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기 베인
더글러스 스튜어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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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이 먹먹함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읽는동안 멀쩡하게 읽은 시간보다 눈물이 고여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읽어 중간에 책을 덮을 때는 입 언저리가 얼얼하기도 했다. 결국 두 군데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 펑펑 울고 말았고, 읽는 내내 눈이 뻑뻑해져 인공 눈물을 끼고 읽었더랬다. 정말 오랜만에, 그야말로 나도 모르게 소설 속으로 들어가 명치가 아프도록 속상하고 애가 닳도록, 슬펐다.









1981년부터 1992년까지 대처리즘 시대에 글래고스를 배경으로 애그리스를 중심으로한 베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은 3인칭으로 서술되지만 등장인물의 관점을 바꿔가며 진행된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노동자 계급은 설 자리를 잃고, 주요 배경인
탄광촌 핏헤드에서처럼 실직 후 대체 일자리를 얻지 못한 가장들은 소액의 수당을 받으며 술과 놀음, 여색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여성들이 양육과 살림을 도맡아 가정을 지키며 빈곤한 생계를 겨우 이어갔다. 또한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카톨릭 교도인 애그니스와 개신교 신자인 셕의 결혼이 상징하듯 종교적 대립 역시 만만치 않은 문제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남성성을 강요받는 시대에서 성정체성에 대한 편견과 폭력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이러한 시대적 혹은 사회적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 소설은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었던, 그릇된 사랑을 좇다 스스로를 망가뜨린 여성,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미련을 놓을 수 없었던 한 소년의 애정을 그린, 그야말로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67.
이 진창에서 우리를 구할 건 운밖에 없으니까.


불같은 끌림이 사랑이라 믿었던 셕과 애그니스는 각자의 가정을 깨뜨리고 재혼했다. 셕은 울며 매달리는 아내와 네 아이들을, 애그니스는 남편에게 가볍게 이혼을 통보한 후  두 아이 캐서린과 릭을 데리고 나왔고 무일푼인 남녀가 두 아이를 데리고 향한 곳은 애그니스의 친정이었다. 불꽃이 꺼지는 건 한 순간이다. 직업이 택시 기사인 셕은 양다리도 모자라 문어발식 바람을 피웠고, 애그니스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도 셕의 외도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책장마다 안타까운 장면이 많아 독자가 끊임없이 가정을 하게 만든다. 애그니스가 첫 번째 남편과 헤어지지 않아다면, 엄마 리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면, 유진의 시험을 더 강하게 거부했다면, 핏헤드를 벗어나는 순간의 다짐을 지켰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라고 말이다.  


엄마에게 희망이 없다고 여긴 큰딸 캐서린은 어린 나이임에도 집(과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련없이 결혼을 선택했다. 비록 결혼 상대자가 그토록 증오하는 의붓 아버지의 조카라고 하더라도. 릭이 순수미술 학부의 우수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은 편지를 받은 날, 셕은 식구들을 핏헤드에 던져 놓은 채 애그니스를 떠났고, 엄마 애그니스는 오븐에 머리를 넣고 죽으려 했으며, 캐서린과 셔기는 겁에 질려있었다. 이제 가장과 다를 바 없는 자기가 어떻게 이들을 두고 떠나겠는가. 릭은 입학통지서를 2년이 넘도록 간직했다. 그의 희망은 하루라도 빨리 집을 나가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으나 인생은,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처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엄마를 통해서. 셔기는 기억이 시작되는 가장 어린나이를 돌이켜 떠올려봐도 엄마가 온전한 정신이었던 날이 거의 없다. 소년은 자신이 살아온 대부분의 기억 안에서 엄마는 항상 취해 있었다. 딱 1년, 엄마가 술을 끊었던 그 기간에 셔기는 행복했다.  


416.
난 슬퍼지려고 술을 마신 게 아니야.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마신 거지. 




