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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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는 무엇이 되어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정리해고를 당하고 실업급여를 모두 받아 쓸 때까지도 재취업은 어렵기만 하다. 살고 있던 집을 비워주고, 가진 돈에 맞춰 이사를 한 후 라면에 물릴대로 물린 상황에서 발견한 플라워약국의 구인 광고. 다른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면 약국에 면접을 보러 갔을지는 알 수 없지만, 카드 결제액을 알리는 문자와 플라워약국 외에는 어디에서도 연락이 없기에, 발걸음은 약국을 향하고 있다.  








 
학생-수험생-취준생으로 이어지는 '생'의 궤적, 그리고 직장인보다는 여전히 직장'생'에 가까운 흐름의 중간에서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되어버린 '양'. 이때 '양'이 느낀 감정은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하자 무엇이든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이었는데, 스스로 '샐러리맨'의 위치를 던져버린 나조차도 위기감을 느꼈기에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면접을 위해 마주한 김 약사는 '양'에게 유령이라고 말한다. 출근하는 날 처음 만난 '조 부장'을 소개시켜주는 김 약사는 그 역시 유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양'은 유령이 되기로 했다. 자기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그러려니 하기로, 상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직장 생활을 비롯한 사회 관계가 늘 계산적이고 기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연예인들이 우스갯말로 하는 라인 타기와 제 잇속에 맞춰 관계를 맺고, 무한 경쟁 안에서의 승자독식 방식이 삶을 일정 부분 피폐하게 함은 부정할 수 없다. 김 약사의 기준대로라면 우리는 삶의 일정 부분을 유령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조'는 자신이 왜 유령이 됐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자기가 유령같은 존재가 됐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령'이 되는 것은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다. 부모님과 있으면 불행하고, 혼자서 고독과 대면할 때보다 훨씬 외롭다는 '양'의 단편적인 말을 통해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특히 '양'과 그녀의 어머니를 보면서 모녀 사이의 애증에 대해, 여전히 유교적 사고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에게 딸이 갖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이 길어졌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는 적절한 거리두기는 어떤 관계에서든 참 쉽지 않다.  


나의 성장은 급여 통장에 찍히는 액수와 비례하고, 분업이라는 것은 사용자의 안전과 편의보다는 수익에 의해 결정나는 제 밥그릇 챙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래서 실패자는 유령이 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 쓰디 쓰다.  


불신 앞에서 논리는 무용하고, 세상은 불신으로 점철되었다. 상대를 신뢰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느 누군가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게 될까. 아니, 흔적이 남기는 할까.  


ㅡ 


'양'은 불운의 확률과 행운의 확률에 대해 묻는다. 이 역시 어디에 기준을 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질문일 터다. 그런데 그보다는 왜 잭팟을 꿈꾸는 세상이 되어가는지에 대해 물을 일이다.  


구조조정이 마치 유행하는 챌린지라도 되는 듯 너도나도 동참하던 시기에 재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회사에서 제비뽑기 하듯 조정 대상이 정해졌고, 그안에는 이제 막 아버지가 된 선배, 결혼을 불과 며칠 앞둔 동료, 입사한지 고작 1년이 채 안 된 후배도 있었다. 이듬해에 공채 모집을 통해 퇴사한 인원보다 더 많은 신입들이 입사했다. 부당함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 이들 역시 유령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그 당시 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이 유령이었다.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순간 유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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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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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중.단편 소설집이다. 제목에서 보여지듯 공포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 공포는 인간 내면의 정서와 닿아 있다.  









[실종]은 하루 아침에 느닷없이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거동이 불편한 노부, 업무차 외출했던 변호사, 피로연에서 사라진 신랑, 스승의 심부름을 갔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젊은 의사, 해외 출장 도중 연락이 두절된 가장. 작가는 앞에서 언급한 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형사 경찰 시대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범죄 수사에 대한 인식이 부재했던 시대에 발생한 가해자와 이를 악용한 이들을 꼬집는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실종된 아버지보다 장성한 아들이 더 괘씸하더라는. 


