린 디안이 분석한 엄마 마리는 남자를 선호하며 질투에 있어서는 남녀차별이 없다. 과시하기를 좋아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에 있어 자식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딸에게 향하는 것에 극도의 질투를 느끼면서도 그 흔한 고민이나 죄책감조차 없다.


마리는 엄마이기 전에 한 개인으로서도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하나 뿐인 언니에게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고 그녀의 소박한 삶을 경시하며 아이들 앞에서 타인에 대한 험담을 여과없이 쏟아내는 모습은 어른스럽지 못하다. 반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만족하는 마리의 언니 브리지트는 동생의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기뻐한다(정작 마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지만).  
 

영아기때부터 엄마와의 관계가 주종관계로 전락해버린 디안은 타인과의 관계에 부정적이며 무관심하다. 이러한 경험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두 번으로 이어진다. 절친 엘리자베스 덕분에 정서적 안정감을 찾아가나 싶었지만, 대학에서 만난 올리비아로 인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엄마와의 관계를 반복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딸을 통해 자신의 유년 시절을 투영하며, 마리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올리비아가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냉혈한이라면, 마리는 분별력이 없고 무지했던 것이다.


마리는 고작 대여섯살 된 딸이, 조부모의 집에 가서 살겠다고 해도, 부모 대신 키워준 조부모를 잃고 상심에 빠져 친구집에서 살겠다는 데도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다. 남보다도 못한 모녀 사이는 서로의 관계를 이해당사자가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소설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마리의 극단적인 양육태도는 편애를 당하는 디안뿐만 아니라 편애를 받는 셀리아에게도 좋지 않다.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디안보다 셀리나가 더 딱한 지경이다. 어쨌든 디안은 마린의 그릇된 양육 방식에서 벗어났으니까. 세월 한참 흐른 뒤에도 마리는 자신이 디안에게 정서적 학대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을 각성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오래 전에 자신이 상처줬던 행동, 셀리아에게 퍼부었던 그릇된 애정에 대한 과오는 인지하지 못한다. 그녀는 채 어른이 되기 전에 어른의 자리에 놓여진 아이였다.


그렇다면 이 가정에서 디안의 아빠 올리비에는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그는 마리가 디안에게 쏟아내는 정서적 학대를 방조했다. 아빠의 의무를 저버렸고 아내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남편의 입장에서 상황을 합리화했으며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이나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 딸이 열다섯 살에 공식적으로 집을 나가겠다는 선언에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딸을 위한 최선이라는 말로 변명했다. 아빠 올리비에의 형식적인 애정은 오히려 디안을 죄책감에 들게 했을 뿐이다. 마치 딸이 부모를 버린 것 처럼. 그래놓고 딸이 이룬 성과에 대한 자긍심은 생물학적 부모라는 이유로 공유한다. 이러한 태도는 막내딸 셀리아에게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무책임의 극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 남매와 올리비아의 딸 마리엘의 이야기는 이미 현실에서 차고 넘친다.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부모, 가족 구성원간의 폭력적인 갈등, 근친 살인 등의 범죄는 해를 거듭할수록 그 수치가 더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성이 본능이라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여겨야할까?
  

소설의 마지막은 충격적이지만, 문을 열어주는 디안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다.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저절로 샘솟지 않는다. 부모든 형제든 연인이든 사랑은 노력이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 공감하려는 노력,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과 연대감. 그것이 자신을 아끼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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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예쁜 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9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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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세 소년이 등장한다. 존은 그를 낳고 얼마 후 집을 떠난 어머니 대신에 3년여를 보모의 손에서 양육됐다. 참전 후유증이 있는 아버지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만 가정 생활에서 큰 영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존이 어머니에게 갖는 거리감은 호칭에서 드러나는데, 아버지 앞이 아니라면 그는 어머니를 그 여자 혹은 그녀라고 부른다. 존이 마음을 나누는 존재는 친구 롤린스와 말horse 뿐이다. 여행 도중 만난 블레빈스의 친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어린 소년은 의붓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과 아동 노동에 시달리다가 집을 나왔다. 이렇듯 각자의 상처를 안고 있는 소년들은 말을 타고 정처없이 길을 달린다.  
  

