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가 놓인 방 소설, 향
이승우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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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차 간 남미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업무를 마치고 들른 카페에서 도움을 받은 여성을 쫓아 나와 향한 곳은 바다. 한없이 깊고 나른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어찌할 수 막막함이 운무처럼 피어 올랐다. 그녀는 여행사 가이드 업무로 멕시코에 와 있었고, 그녀의 일정 마지막날에 맞춰 멕시코로 향하던 남편과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그녀의 삶에는 허망함만이 남았다.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리는 것이 호기심을 넘어선 간절한 염원으로 바뀐 데에 본인조차 당황스럽지만, 사흘 뒤 욱스말에서 그녀와 재회했다.  










화자의 내면이 서술자가 되어 자기 스스로를 '당신'으로 지칭하는 2인칭 소설이다(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아내가 요양 중인 첫사랑을 버젓이 만나러 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단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욕조의 물속에서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반복하는 여자가 만났다. 이들은 사랑으로써 서로를 위무할 수 있을까. 


남자는 좌천과 다를 바 없는 H시 지방 근무 발령을 받는다. 그는 이 결정을 놓고 아내와의 관계를 되짚으며 망설임 끝에 지방 발령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H시를 선택한 결정에 혹시 '그녀'에 대한 무의식이 작용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권태로워진 부부 관계. 첫사랑 K가 투병 중인 요양원에 드나드는 아내와 그가 아내에게 보낸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편지를 모두 읽은 남자는 가정을 지키고 싶은 욕구와 무너뜨리고 다시 짓고 싶은 욕구가 충돌한다. 그러나 지키든, 무너뜨리고 다시 짓든, 그 집이 어떤 집인지에 대한 또렷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H시에서 16개월만에 재회한 그녀는 남자에게 거처로 쓸 방을 하나 내어준다. 그리고 처음 찾아간 그녀의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욕조. 그녀는 물이 채워져 있는 욕조에 스스럼없이 몸을 담근다. 깊은 밤마다 그녀의 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ㅡ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남자는 권태와 아내의 외도(라고 추정하는) 등 흔들리는 가정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아는 것은 당장의 욕망 외에는 실상 아무것도 없다. 욕조에서 가라앉을듯 말듯 수면에 겨우 얼굴의 일부분만 내놓고 떠있는 그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바다에 수장된 가족의 죽음에 이입하며, 관처럼 보였던 욕조에서만이 평화로웠던 건 아닐까.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겠다는 착각으로 재회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자는 다시 찾아간 그녀 집의 욕조 안에 누워서야 여자의 상처에 이입하고, 자신이 간절하게 소망해온 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사랑에 실망한다. 순수한 사랑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틀어진 관계는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마치 진통제라도 되는 양 사랑에 대한 착각과 환상을 거부하지 못한다. 실체없는 사랑을 증명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랑이다. 


얼핏 사랑에 관한 내용으로만 해석될 수 있지만, 읽다보면 한데 얽혀 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 역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환상과 현실의 균형잡힌 줄타기.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하려나.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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