예상컨대 대부분의 독자들은 셕과 애그니스의 부모로서 무책임함에 분노할 것이다(셕은 구제불능이고). 그런데 애그니스라는 인물을 좀 깊게 들여다보면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참 안타깝고 애잔하다. 사람은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열망이 다르다. 애그니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고, 자신의 사랑에 충실했다. 셕에게, 유진에게, 자신에게. 어린 자식들에게 모진 말과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삶에 지쳐 죽을 결심을 한 순간마다 아이들을 향한 사랑에 아파했다. 술과 남자에 흔들리면서도 자식들은 지키고 싶었던 애그니스. 애그니스가 지키고 싶어했던 것이 과연 자식인지, 자신의 자존심인지, 그것도 아니면 혼자 남겨질 두려움에 대한 방어인지 잘 모르겠다. 애그니스는 충분히 좋은 딸,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이웃, 좋은 사람일 수 있었다. 그 기회를 놓은 것은 본인 자신이지만. 그리고 그녀는 릭이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셔기가 학교에서 자신이 강요한 단정한 옷차림과 말투 때문에 '호모 새끼'라고 놀림을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알아야하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  


나이답지 않은 세련되고 예의바른 말투, 여리여리한 외모 때문에 '호모 새끼'라고 학교폭력을 당하는 셔기의 인생 목표는 오직 '엄마 지킴이'다. 다섯 살이 지나면서 셔기는 자신이 잘 하면 엄마가 술도 끊고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조금만 더 잘 하면'. 그래서 엄마가 알콜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남자들에게 버림받는 것도, 다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살지 못하고, 도망갈 곳 없이 고립되어 서로가 절실하게 필요한 애그니스와 셔기는 무척 닮아있다. 또한 캐서린과 릭이 벗어난 핏헤드에서 떠나지 못했던 애그니스와 셔기가 핏헤드 자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그니스는 여러 의미에서 고립무원이었던 핏헤드를 왜 떠나지 못했을까? 처음에는 셕에 대한 미련이었지만 이후에는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침내 그곳을 떠나는 순간, 나는 셔기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더랬었다. 그저 희망에 그쳤지만.





술에 취한 엄마라도, 막말을 내뱉는 엄마라도,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엄마라도 곁에 있어 좋은 리앤. 셔기는 애그니스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질문을 리앤의 엄마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해요?"  


두 사람의 결별 무렵, 애그니스가 셕에게 물었다. "나 하나로 만족할 수 없어?"
애그니스에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셔기가 혼잣말로 애그니스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닮아있는 건지...


사랑의 방식이 어떻든 셔기는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빛났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컸는지,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잘 알았기에 홀로 설 준비가 된 셔기. 시종일관 절망에 가까웠던 소설은 마지막에서 작은 희망의 빛을 놓아둔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셕과 애그니스의 무책임함을 향해 비난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보다는, 그제보다는 더 어른이 된 나는 삶의 모양이 사람마다 제각각임을 납득하는 넓이가 그 하루만큼 아주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매일이 쌓여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말로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애그니스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그녀를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페이지마다 크고 작은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마음을 콕콕 찌른다. 한동안은 이 뭉근한 느낌이 가슴에서 떨어져나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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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 - 세기의 창조자
송기정 지음 / 페이퍼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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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그는 누구인가.
30년간 발자크를 연구하고, 그의 작품을 번역하며 강의를 해 온 송기정 님이 발자크의 [인간극] 총서를 통해 19세기 프랑스 전반부를 들여다 보고, 그의 사상과 정치 이념, 사랑, 사회 궁극의 부조리와 문제점에 대해서 하나하나 짚은 책이다.


저자는 파리의 근대화 과정, 프랑스 대혁명, 정치, 과학, 돈, 법, 철학 등을 [인극극] 총서에 있는 작품들을 데려와 면밀히 풀어내고, 발자크 개인적 경험이 작품에 미쳤던 영향도 살펴본다.









발자크가 글을 쓴 기간은 20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 90여 편에 달하는 [인간극] 총서와 미완성 소설, 희곡, 기고문, 서간문 등 엄청난 양의 글쓰기를 남겼다. 이러한 글쓰기의 원동력은 '빚'이었다고. 말 그대로 생계형 작가였다는 것인데, 이 빚이 오직 가난해서라기보다 사치와 도박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니, 그가 쓴 소설들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납득된다.  