그들 특히 존은 특별한 계획도 없이 야영과 사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세상을 알아간다. 쫓기는 신세로 국경을 넘은 블레빈스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누더기 차림의 이민자 행렬, 가난하지만 소박하며 인정이 넘치는 가족, 적은 보수에 비해 힘든 노동을 하는 멕시코 노동자들, 초원의 바케로 등 집을 나오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 밖의 상황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여기까지라면 존의 가출이 낭만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은 성장기의 일탈 혹은 방황이라고 하기에는 그 대가와 상처가 지독하다.   
  
 
존이 맞닥뜨린 어른의 세상은 모순투성이다. 앞뒤 사정없이 보여지는 결과로만 상황을 판단하고, 자칭 서장이라는 자는 돈을 받고 청부살인을 마다하지 않으며 공공연하게 출소를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 감옥에 수년동안 갇혀있으면서도 자신이 왜 갇혀있는지조차 모르는 노인과 어린 나이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칼을 겨눠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게 만드는, 참혹한 가르침을 던지는 세상. 만들어지는 범죄, 부패와 폭력, 법으로 정의되지 않는 세상의 부조리를 알아가는 존에게 악한 인간은 없으며 처한 환경이 인간을 만들고, 악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로서 부유하다가 악을 필요로하는 인간에게 찾아간다는 말이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존을 감옥에 보낸 것도, 존의 목숨을 건진 것도, 이 모순과 부조리때문이었다.
 
 
존이 야생 망아지를 길들이고, 자신의 말과 교감하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존은 야생 망아지를 길들일 때 귀엣말을 속삭이며 충분히 기다려준다. 존이 마주한 인간사회는 이와 정반대다. 대화나 설득보다는 권력을 이용한 강압과 폭력이 앞선다.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구도는 주인과 하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남성과 여성, 간수와 죄수, 그리고 이방인 등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구도에서 약자에 위치한 사람들은 '나쁜' 환경에 던져져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강요당한다. 존은 왜 블레빈스를 버리지 못했고, 위험을 무릎쓰며 잃어버린 말들을 되찾고자 했을까? 부조리 덩어리인 기성 세대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 아니었을지. 
  
 


 



 





제목이 왜 <All the Pretty Horses> 일까? 말을 좋아하는 존은 멕시코 농장에서 야생 망아지를 길들이는 조련사 일을 하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인간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비롯한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는 각자에게 주어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고,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성장기에 어떤 환경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사람과 교류하고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출생이 한 개인의 책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생과 관습과 규범의 틀 안에 맞춰진 삶을 살아야하며, 그 틀에서 존재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여겨지거나 혹은 스스로 벗어나고자 하는 이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차별과 억압을 가하며 가치를 폄훼한다. 
  
 
젊은 시절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을 경험한 노마님 알폰사는 스스로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음을 인정하며 젊은 세대가 상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 지난 세대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고 자아를 세워 타인의 시선에 초연할 수 있는 성장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삶에는 늘 위험이 존재한다. 가련하고 안타까운 죽음, 분노, 억울함, 상실감,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또다시 길 위에 선 존 그래디 콜은 처음 집을 나섰을 때의 그가 아닐 것이다. 집을 떠나기 직전 3인칭 단수로 불렸던 존이 문을 박차고 나온 이후부터 이름이 부여된 것처럼 어떤 삶을 살든 비로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찾아갈 것이다.  
 

앞으로 그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까. 큰 위기를 겪은 후 살아 남았으나 삶에는 늘 위험이 존재한다. 가련하고 안타까운 죽음, 분노, 고통, 억울함, 상실감,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코맥 매카시는 판사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말한다. 
 
"내가 보기엔 자네는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네. 이제는 그만 다 떨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야.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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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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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소설집이다. 호러적 느낌이 강한 <해리건 씨의 전화기>와 <쥐>를 비롯해 한 남자의 서른아홉 해 일생을 거꾸로 짚어가는 <척의 일생>, 장편 '아웃사이더'의 후속작인 <피가 흐르는 곳에> 등 독특하면서도 각기 다른 네 편의 중편소설이 실려있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


은퇴 후 도시 생활과 단절하고 싶어 시골로 내려온 부유한 노신사와 한 소년의 우정이 섬뜩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진다. 1년에 딱 네 번, 예의를 갖춰 직접 쓴 카드를 소년에게 보내는 해리건 씨로 인해 존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크레이그스터. 작가는 이 두 사람의 대화와 이후 상황을 통해 과도한 소통과 고독할 권리를 침해당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누군가에게 미칠 영향은 생각지도 못한 채 넘쳐나는 메세지들과 아무리 무음으로 설정해도 원하지 않는 소식까지 전달하며 울려대는 알람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심리적, 물리적 거리두기다.
 