ㅡ 


실린 작품 중에서 고딕소설에 가장 부합(으스스 하다)하는 [늙은 보모 이야기]. 이 기괴한 사건의 배경에는 버림받은 여성이 존재하고, 이에 따른 모든 고통은 여성들이 감당한다. 가해자는 분명 두 여성을 농락한 남성임에도 죽는 순간까지 원망하는 대상도 여성이고, 죄책감도 여성이 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그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 퍼니벌 부인이 젊은 시절 저지른 일은 나이 들어 절대 되돌릴 수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죽어가는 장면에서 비단 그녀만의 일은 아닌듯해 안타까움이 컸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음악가와 더불어 가장 밉상 캐릭터는 [대지주 이야기]의 히긴스다. 그나마 탐욕과 허영의 끝을 보여주는 히긴스는 죄의 대가를 치뤄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는지 어쩌는지... . 그나저나 '하얀 집'에 세들어 그 (탐욕)의 벽장을 찾아볼 의향이 있는지 묻는 작가의 질문에, 정중히 거절의 뜻을 드린다.  


ㅡ  


개인적으로 실린 작품 중 최고라고 꼽는 [빈자 클라라 수녀회]. 불과 100쪽이 채 안 되는 분량의 소설이지만 세대를 엮은 촘촘한 스토리가 인상적이다. 브리짓 - 메리 - 루시로 이어지는 삼대의 비극적 운명. 이 작품에서도 죄는 남성이 저저르고, 그 대가는 세대를 초월해 여성이 치르면서 동시에 또 다른 가해자가 되며, 이를 해결하는 사람 역시 여성이다. 


폭동이 가라앉고 얼마 후 클라라 수녀회에서 날카로운 종소리가 울리자, 수녀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 양손에 먹거리를 들고 수녀회를 향히 긴 행렬을 다급히 이어간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 뭉클한 감정이 올라오는데,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자신의 분노와 증오, 그리고 죄책감을 고해하듯 나지막히 읊조리며 눈을 감는 그의 모습에서 나 역시 안식을 빌게 된다.   


ㅡ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도 세대를 잇는 서사를 그리고 있다. 예언과 참혹한 저주, 오랜 세월이 흘러 소멸됐다고 믿었던 저주의 부활과 부자父子의 갈등(여기서 부자를 이간질하는 존재가 계모라는 설정은 마뜩치 않지만), 그리고 예언의 마지막 실현. 문득, 어린 시절 상실감을 느낀 아버지의 일방적인 애정에서 벗어난 이후 가족으로부터 환대의 경험도, 위로와 이해의 경험도 없는 오언에게는 네스트의 가식적인 환대도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애잔했다.   



[굽은 나뭇가지]는 읽으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소설이다. 소설 초반에는 비록 늦은감이 있지만 첫사랑의 결실을 맺은 네이선과 헤스터의 따뜻한 이야기이기를 바랐다. 조카딸 베시를 데리고 왔을 때까지만 해도 앞선 작품들이 내내 긴장감이 넘쳤으니 이번에는 따뜻한 애정이 가득한 소설이리라 짐작했거늘... . 네이선과 헤스터를 향해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비난할 수 없다. 다정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 자체가 좋은 본보기였음에도 엇나간 아들은 어째야 할까.  



[궁금하다, 사실인지]의 도입 부분은 기이함에 바짝 긴장을 하게 되는데, 서너쪽 넘기면 바로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어두운 밤에 트루 지역의 들판에 홀연히 서있는 성 한 채. 환대를 해주는 문지기를 따라 들어간 성 안의 살롱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를 읽다보면, 독자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인물들이자 대화 내용이다. 이 유쾌한 상상력이라니. 고딕 이야기 마지막에 이토록 환상적인 작품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ㅡ  


일곱 편의 소설은 인간이 갖는 불안과 공포, 분노와 증오, 사랑 등 인간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  


사랑은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해서 정의하기에 쉽지 않다. 소설 속에 등장한 여성들은 상대 남성과 사랑에 빠지고 서로에 대해 깊게 알아볼 새도 없이 결과를 얻으려고 한다. 여성에게 상속의 권한이 없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결혼이 곧 생계 수단이자 사회적 지위가 되는 여성이 부딪쳐야할 벽을 감안하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관점에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욕망과 탐욕에 눈이 멀어 본능대로 일을 저지른 남성들은 한발짝 물러나 방관할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서로를 증오하고, 때로는 서로를 측은해하며, 때로는 연대하는 여성 인물들의 모습에서 읽는 동안 적잖이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탔다. 작가는 진정한 사랑과 그 사랑이 뒷받침 된 선행이야말로 가치있는 행동임을 얘기한다.   