발자크가 파리 구석구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빚쟁이들을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여러 구역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라는데, 19세기 파리는 변화의 공간이었다. 18세기에 시작됐던 파리 근대화의 움직임은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던 1850년 이후 근대 도시로 변화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반세기 만에 인구가 두 배로 늘었고(물론 산업 뿐만 아니라 전쟁이 원인이기도 했고), 이로인해 주거, 도시 위생, 전염병, 급격한 개발로 인한 부동산 투기, 빈부 격차 등 많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 발자크는 이 모든 상황을 [인간극]의 테마로 사용했다. 




 
저자는 18세기부터 파리 각 지구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지금은 잊혀진 도시 곳곳의 역사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발자크가 여러 작품을 통해 파리를, 그리고 파리에 살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얘기한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도시는 인간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말이 새삼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다. 이 부분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파리의 각 구역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과 연계해 지도를 따라 가며 읽다보면 파리 투어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유명 관광지가 아닌 도시 곳곳을 도시 해설사와 함께 투어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개인적으로 이런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한 [인간극]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건물도 많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이 점도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에게 있어 19세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발자크는 유년기를 나폴레옹 치하에서, 청년기를 복고왕정 체제하에서 보냈다. 그의 창작 활동은 주로 7월왕정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대혁명 이후의 급격한 변화를 온몸으로 겪은 셈이다(갑자기 드는 생각이 빅토르 위고와 동시대 사람인데, 작품의 분위기는 무척 다르다).  


발자크는 [인간극] 전체를 통해 대혁명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인간극]의 첫 소설이자 그의 이름으로 낸 첫번째 소설인 <올빼미당원들>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발자크의 역사적 관점을 볼 수 있다. 소설의 줄거리만 보면 비극적 연애소설이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역사의 구체적인 사건을 이 소설에 녹여냈다고 한다(이래서 책은 줄거리만 알아서는 안 되는 거다). <올빼미당원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번역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못 찾았다).  
 


젊은 시절 발자크는 프랑스 대혁명과 공화국 이념을 지지하는 공화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1831년 이후 정통왕당파로 전향하는데, 그가 정치적 입장을 바꾼 이유는 단순히 이념이 바뀌었다기보다는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 하다. (중략) 저자가 짚어낸 바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저널에 동시에 기고한 발자크의 글에는 왕정복고 귀족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7월혁명 이후 정부의 과오를 비판함으로써 귀족들의 잘못으로 왕정복고가 실패했음을 일관적으로 꼬집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발자크가 저널리스트로서 쓴 글을 떠올려보면 특권층을 향한 비판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서민의 입장에 이입했다는 느낌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득권자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희생되는 민중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는데, 이 부분은 다른 문헌도 읽어봐야겠다.  


 작가로 데뷔한 서른 살에 이미 6만 프랑이라는 빚과 이후 3년간의 사업 실패. 발자크는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돈의 위력을 이미 몸소 체험했고, 돈으로 인해 벌어지는 편법과 술책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 돈이 사람의 가치를 앞지른 세상에서 내면에 숨어있던 인간의 비열함과 추악함을 소설에 그대로 반영했다. 그래서 [인간극]에는 금융과 돈이 큰 주제로 사용됐다.


저자는 <으제니 그랑데>를 통해 당시 재산가들의 재산 축적 과정을 그린다. 한평생 빚에 쪼들려 살았던 발자크가,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음에도 으제니의 삶을 행복과는 거리가 멀게 묘사한 까닭은 무엇일까? 또다른 작품 <세자르 비로토>에서는 유통과 은행, 그리고 투기로 변질된 투자 등 당시 금융 구조 현황을 면밀하게 그렸다. 그런데 허영심과 사치에 들떠 결국 파산하는 작중 인물 비로토의 모습은 어쩐지 발자크 자신과 겹쳐진다. 그가 그려낸 정경유착과 은행 및 증권 시스템의 문제점 등을 읽으면서 <세자르 비로토>보다 50년 뒤에 출간 된 에밀 졸라의 <돈>에서도 같은 지점을 짚어낸 것을 생각해보면, 이 경제 및 금융 문제가 어느 한 시대의 문제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겠더라는.   
 


