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덴 대공세 1944 -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막
앤터니 비버 지음, 이광준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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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안트베르펜 항구를 다시 점령하면 연합군을 분산시키고 영국을 전쟁에서 불러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르덴에 마지막 희망을 건다. 독일의 장군들이 대부분 이 작전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만 점점 기울어가는 전세를 회복시키기에 별다른 대안이 없기에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읽다보면 독일군 장교들은 끊임없이 이 작전을 철회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 가장 크고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던 아르덴 대공세, 벌지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벼랑 끝에서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을 안고 기습작전으로 시작한 독일군의 기세는 대단했으나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젠하워의 빠른 대처와 고립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미군의 끈기는 히틀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아르덴 대공세의 논란은 연합군이 이 공세를 눈치 챌 것인가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독일군의 의도를 눈치 챌 만한 정보가 흩어져 있었는데도, 대개의 정보전 실패가 그렇듯이, 고급 장교들이 자신의 편견에 부합하지 않는 첩보들을 흘려들은 것이 문제였다.  결정적인 부분은 미 제1정보부의 딕슨 대령이 아이펠 지역으로 독일 병력이 집결 중이라는 사실과 독일의 항공부대가 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다는 점, 그리고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 보고했음에도 그의 상관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를 묵살했다. 다 이긴 전쟁이라는 이른 승리감과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분별함이 화를 키웠다.  
 
 



이 전투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아이젠하워보다 팰튼이다. 다들 개인의 명성와 정치적 잇속을 계산하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빠른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전투를 이끌고 나갔던 팰튼이 없었다면 아이젠하워는 이 전투의 승부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군이 승리했어도 기간이 더 길어지고 그만큼 피해도 컸을 것이다(몽고메리는 사이사이 비호감).  


막강한 기갑 부대를 내세운 독일과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 전쟁 무기에는 문외한이 내가 읽기에도 독일군의 전차는 천하무적으로 느껴진다. 머릿속에서 미군이 바주카포를 들고다니는 동안 독일군이 최강의 전차를 목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전투에 있어서 무기만 우월해서는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독일이 제공권을 놓친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이외에도 아르덴 대공세에서 사용된 세열수류탄, 백린수류탄 등의 무기를 살펴보면 어떻게 이런 무기를 사람이 사람한테 사용할 수 있는지, 인간이 일으킨 전쟁의 비인간적인 잔혹함이 참 무섭다.  


이 전투에서 군인들에게 가장 혹독했던 것은 사실 추위와 굶주림이다. 옷과 부속품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동사로 인한 괴사로 신체를 절단하고, 그것도 모자라 굶주린 채 얼어죽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함이다. 고된 전투와 혹한의 날씨, 전우의 죽음은 군사들을 광기로 몰아넣었고,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이른다. 이는 독일군도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군인들은 추위와 죽음 중 어느 것이 더 두려웠을까.   
 


호랑이와 여우가 번갈아 가며 점령한 땅에서 죽어나가는 이는 민간인이다. 심지어 미군도 독일군도 벨기에인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여기저기에서 치이는 샌드백 꼴이다. 벨기에 민간인들은 군화 소리만으로도 미군과 독일군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독일과 프랑스의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나라의 아픔이다. 꽁꽁 얼어붙은 독일군 시신들을 모래주머니처럼 써먹고, 독일군 머리 위에서 포탄이 폭발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미군 병사. 전쟁과 폭력이 만들어낸 인간의 광기다.  
 


