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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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 반세기 동안 <파리 리뷰>에 실린 작품들 중 세계적 작가들이 뽑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의 작품들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작가 개인의 주관적 선택이니만큼 이 책에 실린 작품들만 최고다!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읽어보니 <파리 리뷰>에 실리는 것만으로도 신인 작가들한테는 굉장한 영광인 듯 하다). 뽑힌 열다섯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그 작품을 뽑은 작가들의 소감도 독서 에세이처럼 재미지다.









실린 작품의 작가들로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데니스 존슨, 레이먼드 카버, 제임스 설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이 있고,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댈러스 위브나 리디아 데이비스 등이 포진해 있다. 그들을 뽑은 작가들 중에도 반가운 제프리 유제니디스(이 양반은 마치 초경량 소설을 쓰듯 서평을 썼다)와 앨리 스미스도 보인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들은 <궁전 도둑 / 이선 캐닌> <어렴풋한 시간 / 조이 윌리엄스> <방콬 / 제임스 설터> <늙은 새들 / 버나드 쿠퍼> <스톡홀름 야간비행 / 댈러스 위브>를 꼽는다. 



삶의 비극이 일상화되면서 찾아오는 무감각(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출생부터 삶의 성장 과정에 이르기까지 사랑받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절망 뿐인 맬의 쓸쓸함(어럼풋한 시간), 학생들을 더 나은 인생과 도덕적인 삶으로 이끌고 싶어 선생이 되었으나 도덕적이지도, 용감하지도 못한, 그저 무력한 방관자에 불과했던 헌더트(궁전 도둑), 삶과 그런 척 하는 삶의 경계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현대인들, 우리의 일상을 언제라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불행들(라이클리 호수), 한때는 시대를 이끌며 전투적인 삶을 살았으나 어느새 나는 법을 잃어버린 새처럼 무기력하게 새장에 갇힌 새로 살아야하는 노년의 삶(늙은 새들), 명예를 위해서라면 이깟 몸뚱이 쯤이야 초개같이 떼어벌리 수 있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스톨홀름행 야간비행). 



<늙은 새들>에서 노인 거주시설을 설계하는 건축가 아들에게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공중전화로 전화한다. 한참동안 대화를 이어가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어디에 있냐는 아들의 절박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시간이 다 된 공중전화는 그대로 끊기도 만다. 둘의 대화를 살펴보면 애증이 켜켜이 쌓인(대부분의 부모 자식 간이 그렇지 않을까) 듯하다. 위급한 순간에도 오가는 고성 속에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아들의 두려움이 짙게 느껴진다.



가장 독특한 작품은 <스톨홀름행 야간비행>이다. 예순여섯 살의 무명 작가는 [파리 리뷰]에 소설이 실리는 조건으로 왼쪽 새끼손가락을 걸고 거래한다. 이를 시작으로 출판 및 문학상과 손, 팔, 다리, 발 등 신체 부위를 거래하며 작가로써 승승장구 한다(이 신체 부위는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의 형태로 팔린다). 마침내 노벨상과 안구를 맞바꾸고,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스톡홀름 비행기에 탑승한 그의 몸은 고름과 곪아가는 상처투성이다. 보잘 것 없는 그의 몸은 애처롭다기보다 끔찍하다. 소설은 흡사 <파우스트>를 연상시키지만, 결이 무척 다르다. 주인공 노老 소설가에게 작가로서의 자긍심이나 불멸의 작품 따위는 안중에 없다. 편집자가 시키는대로 원고를 수정할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도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소설가로서의 명성 뿐이다. 상당히 기괴하고, 안쓰러우면서, 블랙 코미디같은 작품이다.



나의 최고작은 역시 제임스 설터! <방콕>은 대부분 캐럴과 홀리스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아내와 딸이 있고 서점을 운영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홀리스를 찾아와 함께 방콕으로 떠나자고 유혹하는 전 연인 캐럴. 홀리스는 그녀에게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할 뿐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고, 캐럴은 돌아가라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아내와 딸까지 들먹여가며 자극적인 말로 유혹한다. 그러나 유혹에 실패한 캐럴이 돌아가는데, 정작 갈등은 그녀가 서점을 나가고 난 이후다. 홀리스는 캐럴의 말처럼 자신이 '삶'을 살고 있는지, '그런 척'하고 있는지 고민한다. 어쩌면 홀리스의 마음은 이미 방콕행 비행기에 탑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몸은 아직 서점 책상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홀리스의 갈등과 흔들림이 낯설지 않다. 역시 설터!



독후노트에는 열다섯 작품의 감상평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놨을만큼 모든 작품이 좋았다. 내가 어디서 이 조합의 단편집을 읽을 수 있을까.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레이먼드 카버 작품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카버적 소설'을 다시 만나는 기쁨 역시 빠지지 않는다. 느닷없이 닥쳐오는 불행에 속수무책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극복 뿐이다. 마찬가지로 가슴에 훅 들어오는 작품들을 마주대할 때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읽는 것 뿐이다.  



"생각이 움직일 수 있는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아래로 흐르는지 궁금해."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에서)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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