세계 문학사에서 발자크만큼 법과 관련된 소설을 많이 쓴 작가는 없을 것이라는데, 그의 법 관련 지식은 종종 지나치게 전문적이어서 법적 지식이 부족한 독자는 읽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단다. 공정성과 정의 구현은 법의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발자크 작품에서 보여지는 법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사촌 풍스>에서 "법정은 모든 도덕적 비열함이 가득한 시궁창"이라고 말하는 풍스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권력 밖에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법의 공정성에 기대와 희망을 갖는다. 이는 19세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이러첨 그의 소설들은 법이 집행되는 과정 뿐만 아니라 문제점을 지적하고, 당시의 정치적 흐름과 권력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법과 대학을 나와 안정이 보장된 법률가의 삶 대신 불확실한 작가의 삶을 선택한 발자크는 돈을 좇으면서도 돈을 경멸했고, 끊임없이 연애 소설을 통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진정성있는 순수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작가로서 충분히 출세했지만 끊임없이 빚에 시달렸고, 여러 여인들을 사랑했으나 사랑을 통해 끝까지 행복감을 느끼지도, 결실을 맺지도 못한 발자크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작품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모순,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한 발자크 자신 역시 이 부분에서 예외일 수 없다. 예외이기는 커녕 자신을 증명삼듯 그의 삶은 모순과 이중성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주저없이 인간 본질에 대해 지독하도싶을 만큼 폭로하고 비판한다. <골짜기의 백합>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보여지는 그 통쾌한 신랄함이라니...


책장을 넘길수록 드는 생각은, [인간극]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군상이 다 집합해 있는 것 같다. 저자의 해석을 읽다보니 [인간극]을 출간순으로 읽으면 무척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발자크의 이런저런 모습(금사빠, 왜 사랑 얘기가 그토록 많은지 알겠더라는)과 알고 있었으나 작품에 미친 영향까지 짚어내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번 책읽기가 무척 재미있고 의미있는 기회가 되었다. 더 많은 발자크의 작품이 번역되기를 고대하며. 총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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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키스 스토리콜렉터 98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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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일  
크리스티안순 근교의 한 마을, 자신의 집 헛간에서 젊은 남성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시신으로 발견된다
  


2007년 3월 19일
쉰세 살 우르술라와 스물아홉 살 야콥은 첫눈에 반해 4개월간 동거 중이다. 우르술라에게는 로또에 당청된 엄천난 돈이 있었고, 이 사실은 그녀의 딸 아네모네만 알고 있다. 그런데 야콥은 그 얘기를 듣고 난 직후, 기다렸다는 듯 우르술라에게 반지를 내밀며 청혼한다. 타이밍상 의심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미리 준비된 반지와 그렇다면 오히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야콥의 말에서 한치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다. 우르술라는 그가 돈 때문에 청혼한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을 테지만. 기숙학교의 미술 선생으로 있는 우르술라는 야콥과 함께 꾸려나갈 새로운 인생에 부풀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운영할 호텔을 알아보겠다고 떠난 야콥은 우르술라의 전 재산을 인출해 사라졌다. 심지어 급여 통장까지. 








 
이쯤되면 야콥이 사기꾼이라는, 그것도 아주 계획적이고 지능적인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독자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이 3분의 1쯤 넘어가면서 궁금해지는 건 이 매끈하게 생긴 젊은 남자의 살인을 불사하는 사기 행각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도입부에서 미카엘이라는 젊은 남성이 처참하게 살해된 살인 사건과 돈 많은 여성들의 뒤통수를 치고 돈을 빼돌리는 사기 사건의 연관성이다. 그런데 작가는 때맞춰 야콥과 살인 사건의 피해자 미카엘의 접점을 보여준다.    
 


본캐는 카피라이터, 부캐는 사립탐정인 단은 딸의 부탁으로 우르술라의 사건을 맡기로 하고, 파트너 주선 포털 사이트에 야콥의 신상을 업로드하면서 본격적으로 야콥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단서가 나오고 뜻하지 않게 단의 친구인 경찰 플레밍과 서로 탐탁치 않은 공조를 시작한다.  
 