아르덴 대공세는 12월24일을 기점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고 한다. 독일의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아르덴 대공세가 이미 실패했고 더 이상 작전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며 히틀러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렸다. 더구나 소련의 붉은 군대가 대대적인 동계 공세를 준비 중인 동부 전선이 가장 위험해지고 있었으나 히틀러가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요들 상급대장과 집단군 총사령관 힘러도 히틀러를 설득하기는 커녕 구데리안의 철수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그들은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아르덴 대공세의 결과로 벨기에에서 약 2500명의 민간인이, 룩셈부르크에서 500여명의 비전투 사망자가 발생했다. 농림과 삼림에 의존하던 아르덴의 경제는 치명타를 입었다. 5만 여 마리의 가축들은 모두 죽거나 독일군이 징발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가축들도 시신 썩은 물이나 백린탄에 의해 오염된 물을 먹고 폐사했다. 또한 독일이 북쪽 농촌 지역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룩셈부르크에도 기근이 닥쳤다. 가장 큰 문제는 연합군과 독일군이 묻은 10만개 이상의 지뢰였다. 해방기가 되면서 지뢰를 밟거나 폭발물을 가지고 놀다가 다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눈이 녹으면서 시신들이 빠르게 썩어들어가 악취가 진동했고, 전염병이 우려됐다. 전쟁의 후유증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샹블롱파멘의 서북쪽 숲의 나무에는 미군의 호된 포격으로 인해 지금까지 금속 파편이 박혀있어서 목재를 팔 수 없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굳이 상상이 필요없다. 
 


보네즈-말메디 교차로에서 사망한 시신에서는 이마, 관자놀이, 뒤통수 등 여러 곳에서 총상이 발견되었고,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시신도 있었다. 이것은 확인 사살을 했다는 흔적이다. 전쟁 범죄 재판을 위한 증거를 수집했고,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냉전시대 초기에 다하우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은 모두 감형되어 1950년대에 석방되었다. 그들이 감옥에 머무른 기간은 고작 10여년이다. 저자는 아르덴 전투가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어떤 전투보다 더 야만스런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책을 마지막까지 읽고 보니 이러한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전쟁 포로 살해와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인권말살로도 부족한 최악의 행태였다. 저자가 짚어낸 특징 중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의 군사령관들이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선택한 포격이나 폭격이, 더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백린탄은 무차별적인 살상 뿐만 아니라 전후 생태계 오염까지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일 수뇌부가 아르덴 대공세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연합군 병사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 더 큰 실수는 독일군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인식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사를 이성적으로 읽지 못하는 것이 나의 전쟁사 읽기의 한계다. 읽는내내 들었던 생각은 도대체 이 전투에서 죽어나가는 수많은 병사들과 민간인들의 목숨의 대가는 누가 보상할 것이며(보상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무분별하고 참혹하게 가해진 만행에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이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풍부한 사진과 이해하기 쉬운 간결하고 구체적인 지도다. 무엇보다 지역에 편성된 부대의 명칭을 기입해 독자가 읽으면서 지도와 함께 시각화할 수 있다는 점은 나에게 무척 도움이 되었다(전쟁사 책을 나름 읽는다고 읽는데도 나는 여전히 군대 단위를 모르겠다. 다만 부대 명칭을 통해 짐작만 할 뿐).  


통사와는 다르게 사건을 집중적으로 읽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저자가 글을 위트있게 써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다. 그리고 전쟁 세대도 아닌 내가 벨기에인들의 입장에 이입하고, 독일군의 소년병들에게 마음이 쓰였던 까닭은 비록 책과 영상과 조부모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으로만 접한 역사이지만 우리 땅에서 전쟁을 겪은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냉정한 분석과는 거리가 먼 독서였지만 이렇게 다른 이들의 삶을 또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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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2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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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는 전쟁 준비를 하던 중 동부의 주물촌 공장주가 카이피오이고, 그 공장으로부터 무기를 납품받는 자가 실로임을 알아낸다. 에트루리아와 움브리아가 아직 로마에게 등을 돌리지는 않았으나 이탈리아 내에서 치르는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큰 부담이다. 거기에 이탈리아 군단이 20개에 달하는 반면 한동안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까닭에 로마의 군단은 6개에 불과하고 신병을 훈련시키기까지의 기간을 감안하면 로마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초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예상치 못했던 전쟁 준비에서 이득을 보는 이는 술라였다. 마리우스의 보좌관으로서의 경험은 급작스러운 난국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고,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명성은 나날이 커졌다. 그의 상관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광범위한 시야를 가져야할 사령관으로서 적당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제 술라는 단번에 날아오를 기회만 엿보고 있다.  
 