 




[척의 일생]


대규모 지진으로 도시는 폐허가 됐고, 이로인해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물가는 급등했다. 도로 한가운데 싱크홀이 생기는가 하면, 플로리다는 늪지로 변하고, 세계 주요 식품 생산지가 사라지면서 각 대륙은 기근에 시달리고 벌이 멸종됐으며 자살자가 속출한다. 지구의 자전 속도까지 느려지면서 인류의 앞날은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이 와중에 여기저기에서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척 크란츠라는 사람의 은퇴 기념 축하 광고가 등장한다. 도대체 척 크란츠는 누구인가?


연극처럼 3막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서른아홉 살의 척 크란츠라는 남자의 생애를 거꾸로 짚어간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척은 앞날을 예견하는 다락방에서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일까?  


스티븐 킹은 소설 전반부에 환경 오염과 탄소 배출에 의한 지구 온난화와 그로인해 벌어지는 기후변화를 꼬집으면서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임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주인공 척 크란츠는 어떤 특정 인물이라기 보다는 인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정작 하고 싶은 것을, 현재를 억누르며 살아온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순위에서 밀려나고 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척의 삶에 이입되는 이유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가로 지불하며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설정의 [쥐]는 인간의 욕망과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린 작품 중 분량이 가장 적은 이 소설은 인간의 다양한 본능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폭풍우에 다친 쥐를 집안으로 들인 후 삽으로 때려죽일 작정을 했던 드류는 헐떡거리는 쥐의 모습에 연민을 느낀다. 여기까지만 보면 드류는 무척 동정심이 많은 따뜻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쥐의 위험하면서도 달콤한 제안에 대해서는 고민도 없이 수락하고, 그 대가가 실행된 시점에서 드류가 보인 죄책감은 참으로 엉뚱하기 그지없다. 우리의 인생에는 크고 작은 쥐들이 득실거린다.
 
 





[피가 흐르는 곳에]


읽기 전 <아웃사이더>의 후속작이라는 소개에 살짝 걱정을 했다. 그 작품을 읽지 않았기에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싶어 찾아봤더니 총 800여쪽에 달하는 분량이라 일단 포기하고 읽기로 했다. 다행히 읽다보니 주인강 홀리 기브니가 어떤 인물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됐고, 전작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래도 '아웃사이더'를 읽어봐야겠다).


미스터리 소설에 오컬트적 요소가 곁들여진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방인(홀리가 지칭하는 명칭)'은 인간의 슬픔, 비통, 죽음, 충격 등 고통스러운 감정을 흡수하며 연명하는 존재다. 이는 매체에서 긍정적인 뉴스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사건을 배달함으로써 몸집을 키우는 언론 매체와 이러한 기사에 부응하며 열을 올리는 대중들의 모습에 닿아있다.  


소설에서 '이방인'의 존재를 알아본 이가 한 명 더 있다. 아흔 살이 넘은 댄 벨은 퇴직하기 전까지 경찰서에서 범인 몽타주를 그리던 사람이었기에 얼굴이 조금씩 변해도 전체적인 틀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홀리는 이 존재를 어떻게 알아봤을까? 전작을 읽어봐야겠지만, 오로지 이 소설만 놓고 보자면 홀리는 공황장애와 대인기피증과 거식증을 앓았던 것으로 보이고, 엄마에게 늘 주눅들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방인'의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어두움을 밝혀주는 이들이 존재한다.  


회색으로 뒤덮인 새로 상징되는 악惡, 혹은 '이방인'은 차별, 억압, 폭력 등을 슬며시 부채질하면서 우리의 주변을 부유하며 그 틈을 노리고 있다. '이방인'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도, 회색으로 뒤덮인 새가 활개를 치게 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네 편 모두 온기와 냉기를 오락가락하는 작품이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작품 속 주인공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들 수 있겠으나 그들을 붙들고 있는 온기 또한 우리에게도 존재하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생각이다. 피가 흐르는 곳이 아닌, 연민이 있는 곳에 특종이 있기를 바람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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