야콥 혹은 요아킴, 한때는 요하네스였던 제이의 주변 인물들과 피해자들, 그리고 포털 사이트를 통해 들어온 제보를 따라가던 플레밍과 단은 그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대면하고,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어 사건의 중심에 다다를수록 가출, 중독, 수감, 사기에 감춰진 제이의 죄와 벌, 속죄와 가까워지면서, 독자는 사건과 별개로 감정의 반전을 맞게 된다.  









 
제이와 에릭은 당첨자들의 정보와 삶을 추적하고 관찰하면서 그들의 결핍된 부분을 주도면밀하게 파고들어 범죄를 저질렀다. 요하네스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제이와 사랑에 빠진 이유가 오직 그의 외모와 젊음 때문이기만 했을까? 중년의 막바지에 혼자서 삶을 감당하며 외로움과 정서적 고립에 둘러쌓인 채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공허함, 전화번호 하나면 모든 개인 정보 노출이 가능한 현재의 세상에서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예수의 12제자 중에 유일하게 진실성 있는 사도라는 이유로 유다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던 제이, 그리고 제이가 배신했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그의 첫사랑은 제이를 유다라고 불렀다. 유다가 사랑했던 스승에게 키스하고 배신했듯, 자신에게 그러했으므로. 그러나 살기 위해 시작한 생계 수단이 범죄가 되고, 어린 동생의 죽음에 원인 제공을 했다고 믿으며 자책해온 제이의 심정은 그의 어깨에 새겨져 있던 산스크리트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프레야시타'. 
 


개인적 감상을 별개로 범죄자에게 불행한 어린 시절이라는 서사를 입혀 범죄를 정당화하는 것에는 분명 위험 요소가 있다. 더구나 제이에게 아픈 과거가 있는 것, 그가 겉으로 보이는 날라리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죄의 무게를 덜어내면 곤란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비록 사랑은 아니었다해도 우르술라에게 안정감을 느꼈던 제이가 사기극으로 벌어들인 돈의 쓰임을 그녀에게 말했다면, 우르술라는 흔쾌히 그에게 돈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제이가 호텔에서 읽고 있었던 마태복음 26장은 이렇다.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었다. 주교의 군대가 신의 아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체포할 수 있도록. 




악에 대한 사죄, 죄에 대한 속죄, 자신에게 씌어진 저주와 배신자의 역할. 이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신 본인일까, 아니면 타인에 의해 혹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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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안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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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안희연은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친구와 대화 혹은 서신을 나누는 등 일상에서 만나는 단어들을 채집해 기록한다. 이 책은 그렇게 채집한 단어들에 대한 단상이다.


책을 읽으면서 특별한 감상을 느끼지 않으면 뭔가 잘못 읽었거나 혹은 내가 놓친 게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책이 있는데, 이 에세이는 마치 내가 쓴 내 이야기인 양 읽으며 공감하고, 나를 시인의 자리에 대신 앉혀 놓으면서 짧은 생각을 했더랬다.










먼저 작가를 따라 써 보는, 지금 기준으로 작은 소망을 써보자했는데, 음... 어렵다. 일단 '작다'의 기준이 모호하고, 쓰다보니 소원인지 소망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알겠더라는. 시인이 왜 '까다로운 작은 소망들'에 꽂혔는지.


'헤아리며 살자'라는 말. 나도 '헤어린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람을, 식물을, 주변의 무엇을 헤어릴 수 있는 사람의 품은 얼마나 넉넉한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친구들과 손편지를 주고 받은지 백만 년은 된 것 같다. SNS나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으로 짐작이 가능한 근황, 두 개 손가락으로 터치 몇 번이면 안부인사를 나눌 수 있는 세상(나의 지인은 아주아주 오랜 뒤에 인간은 다 퇴화되고 손가락만 남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에서 손편지가 구시대 유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귀하다. 원래 유물은 귀하니까.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안다. 쓰는 맛, 기다리는 맛, 기다림 끝에 읽는 맛을.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 시인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에게도 셋이나 있다(이런...). 아... 편지 쓰고 싶다(받고 싶다도 아니고). 찐하게!  