​  


 

ㅡ  전쟁이 시작되자 수면 아래에 잠겨있던 인물들의 제그릇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합리적이나 시야가 좁은 루키우스, 스스로를 너무 모르는 루푸스, 오로지 재물에만 관심이 있는 카이피오. 에효.......  이래서야 어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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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들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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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격동의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광인 아불라로부터 동생들 중 한 명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후 급격하게 변하는 열다섯 살 소년 이켄나와 이켄나의 변화를 지켜보며 지쳐가는 그의 동생인 보자의 대립, 그리고 이어지는 가족의 와해와 파국을 통해 인간이 갖는 증오와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켄나는 예언을 듣기 전까지 가족들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던 든든한 형이요 아들이이었다. 3년 전, 나이지리아 전역에서 일어난 폭동 소요 사태 당시 이켄나는 아쿠레에서 백 명 이상이 사망한 선거 폭동 한가운데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고, 자신을 따르는 동생 보자가 여권을 숨겨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지 못했을 때에도 오히려 부모로부터 동생을 감쌀만큼 이켄나는 동생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광인의 단 한 마디로 인해 성마르고 예민하며 폭력적으로 변한다.  
 



아불라의 예언을 부정하기 위해 신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지만 광인의 한 마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켄나와 아불루의 예언은 허언이라고 이켄나를 설득하면서도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지는 형의 광기어린 행동에 지쳐가는 보자의 대립은 극으로 치달린다. 이켄나는 자신을 두려워하며 피하기 시작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여기던 중 보자에게 상해를 입히고 이 사건은 이켄나를 가족들로부터 고립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비극의 서막은 열린다.   




 
아불라의 예언을 실현시킨 자들은 예언을 공유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치 그 예언을 실현시키는 약속이라도 한 듯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차곡차곡 진행되어 간다. 사실 아불라의 예언은 해석하기 나름이다(모든 점쾌가 그렇다만).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던 사람들은 그들ㅡ이켄나, 보자, 오벰베, 벤저민ㅡ뿐만이 아니었다. '어부'란 단어는 소년들의 아버지가 애칭으로 불렀던 명칭에 지나지 않았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아불라의 예언을 해석한 이켄나는 그 직후부터 달라진다. 예언이 실현될까 전전긍긍하고 가족들의 별 거 아닌 불평조차 자신을 미워한다고 여기고 세계 곳곳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범죄를 자신과 연결시키며 급기야 온 가족들을 증오하기에 이른다.  
 



보자는 그깟 미치광이의 말을 믿고 달라진 형을 걱정하다가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자 형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동생들은 눈치를 보고, 어머니는 한탄하고, 아버지한테 꾸중을 듣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 모든 사단이 이켄나 때문이라고 분노하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예언을 실현한 꼴이 되고 만다. 그 참혹한 영향은 위의 두 형을 그토록 따르던 열한 살, 아홉 살 동생들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가족은 불과 몇 달 만에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형제들의 어머니도 아불라의 예언을 무시하지 못했다. 아불라의 예언 따위는 무시하는 신뢰를 주기보다는 교회에서 정화를 해야한다면서 이켄나를 교회로 이끈다. 따라서 어머니조차 이켄나의 불안을 더 부채질한 셈이다. 결국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할 부모가 여러 의미에서 부재했고, 그 두려움을 혼자서 견뎌야만 했던 것이다. 잔인한 예언을 듣고 혼자 감당하기에 이켄나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다쳐서 날지 못하는 작은 새롤 돌봐줄 정도로 심성이 섬세하고 약했던 이켄나가 이렇게까지 변한 이유가 단순히 예언때문만이라고 보기에 어렵다.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동생 중 한 명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은 배신감을 동반한 두려움을 가져왔을 것이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불라와 관련된 사건들과 자신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던 동생의 저항은 소년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을 것이다.  
 



이켄나의 가족은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가족이다(아버지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고압적인 자세만 제외하면). 아버지는 네 아들의 장래로 미래의 지도를 그렸고, 아이들은 그 지도에 맞춰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그들은 남다른 결속력을 가졌었다. 이토록 단단한 연대의 끈을 잘라버린 건 증오와 복수심이었다. 
 