이 소설에서 정말 공포스러운 존재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도, 갑자기 실종된 이들도 아닌 인간성을 상실한 채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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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조건 - 철학이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
오사 빅포르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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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철학 분야의 교수인 저자가 지식과 언어, 사실(진실)과 거짓, 사고와 교육 등을 철학적으로 접근해 거짓과 왜곡이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교란시키고 혼란에 빠트리는가를 짚어내며 앞으로 우리가 좀더 깊게 숙고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2016년 미국 대선과 당시 당선된 대통령의 사례를 자주 들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지난 대선 또한 역대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를 치른만큼 공감하는 바가 있다. '사실fact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책은 지식의 저항, 왜곡된 사고, 거짓말과 선전, 교육 현장 등에 대한 원인과 그에 따른 현상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사람들이 거짓을 믿고 계속해서 그 믿음을 고수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을 대부분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기 때문인데 부적절한 교육, 신뢰하기 힘든 여론, 무지한 친구, 정치 선동가 등으로 얻는 정보들이 그렇다. 그리고 재능과 무관하게 누구도 이에 저항하기 어렵다. 무지는 비판적 사고 능력에 영향을 미치며 악순환의 고리를 빠르게 형성한다. 타당한 반대 증거가 있음에도 잘못된 뭔가를 계속해서 믿는 이유도 이와 같다. 이는 편향 혹은 인지 왜곡의 악순환을 부른다. 따라서 저자는 칼 포퍼의 이론을 예로 들며 우리가 자신의 믿음이 참임을 입증하기 보다는 거짓임을 입증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심리적 기제 중 하나는 '의도된 합리화'다.  믿을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우를 일컫는데, 이는 자신의 믿음이 위협을 받을 때 발동하는 무의식 기제다.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적 집단의 믿음과 일치하는 믿음을 고수하길 원하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를 위해 믿음을 재확인시켜주는 증거만을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편승 효과도 한 몫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성향을 말하는데, 주변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때 편안함을 느끼고, 그렇지 않을 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다른 또 하나는 내집단 편향. 자신의 집단에 속한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성향을 말한다. 예를 들면 피해자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동정 여부가 결정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양극화가 재앙인 이유는 상반된 입장에서 선 사람들이 서로를 멀리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수록 우리가 진실에 도달할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지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전에 비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으나 동시에 세상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유형의 무지, 즉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과 믿음의 부재가 존재한다. 우리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주제와 관련해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 역시 인지 왜곡 중 하나다. 페이스북 출현 이후 검색 엔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콘텐츠 공유가 수월해지면서 범위는 확대되어 갔고, 공유되는 콘텐츠의 진실 여부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클릭 경제와 필터 버블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이는 내집단 편향을 강화시켰다.  


여기에는 음모론도 빠질 수 없다. 음모론의 특징은 종종 적절하게 설명되지 않은 사건의 특정 세부 사항을 강조하고(예 : 1969년 미국의 달 착륙), 근거를 약화시키는 공격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 허위 입증을 견대낼 수 있도록 설계된다는 것인데, 만약 음모에 반하는 결정적 증거가 등장하면, 이 증거가 음모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음모론을 공고히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음모론이 번성하기에 온라인은 최적화되어 있다. 우리는 온라인 상에서 접하는 수많은 정보들이 독립된 출처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이들 출처가 모두 동일한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는 소수의 출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가짜 뉴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확한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현상은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전체주의 국가의 선전과 아주 흡사하다. 가짜 뉴스와 가스라이팅의 목표는 시민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지도자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진실과 이성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세상에 대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저자는 전체주의를 상기시키는 가짜 뉴스와 가스라이팅의 가장 파괴적인 대항 무기는 역선전이 아니라 증거와 객관적 진실,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우리는 비판적 사고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유형의 인지 능력이 요구되는지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적 사고 요구가 현실을 둘러싼 싸움에서 또 하나의 무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은 학교에서 시작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는 비판적 사고 교육에 점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크게 달라지지 않는 입시 제도, 학습 콘텐츠의 부족 등 교육 현장에서 갖는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교수법의 지지 여부를 차치하고, 어떤 교수법이든 창의와 사고는 기초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주변을 돌아보면 교육의 한쪽 측면에서는 지나친 구성주의로 수업을 이끌어 기초 학습이 부족한 경우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주입식 교육으로만 수업이 채워져 수동적으로 학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일관되지 않은 교육 목적으로 인해 생기는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의 몫이다. 무엇보다 교육 목적에 있어서 우선해야 할 것은 가치와 평등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교수법은 없다. 어떤 가치를 두고 교육을 할 것인지와 국가 내 어디에서든 평등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자 얘기가 여기까지 흘렀는가. 학습 과정에 있어서 의미를 이해하고 비판적 사고를 위해서는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다. 이는 앞서 말했던 현대 사회의 환경에서 비판적 사고를 함양해야 한다는 점과 이어진다. 이론적 지식, 이해, 기억 능력이 우리가 사고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이는 어린 시절부터 학습되어지는 것과 연관이 있다.  