내성적인 시인은 어린시절 자신의 한자 이름이 잘못 해석되어도 또렷하게 짚어내지를 못했다고 한다. 내 이름에는 편안하고 기쁘게 살라는 할아버지와 아빠의 바람이 담겨 있다(물론 할아버지가 결정하셨고, 아빠는 이~쁜 딸이름의 어감이 남자애같다고 기어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을 따로 지어 불렀다. 그 이름은 연꽃처럼 맑은 사람이되라는 뜻이었는데.). 적어도 그닥 힘들게 살고 있지는 않으니 이름의 한 글자는 그럭저럭 맞춘 듯 하다. 삶이 늘 기쁘기만 할 순 없으니.


내 삶의 '모루'는 무엇일까. 책에서의 표현처럼 후려치는 모루에 의해 휘청거리는 시절이 누군들 없었으랴. 그러나 어찌되었든 나는 여타 많은 사람들처럼 시간의 힘에 기대어 잘 지나왔고, 지나가는 중이다.  


시인이 탕종을 빗대어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얘기하는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다. 나 또한 삶에서 우선하는 점은 회복력과 유연함이며, 하나 더 보태자면 탄력성이다. 유연함은 평소 마음씀이 넉넉하지 않으면 갖추기 힘들다(그래서 내가 힘들다). 회복력은 몸이든 마음이든 나 스스로 건강하기 위해 선택한 삶에 대한 태도인데, 새가슴에 뒤끝까지 긴 내가 지속적으로 유지하기에는 쉽지 않은 덕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나마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시를 번역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서 문득, '시는 소설보다 번역하기가 훨씬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에서 오는 질감, 단어의 경중과 온도, 마음의 파도까지 담아낼 수 있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 더 신기하다. 겨우 청소년 문학 원서만 어찌어찌 읽어내는 내 수준으로는 어림없겠다(갑자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를 번역한 분의 위대함이여!).


시인은 복숭아를 보면서 '시드 볼트'를 얘기하는데, 나는 엉뚱하게 침이 고인다. 과일 중 딸기와 복숭아를 가장 좋아하는 나는 한여름 잠깐 먹을 수 있는 복숭아의 귀함이 늘 아쉽다. 침을 삼키며 그의 글을 읽자니, '시드 볼트'의 문이 열리는 그날이 오지 않는 것이 인류와 지구가 제자리를 건겅하게 지켜내고 있다는 방증일 터다. 시인은 자신만의 '시드 볼트'를 이야기한다. 시인 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슴 깊숙한 곳에 잠궈 놓은 '시드 볼트'가 있을 것이다. 현실의 시드 볼트와는 다르게 우리의 '시드 볼트'는 활짝 열려야 제 구실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시드 볼트'가 열릴 때 기꺼이 귀담아 나눠야 할 것이다.
  


시인의 감성과 시인의 시선과 시인의 언어로 만난 일상의 찰나들. 이렇게 말을 예쁘게(오그라드는 거 말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 참, 오랜만에 푸근했다. 첵을 덮고 보니, 요즘 나의 상태는 시를 읽어야하는 때인 것 같다.





♤ 한겨레출판사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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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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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 반세기 동안 <파리 리뷰>에 실린 작품들 중 세계적 작가들이 뽑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의 작품들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작가 개인의 주관적 선택이니만큼 이 책에 실린 작품들만 최고다!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읽어보니 <파리 리뷰>에 실리는 것만으로도 신인 작가들한테는 굉장한 영광인 듯 하다). 뽑힌 열다섯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그 작품을 뽑은 작가들의 소감도 독서 에세이처럼 재미지다.









실린 작품의 작가들로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데니스 존슨, 레이먼드 카버, 제임스 설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이 있고,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댈러스 위브나 리디아 데이비스 등이 포진해 있다. 그들을 뽑은 작가들 중에도 반가운 제프리 유제니디스(이 양반은 마치 초경량 소설을 쓰듯 서평을 썼다)와 앨리 스미스도 보인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들은 <궁전 도둑 / 이선 캐닌> <어렴풋한 시간 / 조이 윌리엄스> <방콬 / 제임스 설터> <늙은 새들 / 버나드 쿠퍼> <스톡홀름 야간비행 / 댈러스 위브>를 꼽는다. 