아불라의 몸에 꽂힌 낚시바늘은 오벰베와 벤저민의 몸에도 보이지 않게 꽂혀있을 것이고, 그 흔적을 지우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혹독한 시련 뒤의  아지키웨 아구 가족에게 아직은 희망이 있다. 오벰베와 벤저민이 서로에게 갖는 연민과 걱정, 이 모든 시련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돌아온 벤저민을 환영하는 데이비드와 은켐이 더 단단한 연대로 가족을 천천히 재건할 것이다. 
 



벤저민이 무심코 바라 본 자동차의 사이드미러에 새겨진 문구, '주의 : 거울 속 물체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처럼 분열과 증오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아주 가까이,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이 약하디 약한 존재임을 새삼 확인하게 한 소설이다.
 




 
사족.

나는 대체로 자식의 현재 모습이 과거의 부모 탓, 혹은 덕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시점부터는 일정 부분을 제외하면 본인의 오늘과 내일의 모습은 스스로 기여하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구 부부에게는 묻고 싶다. 당신들은 당신의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피폐해지는 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증오의 늪에서 두려움에 떨며 당신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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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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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거기서 뭘 봤니?" 

 

아내는 아프고 빠듯한 살림에 도우미를 고용하기에는 여의치 않다. 일을 하면서 두 딸을 건사하기 어려운 남자는 결국 그나마 손이 덜 가는 큰 아이를 남겨두고, 작은 딸을 당분간 시골 처가에 보내기로 한다. 아이는 아빠에게 가기 싫다고, 언니를 보내라고 떼도 부리고 사정도 하지만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아이, 유나는 앞으로 자신의 행복에 걸림돌이 되는, 불행의 원인이 되는 요소는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그 대상에 예외는 없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심지어 자식조차.
 









행복이란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이라고 믿는 한 연쇄살인범을 통해 우리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에 대해 되돌아본다. 
 


어린시절, 엄마의 발병으로 몇 년 간 시골에 보내져 외조부모와 함께 산 유나는 손녀의 학업에 열정적이고 숨막히도록 엄격한 할머니와 이를 방관한 할아버지 밑에서 부모가 자신을 버렸듯(유나의 입장에서) 할머니로부터 버림받을까 두려워 순종하며 지낸다. 그러나 자신이 시골로 보내진 원인이 언니에게 있다고 단정한 유나는 재인에게 끊임없이 원망과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 중 유나의 결핍에 공감하고 동조하는 이는 유나의 엄마 뿐이다.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인범의 범죄 형태가 극악스러운 것은 차치하고, 엄마가 아프고 살림살이가 녹록치 않다는 속사정을 어린 유나가 이해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을 전제하더라도 유나의 심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일단 주말마다 시골에 있는 작은 딸을 찾아가 집에서 쓰던 방과 똑같이 인테리어를 해주는 아빠, 떼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 쉼없이 자책하고 작은 딸을 불쌍해 하며 편애하던 엄마를 떠올려보면 그녀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을 어린 시절의 정서적 결핍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자기 대신 동생이 시골로 보내졌다는 죄책감을 내내 느끼고, 엄마의 한탄을 감내하며, 아빠의 영세한 사업의 실상을 알고 착한 딸 컴플렉스에 시달렸던 재인에게 동정심이 쏠리게 된다.  
 



■  ■  




소설은 3인칭 화법으로 진행하지만 지유, 은호, 재인의 관찰자 시점으로써 독자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시선을 통해 유나를 관찰하고 그녀의 속내를 짐작한다. 유나의 극단적이고 주도면밀한 폭력적 성향의 기저는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위에 썼듯 일단 그녀의 어린 시절은 이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생각 중에 오래 전 작가가 언급했던 '절대 악'이라는 단어와 함께  <종의 기원>의 주인공 유진이 떠올랐고, 이어서 든 생각은 과대하게 포장된 '자아'였다. 유나는 스스로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지만 여기에는 자신만이 옳고 정당하다는 그릇된 자아감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결핍(유나의 경우에는 결핍이라고 하기에도 어렵지만)과 어린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재인의 깨우침처럼 각각 여덜 살, 일곱 살에서 멈춘 그들의 성장이 유감스럽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 아닌 성인이 된 후에 단절한 가족 관계, 자식에 대한 어긋난 편애 등이 유나의 범죄를 방조한 셈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면 최악의 양육환경에서 성장한 지유의 미래는 어떨까? 은호는 지유에게서 복종 밑에 도사린 저항감을 읽는다. 이 점이 유나와 지유의 다른 점이다. 유나가 스스로를 향해 완전한 존재라고 세뇌시킨 자아에 물음표를 던지지 않았다면, 지유는 엄마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물음표를 던진다. 지유의 이 저항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그래서 적어도 현실에 있는 수많은 지유가 고통에서 벗어나 부모와는 다른 길을 걷기를 바람한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인간의 욕망은 제한되지 않으니 독자는 이미 제목에서 행복에 대한 역설을 읽는다. 왜곡된 자아는 위험하다. 그 위험에 빨간불을 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인 뿐이다.