인지 왜곡은 인류의 탄생과 함께 존재했고,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의 일부다. 거짓말과 선전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성적 주장과 과학에 대한 믿음에도 언제나 이의가 제기됐다. 그러나 양극화, 분열, 인지 왜곡, 거짓 정보, 포퓰리즘은 그 정도를 더해가고 있고, 해결책도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 요소 중 하나라도(그 이상으면 더욱 좋고) 바꿀 수 있다면 최악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진정 시킬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희망을, 위험과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뭔가 시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두고 있다. 더 나은 사고와 인지 왜곡으로부터 벗어나 정상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중요한 요소ㅡ비판적 사고, 출처 비평, 전문가의 역할, 팩트 체크ㅡ를 들고, 이것들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상반되고 서로가 진실이라고 주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지쳐 진실과 이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된다. 저자는 이에 대한 대안을 6부에서 제시하는데, 개인적으로 여기에 한 가지만 더 보태자면, 아무리 강하게 확신하더라도 내가 '틀릴 수 있다'라는 인식이다. 지나친 자기 검열도 문제지만, 과도한 자기 확신도 오류가 될 수 있다.  


책 전반에 걸쳐 철학자의 시선에서 현실적 사례를 들어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해석하고 있다. 언급한 가짜 뉴스, 거짓 정보, 가스라이팅 등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그에 대한 문헌도 적지 않으나 5부, 6부에서 제시된 내용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고 숙제로 남았다. 늘 그렇듯 실천적 행동이 따라야함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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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개정판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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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작고한지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내가 처음 읽은 사노 요코의 에세이는 <사는 게 뭐라고>였다. 그런데 그 책을 펼친 장소가 공교롭게도 전철역 지상 승차장이었다. 혼자 큭큭대던 웃음이 깔깔로 바뀌면서 주변 사람들의 눈총도 받았건만, 전철을 타고서도 좀처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더랬다. 당시에 지금은 절판된 노라 에프런의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를 연달아 읽었는데, 이 양반도 만만치 않은 입심을 자랑하는지라 덕분에 한동안 유쾌했었다. 당시 나의 심리 상태가 어떤 지경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수필을 찾아 읽었던 걸 보면 꽤나 가라앉아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어떠한 훈계도 없이 유쾌한 웃음 뒤에 턱을 괴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사노 요코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수필집은 참으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속에 담아 두지 않고 걸름망 없이 툭툭 내놓는 말들에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잠시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현실이 소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든가, 성장기에는 부모의 훈시를 먹고 자라고 성인이 되어서는 정보와 소문에 묻혀 산다든가, 멋쟁이는 일단 부지런해야 한다든가, 사람 만나는 것도 재능이라는 말 등이 그렇다.  