삶의 비극이 일상화되면서 찾아오는 무감각(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출생부터 삶의 성장 과정에 이르기까지 사랑받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절망 뿐인 맬의 쓸쓸함(어럼풋한 시간), 학생들을 더 나은 인생과 도덕적인 삶으로 이끌고 싶어 선생이 되었으나 도덕적이지도, 용감하지도 못한, 그저 무력한 방관자에 불과했던 헌더트(궁전 도둑), 삶과 그런 척 하는 삶의 경계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현대인들, 우리의 일상을 언제라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불행들(라이클리 호수), 한때는 시대를 이끌며 전투적인 삶을 살았으나 어느새 나는 법을 잃어버린 새처럼 무기력하게 새장에 갇힌 새로 살아야하는 노년의 삶(늙은 새들), 명예를 위해서라면 이깟 몸뚱이 쯤이야 초개같이 떼어벌리 수 있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스톨홀름행 야간비행). 



<늙은 새들>에서 노인 거주시설을 설계하는 건축가 아들에게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공중전화로 전화한다. 한참동안 대화를 이어가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어디에 있냐는 아들의 절박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시간이 다 된 공중전화는 그대로 끊기도 만다. 둘의 대화를 살펴보면 애증이 켜켜이 쌓인(대부분의 부모 자식 간이 그렇지 않을까) 듯하다. 위급한 순간에도 오가는 고성 속에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아들의 두려움이 짙게 느껴진다.



가장 독특한 작품은 <스톨홀름행 야간비행>이다. 예순여섯 살의 무명 작가는 [파리 리뷰]에 소설이 실리는 조건으로 왼쪽 새끼손가락을 걸고 거래한다. 이를 시작으로 출판 및 문학상과 손, 팔, 다리, 발 등 신체 부위를 거래하며 작가로써 승승장구 한다(이 신체 부위는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의 형태로 팔린다). 마침내 노벨상과 안구를 맞바꾸고,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스톡홀름 비행기에 탑승한 그의 몸은 고름과 곪아가는 상처투성이다. 보잘 것 없는 그의 몸은 애처롭다기보다 끔찍하다. 소설은 흡사 <파우스트>를 연상시키지만, 결이 무척 다르다. 주인공 노老 소설가에게 작가로서의 자긍심이나 불멸의 작품 따위는 안중에 없다. 편집자가 시키는대로 원고를 수정할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도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소설가로서의 명성 뿐이다. 상당히 기괴하고, 안쓰러우면서, 블랙 코미디같은 작품이다.



나의 최고작은 역시 제임스 설터! <방콕>은 대부분 캐럴과 홀리스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아내와 딸이 있고 서점을 운영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홀리스를 찾아와 함께 방콕으로 떠나자고 유혹하는 전 연인 캐럴. 홀리스는 그녀에게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할 뿐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고, 캐럴은 돌아가라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아내와 딸까지 들먹여가며 자극적인 말로 유혹한다. 그러나 유혹에 실패한 캐럴이 돌아가는데, 정작 갈등은 그녀가 서점을 나가고 난 이후다. 홀리스는 캐럴의 말처럼 자신이 '삶'을 살고 있는지, '그런 척'하고 있는지 고민한다. 어쩌면 홀리스의 마음은 이미 방콕행 비행기에 탑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몸은 아직 서점 책상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홀리스의 갈등과 흔들림이 낯설지 않다. 역시 설터!



독후노트에는 열다섯 작품의 감상평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놨을만큼 모든 작품이 좋았다. 내가 어디서 이 조합의 단편집을 읽을 수 있을까.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레이먼드 카버 작품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카버적 소설'을 다시 만나는 기쁨 역시 빠지지 않는다. 느닷없이 닥쳐오는 불행에 속수무책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극복 뿐이다. 마찬가지로 가슴에 훅 들어오는 작품들을 마주대할 때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읽는 것 뿐이다.  



"생각이 움직일 수 있는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아래로 흐르는지 궁금해."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에서)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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