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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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는 무엇이 되어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정리해고를 당하고 실업급여를 모두 받아 쓸 때까지도 재취업은 어렵기만 하다. 살고 있던 집을 비워주고, 가진 돈에 맞춰 이사를 한 후 라면에 물릴대로 물린 상황에서 발견한 플라워약국의 구인 광고. 다른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면 약국에 면접을 보러 갔을지는 알 수 없지만, 카드 결제액을 알리는 문자와 플라워약국 외에는 어디에서도 연락이 없기에, 발걸음은 약국을 향하고 있다.  








 
학생-수험생-취준생으로 이어지는 '생'의 궤적, 그리고 직장인보다는 여전히 직장'생'에 가까운 흐름의 중간에서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되어버린 '양'. 이때 '양'이 느낀 감정은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하자 무엇이든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이었는데, 스스로 '샐러리맨'의 위치를 던져버린 나조차도 위기감을 느꼈기에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면접을 위해 마주한 김 약사는 '양'에게 유령이라고 말한다. 출근하는 날 처음 만난 '조 부장'을 소개시켜주는 김 약사는 그 역시 유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양'은 유령이 되기로 했다. 자기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그러려니 하기로, 상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직장 생활을 비롯한 사회 관계가 늘 계산적이고 기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연예인들이 우스갯말로 하는 라인 타기와 제 잇속에 맞춰 관계를 맺고, 무한 경쟁 안에서의 승자독식 방식이 삶을 일정 부분 피폐하게 함은 부정할 수 없다. 김 약사의 기준대로라면 우리는 삶의 일정 부분을 유령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조'는 자신이 왜 유령이 됐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자기가 유령같은 존재가 됐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령'이 되는 것은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다. 부모님과 있으면 불행하고, 혼자서 고독과 대면할 때보다 훨씬 외롭다는 '양'의 단편적인 말을 통해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특히 '양'과 그녀의 어머니를 보면서 모녀 사이의 애증에 대해, 여전히 유교적 사고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에게 딸이 갖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이 길어졌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는 적절한 거리두기는 어떤 관계에서든 참 쉽지 않다.  


나의 성장은 급여 통장에 찍히는 액수와 비례하고, 분업이라는 것은 사용자의 안전과 편의보다는 수익에 의해 결정나는 제 밥그릇 챙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래서 실패자는 유령이 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 쓰디 쓰다.  


불신 앞에서 논리는 무용하고, 세상은 불신으로 점철되었다. 상대를 신뢰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느 누군가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게 될까. 아니, 흔적이 남기는 할까.  


ㅡ 


'양'은 불운의 확률과 행운의 확률에 대해 묻는다. 이 역시 어디에 기준을 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질문일 터다. 그런데 그보다는 왜 잭팟을 꿈꾸는 세상이 되어가는지에 대해 물을 일이다.  


구조조정이 마치 유행하는 챌린지라도 되는 듯 너도나도 동참하던 시기에 재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회사에서 제비뽑기 하듯 조정 대상이 정해졌고, 그안에는 이제 막 아버지가 된 선배, 결혼을 불과 며칠 앞둔 동료, 입사한지 고작 1년이 채 안 된 후배도 있었다. 이듬해에 공채 모집을 통해 퇴사한 인원보다 더 많은 신입들이 입사했다. 부당함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 이들 역시 유령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그 당시 나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이 유령이었다.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순간 유령이 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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