새끼를 낳은 개를 보고 개는 돌연 개가 아니라 어머니가 됐다고 말하면서 부산스럽고 어수선했던 강아지가 슬픔과 체념을 받아들이는 눈을 하게 된 것을 꿰뚫는다. 여자가 한 번 어머니가 되어 버리면 어머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면서, 세상은 무책임하게도 어머니도 인간이며 여자라고 꼬드기지만, 아무리 꼬드김을 당해도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이기를 계속할 수 밖에 없음을, 그리하여 객관적 입장이 되기가 어렵다는 얘기에 얼마 전에 봤던 <쿠오바디스, 아이다>가 떠올랐다. 보스니아인, 통역관, 그리고 어머니. 그중에서 어머니의 역할에 무게를 둘 수 밖에 없는 아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삶에 지쳐 마지막 순간을 선택하는 이가 발견한 것이 나의 집 창문에서 나온 불빛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친구와 짓궂은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대화에서 나는, 사람은 저마다 각각의 해우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스치듯 든다.  


우리는 하루하루 노화되어 노인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렵고, 되고 나서도 어려우며, 그럼에도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어른이 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은 사실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만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영원히 어린애로 사는 것보다는 낫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사노 요코의 글들이 나에게는 "잘 하고 있구나"라는 격려로 읽힌다.  


자신이 죽은 뒤 주위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도록 노인이 된 후에는 야멸찬 사람이 되고, 남은 사람들이 성가시지 않도록 나이들어 물욕 없이 살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음과 동시에 땅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다면 좋겠다는 사노 요코의 글은 소박하고 아름답다. 인생을 관조하는 그의 통찰이 나에게는 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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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가 놓인 방 소설, 향
이승우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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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차 간 남미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업무를 마치고 들른 카페에서 도움을 받은 여성을 쫓아 나와 향한 곳은 바다. 한없이 깊고 나른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어찌할 수 막막함이 운무처럼 피어 올랐다. 그녀는 여행사 가이드 업무로 멕시코에 와 있었고, 그녀의 일정 마지막날에 맞춰 멕시코로 향하던 남편과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그녀의 삶에는 허망함만이 남았다.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리는 것이 호기심을 넘어선 간절한 염원으로 바뀐 데에 본인조차 당황스럽지만, 사흘 뒤 욱스말에서 그녀와 재회했다.  










화자의 내면이 서술자가 되어 자기 스스로를 '당신'으로 지칭하는 2인칭 소설이다(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아내가 요양 중인 첫사랑을 버젓이 만나러 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단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욕조의 물속에서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반복하는 여자가 만났다. 이들은 사랑으로써 서로를 위무할 수 있을까. 


남자는 좌천과 다를 바 없는 H시 지방 근무 발령을 받는다. 그는 이 결정을 놓고 아내와의 관계를 되짚으며 망설임 끝에 지방 발령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H시를 선택한 결정에 혹시 '그녀'에 대한 무의식이 작용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권태로워진 부부 관계. 첫사랑 K가 투병 중인 요양원에 드나드는 아내와 그가 아내에게 보낸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편지를 모두 읽은 남자는 가정을 지키고 싶은 욕구와 무너뜨리고 다시 짓고 싶은 욕구가 충돌한다. 그러나 지키든, 무너뜨리고 다시 짓든, 그 집이 어떤 집인지에 대한 또렷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H시에서 16개월만에 재회한 그녀는 남자에게 거처로 쓸 방을 하나 내어준다. 그리고 처음 찾아간 그녀의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욕조. 그녀는 물이 채워져 있는 욕조에 스스럼없이 몸을 담근다. 깊은 밤마다 그녀의 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ㅡ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남자는 권태와 아내의 외도(라고 추정하는) 등 흔들리는 가정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아는 것은 당장의 욕망 외에는 실상 아무것도 없다. 욕조에서 가라앉을듯 말듯 수면에 겨우 얼굴의 일부분만 내놓고 떠있는 그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바다에 수장된 가족의 죽음에 이입하며, 관처럼 보였던 욕조에서만이 평화로웠던 건 아닐까.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겠다는 착각으로 재회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자는 다시 찾아간 그녀 집의 욕조 안에 누워서야 여자의 상처에 이입하고, 자신이 간절하게 소망해온 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사랑에 실망한다. 순수한 사랑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틀어진 관계는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마치 진통제라도 되는 양 사랑에 대한 착각과 환상을 거부하지 못한다. 실체없는 사랑을 증명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랑이다. 


얼핏 사랑에 관한 내용으로만 해석될 수 있지만, 읽다보면 한데 얽혀 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 역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환상과 현실의 균형잡힌 줄타기.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하려나.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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