#완전한행복 #완행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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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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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부인否認의 힘이다. 죽는 다는 것은 무엇이며 더 좋은 삶은 무엇인가. 그리고 화자가 고민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부인否認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대체로 안온하지 않다. 가족에 대한 적대감으로 들끓는 친구의 딸, 사막같은 결혼 생활의 끝에 찾아온 나이 듦과 암. 그리고 고독과 회의. 그래서 인간 정신이 지닌 무한한 능력을 발휘해 끝없이 부인한다. 내가 삐뚤어지고 거짓말을 하고 냉정한 사람이 된 원인은 나한테 있지 않다고, 나이는 숫자일 뿐 늙지 않았다고, 내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나는 암에 걸릴만큼 잘못한 게 없다고. 아,아Q의 정신 승리여.  


친구의 안락사 여행에 '나'가 따라나선 이유는 자신이 그 입장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공감때문이었다. 그런데 독자가 이 여행이 걱정스러운 것은 안락사 자체보다 딸에게 지우고 싶지 않은 죄책감을 친구에게 지우는 것, 죽음의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친구의 입장, 비록 원만한 모녀 관계는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의 안락사를 통보받아야 하는 딸의 상실감, 그리고 남은 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게 될 죄책감과 무력함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 경험을 통틀어 가장 고독한 경험이라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죽음이야말로 온전한 고독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는 자신이 갖는 죄책감은 안락사에 동참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남겨 두고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아마 이전부터 친구 관계를 유지해온 긴 세월보다 그 짧았던 얼마간의 시간 공유가 '나'에게는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만들어 놓을 테니.   
 




우리는 언제부턴가 아무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 형식적인 말을 의무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뱉어낸다. 저자는 이에 대한 이유를 '우리 언어가 거칠고, 속 비고, 말라비틀어져서, 감정 앞에서 언제나 어리석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어린 시절부터 형식적인 예의를 배우지만(이것도 상대가 아닌 남에게 보여지는 자신을 위해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 진심을 담아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은 없다.


가끔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온 내가 기특할 지경이다. 그러니 이전 세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혹독한 입시를 치르고, 목숨 걸듯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가족을 꾸리고, 집안 대소사를 챙기며 늙어지면 가까운 이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며 감내해야 하는 상실감. 작가의 말대로 이 많은 걸 다들 어떻게 해내가는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들의 인생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감정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위로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부정한다. 마치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옳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메뉴얼이 있는 것처럼.


화자는 친구를 방문함으로써 마주하는 이들의 고독과 아픔을 공유한다. 우연히 마주한 옛 연인부터 숙소의 노주인과 고양이, 친구의 암 환우, 그리고 친구와 그녀의 딸까지,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을 포함한 전체를 통찰한다.  


현재 나의 삶을 부인한다면, 적어도 현재 나의 모습이 나 때문이 아니라고 부인한다면, 나는 안전해질 수 있는가? 소설은 죽음, 사랑, 연민 등의 감정을 시종일관 과하지 않은 문장으로 간결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작가는 죽음을 빌어 삶을 이야기한다. 문득 죽음을 선택할 권리라는 말이 삶을 선택할 권리라는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인생에는 스토리가 있다. 스토리를 써 내려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한 마디, "어떻게 지내요?"


다들, 어떻게 지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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